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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r 09. 2019

천(天)으로 본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철학

-청년철학 1

이 지 연 | 서강대학교 철학과 4학년


[편집실 주] ‘청년철학’ 마당을 개설한다. 이 마당은 ‘청년농부’나 ‘청년포럼’과 마찬가지로, 청년들의 소리를 “모시고 살리자”는 취지에서 마련되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이 있듯이,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생각과 언어가 필요하다. 이 마당을 통해 장차 한국사회를 짊어지고 나갈 젊은이들의 참신한 생각과 발랄한 언어가지속적으로 발굴되고 자유롭게 발신되기를 바란다.

* 이 글은 2018년 가을학기에 서강대학교 철학과에 개설된 <한국철학사> 수업에 제출한 기말보고서이다. 

**이 글은 <개벽신문> 80호(2018.12)에 게재되었다.



1. 서 론


라틴아메리카는 ‘신세계’라고 불렸을 때부터 천(天)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중세를 거치는 동안 구대륙이 타락한 세계이자 죄악으로 물든 절망적 공간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신대륙은 순수성이 살아있는 ‘신천지’이자 ‘희망의 땅’으로 명명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라틴아메리카는 1492년 발견 이전부터 ‘새롭게 열린 하늘’이었다.


라틴아메리카의 역사 속에서 천(天)적인 요소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투팍 아마루의 잉카제국 재건 시도, 해방을 위한 시몬 볼리바르와 산마르틴의 독립운동, 멕시코 혁명에서의 사파티스타 출현 등은 모두 새로운 세상 건설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그 실현을 위해 투신한 대안사회 건설을 위한 투쟁이었다. 현재까지도 라틴아메리카에서 대안사회 만들기는 과거의 일이 아닌 현재진행중이다.


이 글은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성찰하고 그것을 극복해 보려는 노력 속에서 등장한 해방철학에 나타난 천(天)의 요소를 파악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천(天)을 현대적으로 정의하고, 그 현대적인 천(天)의 관점에서 해방철학의 대표적인 개념인 ‘트랜스모더니티’(Trans-modernity)를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트랜스모더니티의 구현 속에서 나타나는 천(天)이 현재의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변혁하려는 의지로 드러나고 있음을 확인할 것이다.


2. 본 론


2-1. 천(天)의 의미


‘천天’이라는 글자는 “사람[大]의 머리 위[一]”를 의미한다. 천 관념은 주재적·절대적인의미와 자연적인 의미로 혼동되어 쓰여 왔으나, 주로 주재적·절대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주나라의 건국이 천명天命에 의한 것이었다고 정당화하는 등, 천은 절대적 권위를 지닌 존재로서, 단순한 종교적인 숭배의 대상에서 벗어나 정치적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이렇게 정치적 차원으로 확대되어 나온 것이 바로 ‘천명사상’이다. 천명은 천이 의지로 표현되어 인간의 행위를 판단하는 근거로 작용하였음을 의미한다.


유학에서는 천을 절대적인 숭배자보다는 인격적인 모습을 지닌 도덕적 존재로 파악하였다. 즉 천이 인간세계에 통치자의 권위만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 개개인에게 도덕성을 부여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천 중심의 세계관으로부터 인간 중심의 세계관으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맹자는 천이 인간 존재의 근원으로, 인간들은 성性을 매개로 서로 통한다고 보았다. 천으로부터 부여받은 본성의 자연스러움을 그대로 따르면 각 개인이 생활하는 데에 마땅히 실천해야 할 기준이 되며, 그것이 바로 도(道)라는 것이다. 주자는 “성이 곧 리”(性卽理)라는 입장에서, 잘못되기 쉬운 인간의 욕구와 구별하여 인간 본래의 도덕적 성을 나타내기 위해 ‘ 천리天理’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토착성을 띤 한국의 ‘천’ 개념은 자연적이자 신(神)적이자 도덕적으로 해석되었으며 보다 더 보편적인 관점에서 사용되었다. 이러한 천의 세계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일례로 “모두가 하늘이다”는 평등적 세계관을 담은 동학사상은 아직까지도 그 맥이 이어지고 있고, 신동엽의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에서처럼 현대 문학에서도 한국인의 ‘하늘’을 확인할 수 있다.1


