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철학 3
[편집실 주] ‘청년철학’ 마당을 개설한다. 이 마당은 ‘청년농부’나 ‘청년포럼’과 마찬가지로, 청년들의 소리를 “모시고 살리자”는 취지에서 마련되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이 있듯이,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생각과 언어가 필요하다. 이 마당을 통해 장차 한국사회를 짊어지고 나갈 젊은이들의 참신한 생각과 발랄한 언어가지속적으로 발굴되고 자유롭게 발신되기를 바란다.
*이 글은 2018년 2학기에 서강대 철학과 <한국철학사> 수업시간에 제출한 기말레포트를 수정한 것이다.
** 이 글은 <개벽신문> 82호(2019.2/3합병)에 게재되었다.
현대 사회는 우리만의 개성, 사상, 철학을 갖는 것을 중시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우리만의 아이덴티티를 찾으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사회적인 역할과 의무를 강조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신적 뿌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무어라고 답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한국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오갔지만 솔직히 말하면 모방에 급급했던 측면이 많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다.
우리의 뿌리는 서양의 모방에서 찾아질 수 없다. 서양철학의 관심사는 존재와 인식과 관련된 문제이며 ‘신’이 매우 중시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전체성’이다. 이것이 뿌리가 되어 서양사상을 지배한 것이다. 그렇다면 동아시아는 어떤가? 동아시아에서 사상사적으로 큰 역할을 한 것은 유학이다. 그렇지만 중국과 일본과 한국에서 모두 같은 유학이 전개된 것은 아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개념이 ‘하늘’[天]이다.
중국의 하늘은 인간의 길흉화복을 결정하는 세계의 원리를 나타냈다. 중국인들이 생각하기에 하늘은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질서, 즉 천도(天道)를 의미한다. 반면에 한국의 ‘하늘’은 ‘질서화되지 않는 하늘’이다. 한국의 하늘은 ‘리’와 같은 것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천국이나 지옥과 같은 하늘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한국의 하늘은 ‘모신다’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이 하늘은 생명력이 있으면서 평화를 추구한다. 조선성리학에서 ‘외경’이 강조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한국의 하늘은 서양의 이성(reason)이나 중국의 도(道)와는 다른 차원의 생명평화의 영성을 상징한다. 일본의 경우에는 근대에 들어 ‘하늘’이 사어화되었지만 한국에서는 더욱 강화되었다. 하늘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인들을 묶어주는 사상의 뿌리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인은 한국만의 사상적 아이덴티티를 가진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을 통해서 한국인의 생명평화사상을 드러내고자 한다. 우리는 그동안 서양의 시각에서 해석되고 근대화되었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제라도 숨겨져 있던 한국사상의 아이덴티티를 구체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이 아이덴티티를 드러내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수양학이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에 대해 말하고 표현하는 것을 좋아한다. 오구라 기조 교수는 한국인에게는 “님으로 상승하고 싶은 동경”이 있고, 이 동경이 좌절됐을 때 한국인들은 ‘한’이 맺힌다고 하였다.1 한국인에게 ‘한’의 감정은 역사적, 정치적 소산으로 내려왔다. 시인 고은은 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인에게 한은 유전이다. 우리에게 변질될 수 없는 민족 심상의 체질이다.”2 한을 품은 한국인에게 하늘은 가장 넓은 품이며 동경의 대상이었다. 한은 지향성을 가지고 있으며 역동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또한 한국인은 자신의 억울함이나 도덕성을 드러내는 의견을 말하기를 좋아한다. 이러한 특징은 오늘날 활발한 포털사이트의 댓글창과 적극적인 국민청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을 품은 한국인은 민중이 주체가 된 생명운동인 동학운동을 일으켰다. 동학은 단지 정치적인 난이 아니다. 동학은 수양을 동반하는 학문이다. 동학의 슬로건 “사람이 하늘이다”에서 볼 수 있듯이, 개개인에게 ‘주체성’이라는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러한 가르침은 <<동경대전>> <불연기연>에 다음과 같이 집약되어 있다.
