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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Aug 28. 2018

놀고 보고 먹고 보세

-동학공부 44


놀고 보고 먹고 보세

...



노회찬 의원은 그의 진지한 관심(정의로운 세상)에 대한 초지일관한 지향과는 "어울리지 않게"(이건 노동과 예술에 대한 이 사회의 선입견을 드러내기 위해, 다시 말해 이 글을 쓰기 위해 차용한 '레토릭'이다.  적어도 80년대 이후 우리의 운동은 얼마나 '악기'와 더불어 진행되었는가.) '첼로'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가 엄혹한 노동운동과 열악한 정치운동의 현장에서도 첼로라는 '고급한' 취미를 '향유'한 것은 월남한 실향민이자 노동자였던 아버지로부터 받은, '노동운동을 하더라도 악기 하나쯤은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을 잊지 않고, 삶의 일부로 여겨 실천했기 때문이다(노동자 아버지의 그 '선진적인 의식'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노동자 아버지', 당신의 삶은 그 아들 노회찬 의원님에 의해 '완성'되었다!//당당하게 일반화의 오류를 감수하며 선언하자면, "우리의 노동을 노동답게만 보장/수호/노동한다면, 노동자는 언제나 충분히 지혜롭고 정의롭고 자유롭다!)


수운 선생은 동학
에 입도하는 사람들에게 "(동학공부를 열심히 하여) 춘삼월 호시절에 놀고 보고 먹고 보세(용담유사, 권학가)"라고 당부(노래)했다. 


스승의 간절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동학 창도(1860) 이래 지난 159년 동안 동학(천도교) 하는 사람이 '놀고 보고 먹고 보는' 시간은 얼마나 되었을까? 며칠 전의 글에서도 썼듯이 동학(천도교)의 159년 역사는 실질적인 동란(운동) 상태가 아니면, 심리적인 동란 상태로 지나온 세월이 아닌가 한다. 동란은 외부로부터 온 것만도 아니다. 교단 내적으로는 (일제의 분열공작이 介在한다는 걸 전제하더라도) 신구파 분열 등이 그칠 날이 없었고, '인물상해(人物傷害)의 사례는 또 얼마나 많았던가. 무엇보다, 연원제의 '적폐'를 비롯하여, 시나브로 자정능력을 상실하고 방기하는 세월이 짧지만 굵었다. 그런 가운데, 천도교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귀머거리3년/장님3년/벙어리3년의 도통군자가 되거나, 바보가 되거나, 쌈꾼이 되지 않으면 제정신으로 살아 있을 수가 없었다. 또 그 틈을 헤집고 드는 '문장군(蚊將軍)'들은 얼마나 많았는가! 그런 속에서 '놀고 보고 먹고 보세'라고 노래하는 것은 또 다른 지탄의 대상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상황이 이러고 보니 외려, 동학(천도교)로부터 잠시 떠나 있는 시간이야말로 '안심안명(安心安命)'하는 기회가 되기까지 하였을 법하다. '수도(원)공동체'를 이루어 '천국'과 같은 평화와 기쁨을 누리는 시간/사람/기회도 없지 않았으나, 그것이야말로, 이 세계(국가)는 물론 천도교단 내부의 온갖 잡답(雜踏)에 휘둘려 '물 위에 뜬 기름' 아니면 '풀 잎 이의 이슬' 신세를 면치 못하였을 터.

한국인 전체로 범위를 넓혀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신과 함께'에서 보는 지옥의 풍경 중 나태지옥(거대한 맷돌에 쫓겨 끊임없이 달리거나, 깔리거나, 빠지거나)의 죄인들처럼 내달리고 내달리고 내달려 온 삶을 살아온 것이 우리들/나 자신 아닌가. 

누구를 탓할 일은 아닌 듯싶다. 어차피 이 세계(국가/사회/지역)의 모든 사람들을 '내 힘'으로 구원할 수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나 한 사람조차 구원하지 못하면서, 사회와 국가와 세계의 구원[平天下]를 부르대는 것조차가 잡음(雜音)일 수 있다. 나만이라도 고요한 자리에 안정하여 한알씩 훗날을 도모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 더 지혜롭고/현실적이며/정직하기도 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나의 악기, 한 권의 책, 한 잔의 차, 한 줄의 일기, 한때의 시간... 먼 훗날 그때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놀고 보고 먹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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