이러한 천의 의미를 현대적인 관점에서 다시 해석해 보면, 좁은 의미로는 사변적 지식 및 사회적 실천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더 나은 사회와 존재, 삶에 대한 상상과 희망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천은 목표이면서 동시에 더 나은 존재와 삶의 양식을 추구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특히 인종적, 지역적, 성적 다양성을 인정하고자 하는 현대 사회에서 천은 상호문화성 뿐만 아니라, 정치 혹은 경제 구조나 문화 영역을 변혁시키려는 포괄적 기획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 글에서 사용하는 천 개념은 “새롭게 열린 세계” 즉, “실현 가능한 대안 세계를 건설하려는 의지”에 가깝다. 이는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현재’와는 질적으로 다른 ‘대안 세계’를 건설하려는 의지를 조직화하고 실천을 유도하는 구상을 의미한다. 새로운 세상은 단순히 과학적 이론과 설명만으로는 이룩할 수 없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에 상상력과 희망이 현실과 결합할 때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아간다. 오늘날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 변혁을 천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천은 역사를 추동하면서도 현실에 저항하고 사회를 변혁시키 려는 의지를 함축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철학 역시 이러한 천의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2-2. 해방철학의 등장 - 근대성/식민성 비판


새로운 혁명 개념은 1960년대 말에 서구 근대성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서구 근대성의 본산인 유럽에서는 탈근대적 비판이 일어났고, 서구 바깥에서는 라나지트 구하를 중심으로 포스트식민주의운동이 태동했으며,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엔리케 두셀을 중심으로 해방철학이 등장하였다. 해방철학은 쿠바혁명 성공 이후에 라틴아메리카를 휩쓸던 해방과 탈식민적 성격을 지닌 사회변혁 운동의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되었다. 철학적 담론이 출현 배경이었다기보다는 실천에 투신한 사람들의 구체적 요구들을 성찰하면서 그것들을 이론화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등장했다.


해방철학은 멕시코 철학자들 사이에 유행하던 라틴아메리카의 고유한 철학에 대한 탐구와 관련이 있다. 이들은 라틴아메리카 역사를 철학적으로 사유하면서 사상사를 구축하려고 시도했다. 이런 논의는 결국 레오폴도 세아와 페루의 살라사르 본디의 “라틴아메리카 고유철학의 존재 여부에 대한 논쟁”으로 발전했다. 이런 논의가 자연스럽게 확산되면서 해방철학의 부상을 촉진시켰다. 또한 아르헨티나 철학자들이 해방 그리스도교 운동을 성찰하기 시작했다. 해방신학의 핵심 주제와 신학 방법론이 철학적 개념과 철학 방법론으로 대치되면서 해방철학의 탄생에 토대를 제공했다.


이와 같이 해방철학의 기원과 경향을 보면 라틴아메리카 현실을 철학적으로 사유해 보려는 이 지역 철학자들의 시도와 관련이 있다. 수입된 외국의 사상과 방법론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역사와 역동적 현실을 진단하고 자신들의 시각에서 그것을 개념화하려고 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난과 종속 상태에 있는 제3세계 주변부 대륙, 제국주의 지배하에 놓인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분석했다. 따라서 트랜스모던(Transmodern)적 기획, 즉 “근대성에 내재된 합리적 해방의 특성을 실재적으로 포섭함”과 동시에 “근대성이 저질렀던 신화적 특성을 부정함으로써 은폐되었던 타자성을 포용하는 것”이야말로 해방철학의 핵심 내용이다.


라틴아메리카의 발견·정복으로 시작된 근대·식민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근대성 신화의 토대이자 동시에 전지구적인 중심-주변 구도의 출발이었다. 현재 진행 중인 세계화가 근대·식민 자본주의의 정점이라는 점에서 볼 때, 식민주의가 종식된 이후에도 ‘권력의 식민성’은 여전히 견고하게 지속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 해방철학이 단지 라틴아메리카사상의 한 가지 양상에 국한되지 않는 것은 근대적 이성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자 동시에 근대·식민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착취 구조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방철학 선언문>(1973)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실려 있다: 


해방철학은 ‘에고(ego)’로부터, ‘나는 정복한다.’ ‘나는 생각한다.’ 혹은 ‘권력의지로서의 나’로부터 사유하지 않는다. … 해방철학은 억압받은 사람의 입장에서, 주변화된 사람의 처지에서, 가난한 사람의 관점에서, 종속국가의 위치에서 사유한다. … 해방철학은 타자의 외부성으로부터 사유하고자 한다.” 


이처럼 해방철학은 객관적이고 탈정치적 입장에 머물지 않고, 체제의 희생자, 가부장주의에 억압받는 여성, 황폐화된 지구를 상속받을 미래세대 등, 가능한 모든 부류의 타자성을 위해 투쟁할 책임을 갖는 것이라고 보았다.