노래에 이르기를 ‘먼 옛날부터 모든 만물은 제각기 이룸이 있고 형상이 있도다’라고 했다. 얼핏 본 대로 말하면 그렇고 그럴듯하지만 어디로부터 유래했는가를 깊이 헤아려본다면 멀고도 멀뿐 아니라 또한 아득한 옛일이어서 헤아리기 어려운 말이다. 내가 나를 생각해 보면 부모가 여기 계시고 후세를 가늠해 보면 자손이 거기에 있다. 다가오는 세상을 견주어보니 그 이치가 내가 나를 생각하는 이치와 다름이 없으나 지나간 세상에서 찾으려 하니 사람이 어떻게 해서 사람이 되었는가를 분간해 알기가 어렵다.3
경험적으로 확인가능한 것은 ‘기연’이고 선험적 형이상학의 세계는 ‘불연’인데, 모든 생명의 존재성은 불연이 기연이요 기연이 불연이다. 이것은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신비성을 말해주고 있다. 이처럼 동학은 우리 민중의 생명사상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서세동점의 시대에 한국인들은 자신의 생각을 창조하고 ‘개벽학’4을 시작한 것이다. 한국적인 ‘리’를 민중의 손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생명’을 바라보는 동양과 서양의 시각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서양의 생명은 인간이 어떻게 생명을 바라보는가라고 하는 인간의 관점이 강조된다. 또한 생명은 인간의 정복 대상으로 묘사된다. 아울러 계량화의 대상으로 여겨지므로 유용성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다. 반면 동양에서는 수양을 통해서 생명력을 얻는다.
우리는 서구의 존재론에서 폭력성을 읽어낼 수 있다. 레비나스는 유대인으로써 2차 세계대전을 겪는다. 그리고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가족을 모두 잃게 된다.
레비나스는 그리스도교의 복음에 감화되었던 서양이 어떻게 이렇게 극단적인 살육을 자행하게 되었는지 물음을 던진다. 1961년에 레비나스는 대표작인 <<전체성과 무한>>에서 서양의 존재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철학적 사유에서 존재는 전쟁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증명한다. 전쟁은 존재를 가장 명백한 사실로써 꾸밀 뿐 아니라, 실재하는 것에 대한 명백성 자체나 진리로 꾸민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헤라클레이토스의 어려운 단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전쟁은 누구도 그로부터 거리를 유지할 수 없는 질서를 세운다. 그렇게 질서가 세워졌을 때부터 외재적인 것은 없다. 전쟁은 외재성과 타자로서의 타자를 드러내지 못한다. 전쟁은 동일성을 부순다. 전쟁 가운데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존재의 모습은 전체성의 개념 속에 고정되는데, 전체성의 개념이 서양철학을 지배한다. 개별자들은 여기서 그들 자신에게 명령하는 힘들의 하인들로 파악된다. 개별자들에 의미는 전체성으로부터 유래한다.
이에 의하면 서양존재론은 전쟁의 존재론이다. 그 이유는 개별자들은 미지의 힘의 하인들로 환원되고, 개별자의 의미는 전체성으로부터 유래하기 때문이다. 서양의 존재론은 개별자의 개별성을 와해시키는 익명적인 전체의 질서가 상위에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질서는 서양 고대로부터 탐구해왔던 ‘아르케’(arche)라고 일컬어진다. 그리스철학의 최초의 질문은 “만물의 원천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이 원천은 ‘원리’(principle)를 의미한다. 그리스인은 원리의 질서를 ‘근원’이라고 부르고, 모든 개별자들은 근원적 질서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해왔다.
