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의 철학, 동학 다시 읽기
(지난 호 요지 : 완전한 자아--覺, 知--는 내유신령과 외유기화, 즉 안팎이 전일적인 조화를 이룸으로써 성립된다)
이것을 더욱 간단하고 분명히 밝히기 위하여 우리는 한번 더 의식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의식계를 부인할 용기가 없다. 즉 인간으로서 인간의 의식을 제거하고 인간을 찾아낼 용기가 없다. 사람은 한편으로 자연계를 등에 지고 한편으로 의식계를 안고 있다. 의식이 외계의 환경을 지어 놓았다(=유심론; 편역자 주)든지 외계환경이 의식을 낳았다(=유물론; 편역자 주)든지 하는 논쟁에 상관할 필요는 없다.
아무리 의식이 외계의 환경에서 생겼다 할지라도 인간의 위대함은 의식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의식작용을 잃은 인간은 동물과 하등 구별이 없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마치 '불'이라는 것이 원래 원소로 된 것이 아니고 일종 물질의 연소적 화학적 작용(가소성 물질이 산소와 결합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사람이 한번 불을 발명해 가지고 생활에 이용한 이상 불은 어쨌든 원소이상으로 필요한 물건이 되었다. 가정생활은 물론 전기, 증기의 생활에 이르기 까지 불이 없다면 인간세계는 문득 멸망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유물론의 말을 십이분(十二分) 허락하여 의식이 물질의 소산이라 인정할지라도 이미 인간이 의식을 가지고 사는 이상은 인간의 모든 일은 의식에서 시작되고 의식에서 종결이 된다고 이르지 아니하지 못하겠다. 만일 우리에게 의식작용이 끊어졌다고 가정하라. 인간만사는 하나도 성립될 것이 없다. 멸망밖에 남을 것이 없다.
그런데 원래 의식계라 하면 그 '계(界)'라는 것이 심히 막연하고 혼돈한 말이다. 왜 그러냐 하면 사람이 아직 원류(猿類)로 있을 때에는 의식이 분명치 못하였고, 유아의 상태에서도 의식은 불명하였다. 그렇다고 거기에 의식이 없었느냐 하면 있었다고 할 수도 없고 없었다고 할 수도 없다. 말하자면 혼돈으로 있었다. 유아에게는 물론 의식이 없다. 그러나 유아의 본능과 그와 접속(接續)해 있는 환경에는 혼돈적으로 의식적 원질이 존재해 있었다. 혼돈적으로 존재하고 소질적(素質的)으로 존재해 있었다. 의식이 생길 만한 모든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유아가 크면 필경 생기지 아니치 못할 법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혼돈하고 무차별한 상태에서 어떻게 의식이 생겨 나왔을까? 이는 전혀 의지의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사람성 능동적 본능으로 솟아오는 의지가 그 직분을 맡은 것이다. 의지의 활동은 곧 욕동(欲動)을 말한다. 사람성 능동적 본능의 욕동을 일컫는 것이다. 사람 존재의 제일 근본 원인은 이 욕동으로 볼 수 있다. 사람은 본능적인 이 욕동을 채우기 위하여 노력해 나아가는 것이 제일원칙이다.
욕동으로서 발적(發跡)해서 주위 환경과 충돌하며 조절하며 섭취하는 작용에서 환경이 의식적 현상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욕동에서 의지가 생기고 의지에서 의식계가 생겼으므로 의식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원소가 있어 여러 갈래로 변화무상하여진다. 그러나 이 복잡한 원소를 통일해서 부단히 진행해 나아가는 것은 순전히 의지의 활동이다.
의식계 중에는 일정한 중심이 있으니 그 중심점이 가장 의식이 명료한 부분이 되어 나타나고 그 나머지의 의식은 대개 불분명하고 또는 몽롱한 대로 있게 되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볼 때에 학술상으로 여기에 시점과 시계(視界)를 구별하게 되는데, 시점은 우리의 시선이 직접으로 접촉해 있는 중심점이요 시계는 그 중심점에서 이루어진 일정한 환경의 범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시계가 일정한 범위를 가지고 나타날 때에 그 시점의 중심점은 가장 시계의 중추를 이루고 나머지, 시계는 그 중심에 어울려진 부분이며, 시계 이외의 부분은 전혀 우리의 시각에 관계가 없는 부분이다. 의식계도 또한 이와 같이 의식 중에는 가장 명료히 비치는 중심점이 있는데 이것을 일러 심리학상 통각(統覺)이라 한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