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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Aug 13. 2018

리더십-팔로워십-펠로우십

-동학공부 33

이제야말로 인류를 구원할 
리더십-팔로워십-펠로
우십이 강림하도록 기도할 때!


1.


리더십을 단지 정치나 경제(기업) 영역만이 아니라
종교의 영역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의미로 연장하여 말하면
종교적 리더십은 교화와 감화와 리화(理化)라는 말과 호환된다.

리더십은 팔로워십을 전제로 하여 성립한다. 
리더십은 팔로워십을 자아내는 힘을 말하며
팔로워십은 리더십을 리더십으로 성립하게 하는 조건이다.

우리는 리더십이 있어야 
그에 따르는 팔로워십이 형성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팔로워십에 의하여 비로소 리더십이 
가시화된다.


동학에서 수운의 리더십은 1차적으로
수운이 동학의 이치를 가다듬고 있던 용담(경주)으로
"원처근처 어진 선비"들이 "풍우같이 모여듦으로써,
다시 말해, '어진선비'들의 팔로워십이 이루어짐으로써 
구축되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해월 최시형에게 '수심정기(守心正氣)'의 도법을 전하며
사시지서 성공자거(四時之序 成功者去)!를 선언함으로써
완성된다.

다시 말해, 해월이라는 '후계자'에게 
미션을 이양하고, 2선 후퇴를 하면서
해월의 팔로워십이 완성되는 순간에야 비로소
수운(동학)의 리더십이 완성되었고,
그러므로, "리더십-팔로워십"이라는 용어는 
여합부절과 같은 단어임이 이에서 분명해진다.

이렇게 보면, '성공'의 의미도 비로소 분명해진다.
즉, 성공이란,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훌륭히, 최고의 수준으로 이룩한 것을 의미하기보다
리더십-팔로워십을 완성하였음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므로, 수운의 언행[그의 삶과 동경대전 및 용담유사]를
완전하고 완결되고 완료된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수운+해월+의암+춘암으로 확장하더라도 마찬가지다.


2.


'리더십-팔로워십'은 다시 한마디로
펠로우십이라 할 수 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만나 둘(多)가 되는 순간
공동체가 형성되고, 그 공동체가 공동체이게 하는 정신을
펠로우십이라고 할 수 있다.


3.


올해의 폭염을 두고
인류 절멸의 디스토피아를 말하는
목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이제 예민한 사람만이 아니라
누구나 느낄 만큼 심각하다는 증거다.

이 문제를 해결할 길(답)이 있을까?
있을 것이다.
문제가 있는 곳에는 답이 있게 마련이다.
다만,
우리(인류)가 그 문제를 풀 수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다.
게다가, 이 문제는 '마감시간'이 정해져 있다.
제출 시간을 넘기면, '0점' 처리가 되고 만다는 말이다.


문제의 답을 찾아가는 
미래형 종교적 리더십이 절실히 요구된다.

미래형 종교적 리더십은 팔로워십에 의해서만 현현되고
그런데, 리더십-팔로워십은 다시 펠로 우십으로만
존재한다.

이 '러더십-팔로워십-펠로우십'의 동학적 원형이 
'연원'(접)이다. (이것이 이 글의 소결론)


4.


천도교 교단  내에서는 
'연원'이 전근대적 조직 행태(동학시대)이며(인맥-중심)
근대(의암 손병희) 동학 - 천도교 개신(改新/開新)에 즈음해
'교구(지역-중심)'라는 근대적인 제도종교로 탈바꿈하(고자)했으므로
인맥[리더십-팔로워십]에 의존하는 연원제를 버리고
교구제를 정착시키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논의가 수십 년째 진행되고 있다.


한때는 이 둘이 '절묘한' 상보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고 얘기하고
그런 점에서는 접은 - 인맥중심 / 포는 - 지역중심의 근원이라는
고급스러운 진단도 진행된 적이 있다.

연원 - 교구가 선순환의 구조를 이룰 수 있다면
그러한 논의도 해 봄직하다.
그러나 항상 문제는 '디테일' 또는 '~할 수 있다면'이라는 조건절이다.


결론적으로[이 점은 더 실사구시해 보아야겠지만]
일반적인 (천도교단 안팎을 통틀어) 상식[지레짐작/예단?]과 달리
아마도, 연원 - 교구의 이원조직이
선순환 구조를 이루어 작동한 적은 역사상 한 번도 없지 않나
하는 것이 요즘의 내 생각이다.


동학 천도교의 최근 100년 역사가 
연원 형 조직/운영/정체성에서 교구 형 조직/운영/정체성으로의
이행 내지 이행 노력 내지 흉내내기(서구형 '종교')였다면
이제, 다시, 사즉생의 각오로 동학-천도교의 미래를 재구조화한다면
연원 형 조직으로서의 동학-천도교의 정체성을 
되살리는 것이 필요치 않나 생각한다.


5.


그것이 
'지역성 / 장소성'에 기반을 두는 학습공동체로서의 
동학의 의미이다. 
아직은, 머리속을 맴도는 이야기들이지만,
간간이 접하는 많은 선학(先學)들의 글들이
이미 이러한 사실을 지시하고 있다.
그것이 나에게 큰 위안이고, 
그것을 확인해 나가는 일(공부)가 큰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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