아르케는 예외없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원리라는 점에서 전체성을 지배하는 법칙, 혹은 전체성 자체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의 이런 전체주의적 사상은 전쟁을 촉발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개별자를 개별자로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질서 속에서 사유하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에서 그 원리로 나타난 것이 ‘폴레모스’(투쟁) 전쟁이다. 폴레모스는 아르케의 전쟁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은 하이데거가 존재에 대한 성찰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시로 헤라클레이토스를 다루었다는 점으로부터도 알 수 있다. 하이데거 의하면, 폴레모스(투쟁)는 다른 것에 앞서 신적이고, 신적 다스림을 위한 투쟁을 말한다. 또한 헤라클레이토스에 의해서 사색적 투쟁은 있는 것들을 최초로 구분짓고, 그것들의 위치, 신분, 그 자리에 있음에 맞춘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는 폴레모스는 왕은 왕으로 출현하게 하고, 노예는 노예로 출현하는 원리로 원리적 차원의 신적인 다스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통해서 존재하는 것들이 서로 구분되고 갈라진 틈, 간격, 연결을 가지고 나타난다. 그래서 존재자들을 지배하는 상위의 원리이다.
존재함이 존재자들을 지배하는 근본자적인 원리인데, 이것은 우리에게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고 은폐된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존재함의 의미에 대해 답할 수 없다. 나는 존재자이므로 존재함을 통해서 출현하는 것이며, 그렇다면 나의 존재자임을 규정하는 것은 존재함이다. 존재함의 의미는 나에게 은폐된 채로 있는 것이다. 내가 왜 존재하는지 모른다는 사실에서 우리 스스로 존재함이 우리를 지배하는 원리가 무엇인지 은폐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서양의 철학사는 ‘진리찾기’ 문제에 골몰하였다. 그 결과 생명성과 같은 영성보다는 그들이 규정한 ‘이성’ 찾기에 몰두했다. 따라서 영성과 도덕을 강조하는 한국철학에 서양철학을 적용하기에는 처음부터 무리가 있다.
서구의 철학은 생명성보다는 전체성을 내포하며, 생명은 주체에 종속되는 대상으로만 출현한다. 곧 자연과 생명을 포함한 모든 외재적 대상은 타자가 되고, 타자는 언제나 현재하는 의식의 현전에, 의식의 시간화에 귀속되는 한에서만 출현할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함의를 지닌 표상활동을 통해 비로소 근대적 주체성은 탄생하게 된다. 그것은 존재자를 주체 앞에 불러 세워 수리적으로 계산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서양에서 ‘강(江)’의 의미는 정복의 대상일 뿐이다. 횔덜린의 시에 나오는 예술작품으로서의 라임강은 이제 수력발전소에 공급되는 수량으로 계산해낼 수 있는 원료로서만 존재한다. 이러한 일을 해낼 수 있는 주체의 심층을 들여다보면 표상은 차이를 동일성에 종속시키는 활동, 더 정확히는 차이를 동일성에 귀속시키는 활동이다.
반면에 한국철학은 생명성을 내포하고 있다. 퇴계선생은 우물이나 나무에도 이름을 짓고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퇴계의 우주적인 질서를 향한 이상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때 생명의 삶이라는 것은 유용성이나 도구적인 가치로 환원되는 외재적인 타자가 아닌 생명을 가지고 모두 귀중히 여겨할 대상으로 출현한다. 이런 생명사상은 동학에서 절정을 이루고 장일순을 통해 부활된다. 장일순이 특히 주목한 것은 최시형의 ‘ 밥사상’이다.
사람은 하늘을 떠나지 않고 하늘은 사람을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이 한 번 호흡하고 한번 활동하고 한번 입고 먹는 것은 모두 사람과 함께 하는 메커니즘이다. 사람은 사람에 의존하고 사람은 (그 하늘이 생성한) 먹거리에 의해 의존한다. 만사를 아는 것은 밥 한 그릇을 먹는 (이치를 아는) 것이다. 사람은 먹거리에 의존하여 자신의 생장의 바탕으로 삼고, 하늘은 사람에 의존하여 자신의 조화를 드러낸다.
