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성한 말 3
무릇 글을 쓴다는 건 나를 세상에 드러내 보이는 일이다.
내가 세상에 드러났는데도 이 아픈 세상에 아무런 효험이 없거나 되레 더 아프게 된다면, 민망하고 창피한 일이다. 일찍이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 선생도 자신이 지은 글을 전하면서 말한다.
“내 역시 이 글 전해 효험(效驗) 없이 되게 되면 네 신수 가련하고
이내 말 헛말 되면 그 역시 수치(羞恥)로다.”(용담유사, 교훈가)
이런 걱정을 덜어주는 방법이 바로 ‘덕분에를 잘 쓰는 것’이다. 덕분에를 써야 할 데 덕분에를 쓰는 것은 기본이고, 그래서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글을 더 잘 쓰는 길은 ‘덕분에를 중심에 두고 글을 쓰는 것’이다. ‘너 때문에 되는 일이 없어!’라고 쓸 자리에 ‘너 덕분에’라고 쓰기 시작하면, 그다음은 ‘이나마라도 해 낼 수 있었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너 덕분에 되는 일이 없어!’라는 말도 말은 된다. 웃자고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비꼬는 뜻이나 원망하는 마음이 ‘너 때문에 되는 일이 없어!’라고 말하는 것보다 배가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썼지만, 실제로 이렇게 하려면, 꽤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 ‘덕분’이라는 말에 호응할 마땅한 꺼리를 찾아내는 일이 만만찮은 일이다.
그러나 그 과정을 겪고 보면, 글은 어느새 좋아지고, 환해지고, 따뜻해져 있다.
그리고 적어도 그만큼은 이 세상도 좋아지고, 환해지고, 따뜻해진다.
이렇게 뒤집어 보기 시작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새로운 관점이 열리고,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좋은 글 쓰기의 묘약은 바로 ‘낯설게 보기 / 말하기’이다.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는 눈이야 말로 시인(詩人 = 글 쓰고 노래하는 사람)의 눈이다.
보통은 ‘때문에’든 ‘덕분에’든 주체가 되는 말의 상태나 역할, 그 의미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렇게 ‘덕분에’를 중심으로 주체가 되는 말을 뒤흔드는 데서 ‘좋은 글’이 만들어진다.
글이 좋아지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고, 그것들은 제각각이어서 정해진 규칙이 없다. ‘없다’는 말에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좋은 글을 쓰는 방법, 글을 잘 쓰는 방법을 묻는 질문에 “글을 잘 쓰는 방법은 있다. 그런데 이 세상 누구도 그것을 알지는 못한다”라는 말이 있다. 말하자면, ‘없는 것과 매한가지’라고 할 수 있다.
중심이 중심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게 당연하달 수도 있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그렇게 해서는 재미도 없고, 주목도 못 받고, 그러니 중심으로서의 존재감이나 가치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래서 이처럼,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것이야말로, 비법 없는 글쓰기의 길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비법 중의 하나라고 할 만하다.
더욱이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을 보여주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을 하고, 누구나 쓸 수 있는 표현을 하는 것으로는 좋은 글이 되기 어렵다. 당연히 때문에라고 쓰던 자리에 덕분에라고 써 놓고, 앞뒤의 문장을 바꾸어 나가다 보면, 글도 바뀌고, 나도 바뀌고, 어느덧 세상도 은혜롭게, 그래서 밝고 맑은 곳으로 바뀐다.
내 글이 이렇게 세상을 바꾼다면, 그 글은 좋은 글이게 마련이다.
설령 좋은 글이 아니면 어떠랴! 세상이 그 글 덕분에 밝아졌는데! (계속)
추신 : "개벽의 징후란"를 말한다는 것은 말의 신성함에 기대어 개벽 세상을 기약하고 기대하고 기도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