사람이 호흡하고, 활동하고 움직이고 입고 먹는 이 모든 것은 하늘님의 조화의 힘이니, 하늘과 사람이 서로 함께 하는 메커니즘은 잠시도 벗어날 수 없다.5
한국말에 ‘밥심’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밥에 대한 한국인의 애정은 강하다. 밥을 통해서 우리는 하늘의 도움과 인간의 노동이 합쳐져서 비로소 생활의 영위가 가능해진다. 이로부터 인간의 수동성에서 벗어나서 하늘과 조화를 이루는 생명성을 볼 수 있다. 최시형은 만물 중에서 하늘님을 모시고 있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우주적인 참여와 우주적인 생명력을 읽어낼 수 있다.
서구의 자아는 자기의식과 실체에 집중한다. 코기토를 통해서 ‘나는 존재한다’라는 존재성을 강조한다. 서양 근대가 자기의식의 자유와 이성의 자발성에 집중한다면, 동학에 나타난 한국인의 근대적 자아관은 공공성과 생명성에 집중하고 있다. ‘나’는 ‘타인’과 따로 존재하지도 않고, 우주의 모든 존재와 상호작용하는 공공성을 띤 존재이다.
우리는 ‘근대’라고 하면 이성을 떠올리고 생산성을 연상한다. 반면에 ‘영성’이라고 하면 신비주의나 반이성적인 것을 떠올리기 쉽다. 그리고 근대화를 논할 때 많은 사람들이 서구를 중심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더 이상 서구 근대를 가지고 ‘헬조선’이라 불리는 인간소외, 환경파괴, 빈부격차 등의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다시 한국학에 집중해야 한다. 한국인의 비워내는 아이덴티티에 집중해야 한다. 하늘이 만물을 길러낼 수 있는 것은 자기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가 없다는 것은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 사람의 모습은 텅 빈 그릇이나 거울과 같다. 그릇은 자기를 비워서 상대를 포용하고, 거울은 텅 빈 상태에서 상대를 있는 그대로 비추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릇에 자기가 들어 있다면 배제되는 상대가 있게 마련이고, 거울에 자기가 묻어 있다면 자기 의도대로 상대가 비춰질 것이다.6
레비나스도 자기정립에 있어서 자기가 있기 전에는 ‘익명적 있음’만이 있다고 했다. 주체성의 성립은 사물과 거리두기의 능력에서 생긴다고 하였다. 즉 거리두기의 능력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우리도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거리두기 능력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거리두기를 하지 못하면 종속되어 ‘나는 나다’라는 주체성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밥 한 그릇처럼 가깝고도 먼 것은 없다. 한민족에게, 아니 전 인류에게 밥 한 그릇처럼 숱한 희비가 얽힌 것도 없으며, 밥 한 그릇의 그늘처럼 숱한 거짓말을 감추고 있는 것도 없다. 놀부에게 밥 한 그릇은 너무 흔해 빠졌다는 뜻에서 가깝다. 그와 같은 뜻에서 배고픈 흥부에겐 밥 한 그릇이 너무 멀다. 그러나 밥 한 그릇의 고마움을 안다는 뜻에서 본다면 놀부는 밥 한 그릇의 고마움을 안다는 뜻에서 본다면 놀부는 밥 한 그릇에 대하여 멀며, 흥부는 가깝다. 놀부는 밥 속에 틀어박혀 살면서도 밥의 뜻을 모르지만, 흥부는 밥과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밥의 뜻을 안다.7
윤노빈은 밥 한 그릇의 소중함을 말하면서 인류는 우주의 큰 태 속에서 함께 키워지며 자라난다고 했다. 밥 한 그릇 속에는 우주의 비밀뿐 아니라 암호가 담겨 있다고 했다. 인간이 한울님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밥 한 그릇을 먹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밥 한 그릇을 마주하면서 하늘과 땅의 자연적 창조의 감소함과 농부들에게 감사함을 느끼는 것이다. 우주적 질서를 생각하며 조상을 생각하는 것은 밥 한 그릇을 마주함에서 발견할 수 있다. 윤노빈은 밥 한 그릇에서도 생명력과 우주적인 질서를 보았던 것이다. 이런 생각은 오늘
날 많은 한국인에게 공감을 이끌어 내는 부분이다.
동학의 ‘개벽’은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수동적 구원이 아니라 자신과 타인의 하늘을 알고 ‘자기 수양’으로 세 세상을 연다는 능동성을 나타낸다. 서양에서도 소크라테스는 영혼을 닦으라고 하였다. 하지만 여기에도 ‘수양’에 관한 언급은 없다. 오히려 강조하는 것은 기하학과 수학과 같은 절대적인 진리라고 생각되는 학문들이었다. 서양의 덕(excellence)은 ‘탁월성’이라는 의미로, 영성이 아닌 이성에 기초하고 있다. 이후에 데리다와 같은 해체주의 철학자가 나와서 로고스와는 다른 초월적 시니피에를 탐구하지만, 여기에서도 수양학은 대두되지 않았다.
그동안 서양은 자신들의 기준에서 역사를 평가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발전과정에서는 동양의 발전과정은 소외되었으며 제시되지 않는다. 유럽의 선별된 기준 하에서만 평가될 뿐이다. 하지만 서양의 인식론에는 수양의 과정이 빠져 있다. 우리는 서양의 학문에 매몰되면서 수양학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동양에서만 수양학이 중시되었을까? 동양은 수양을 해서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수양을 하면 자신을 비우고 우주의 생명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수련과 같이 동일한 반복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비우는 과정이다. 물질적으로 우리는 향상되었지만 인간소외 같은 사회적인 문제는 부작용으로 나타난다. 바로 여기에 영성을 회복하여 몸과 마음의 조화를 이루는 수양학이 요청되는 이유가 있다. 한국인에게 수양의 준거는 하늘이다. 동학에서 인격적인 하늘을 요청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한국인들은 하늘을 인격화시켜 ‘모심’으로 받아들인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이러한 ‘모심의 영성’이 요청되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서양을 기준으로 근대화를 평가하고, 한국 근대의 비주체성에 많은 좌절을 했다. 그러나 서양 근대철학은 그 안에 필연적으로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다. 서양의 근대적 주체는 자기 제국의 식민지로 만들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주체의 표상 밖의 낯선 땅에는 한 줌의 흙도 남아나지 않는 방식이다. 서양은 이런 방식으로 근대화를 이끌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서구적 방식이 아니라 우리식의 근대화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할 때이다. 한국 근대는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주체성을 찾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한국인들은 만물을 하늘처럼 모시고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최근의 촛불혁명에서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들의 의견을 표현하였다. 평화운동으로 일궈냈다는 점에서 전 세계는 한국에 주목하였다.
우리는 ‘하늘’이라는 오래되고도 새로운 눈으로 ‘작(作)’을 해야 하는 시대에 와 있다. 수운 선생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수양하여 스스로 변화하는 ‘자기 개벽’을 말하였다. 수양학은 자신의 성찰이다. 자기성찰을 통해서 자기 인식이 가능해진다. 또한 하늘의 생명사상과 평화사상은 이상주의를 표방하는 한국인들에게 많은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다. 우리는 이제 근대성을 재성찰하고 새로운 하늘과 함께 하는 ‘작’의 시대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다시 개벽’이다.
1 오구라 기조 저, 조성환 역,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모시는사람들, 2017.
2 고은, <한의 극복을 위하여>, <<한국사회연구>>, 한길사, 1984.
3 박맹수 옮김, <<동경대전>>, 지식을 만드는 지식.
4 ‘개벽학’ 개념은 강성원이 처음 제시하였다. 강성원,〈 〉,『 』; 조성환, <청년과 개벽>, <<개벽신문>> 80호, 2018년 12월.
5 <<해월신사법설>><천지부모>; 조성환, <<한국 근대의 탄생>>, 모시는사람들, 2018 참조.
6 조성환, <생각하는 노년, 수양하는 사회>, <<동양일보>>, 2018년 9월 12일.
7 윤노빈, <<신생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