2-3. 천(天)과 트랜스모더니티(Trans-modernity)


트랜스모더니티 개념은 타자와 외부성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외부, 즉 타자가 존재하기에 배제와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서 인정을 위한 투쟁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근대 주체에 의해 억압받고 지배당하고 배제된 것이 타자이다. 근대 주체가 권력을 확장하면서 타자는 희생자로 전락했다. 근본적으로 트랜스모더니티는 근대성과는 다른 장소와 경험의 바탕에서 출발하기에 근대성이 기획한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지향한다. 이를 위해서는 주변부 문화 스스로 자기 문화의 고유성을 회복하고, 정체성 탐구와 문화의 갱신을 계속할 수 있어야만 한다. 고유한 것이 없다면 대화의 필요성이 사라질 뿐 아니라 소통도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상호문화성은 문화 간 상호작용과 역동성, 그리고 평등성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진정한 대화는 비대칭적 관계가 아닌 대칭적, 수평적 관계를 전제한다. 올바른 이해와 소통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 다른 대상, 다른 지식, 다른 가치, 다른 전통, 다른 논리, 다른 합리성에 대한 계속적인 상호 배움이 필요한 것처럼 문화 간에도 이런 과정이 필요하다. 상호문화적 대화 과정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지배문화와 하위문화 사이에 존재하는 헤게모니적 관계가 수정될 수 있는 가능성이 증가한다. 사회 내, 혹은 국가 내의 모든 문화와 인종, 그룹들이 존중받고 그

존재가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때에 공존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천의 보편성은 제국적이고 독백적인 ‘유럽 중심의’ 유일한 보편성이 아니라 그것과는 다른 ‘이(異) 보편들의 보편’으로서 존재한다. 즉 다양한 보편성들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은 ‘우리’ 모두가 평등하기 때문에 서로 다를 수 있는 권리를 갖는 것을 전제로 한다. 트랜스모더니티의 기본 전제는 천의 보편성과 같은 맥락에 있다. 극이 소멸된 다원성이자 탈유럽중심화를 전제하는 것이다. 이때 상호문화성은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논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천을 위해서 서로 다른 논리가 상호에게 도움이 되는 대화를 나누는 것을 뜻한다.


천의 세계관에서는 서구의 우주론과 라틴아메리카 원주민의 우주론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우주론이 작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트랜스모더니티에서 상호문화성의 증진이 중요한 것은 이 개념들이 단지 다른 문화들 사이의 대화를 강조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 개념은 아직까지도 라틴아메리카에 남아있는 배제적·패권적·식민적 삶의 양태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측면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타자와 희생자의 관점에서, 공생과 공동체를 지향하고 모든 인간이 존중되는 것이야말로 이들이 꿈꾸는 대안사회인 것이다. 천의 세계관에서는 다원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문화적 동질화나 포섭에 저항하도록 한다. 다시 말해, 같은 하늘 아래 평등한 인간은 “다르지만 동등한 존재”로서의 권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불평등의 뿌리인 식민성을 극복하고자 한다.


3. 결 론


천은 더 나은 존재와 삶의 양식을 향한 희망의 표현으로서 대안사회 제도에 대한 억압과 소외를 넘어선 상태까지를 포괄한다. 좁은 의미에서의 천은 좋은 사회에 대한 사변적 지식 및 공동체적 실천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더 나은 사회와 존재, 삶에 대한 상상과 희망을 포함한다. 해방철학의 트랜스모더니티 개념은 라틴아메리카와는 다른 세계를 희망하고 그것을 위한 대안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천(天)적이다. ‘새롭게 열린 하늘‘은 꿈꾸는 이상사회이자 더 나은 존재양식과 삶의 방식을 향한 희망의 표현이다. 따라서 천은 목표이면서 동시에 더 나은 존재와 삶의 양식을 추구하는 과정을 포괄하고 있다.


트랜스모더니티는 근대성으로부터 부정되고 배제된 문화들을 근대성 ‘외부로부터’ 긍정한다. 유럽중심적 보편성의 척도가 사라진 상태에서 모든 주변부 인종, 문화 등의 가치가 복권되고 은폐된 타자가 회복된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해방’된다. 즉 해방은 유럽중심적 근대성을 극복하는 것이자 식민성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때 트랜스모더니티는 근대성 저 너머로부터 도래하는 새 세계, 즉 ‘새로운 하늘’을 그리고 있다. 이는 정치, 경제, 문화 영역 전체를 변혁하려는 의지를 포괄한다. 현재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의 움직임은 배제된 원주민을 진정한 권리를 가진 국민으로 포함시키고자 한다. 억압된 문화를 회복시키고 다민족성과 상호문화성을 결합하여 원주민과 같은 하위주체와 타자들을 진정한 주체로 전환시키려는 시도는 매우 천(天)적이라 할 수 있다.


천을 통해 인간은 완벽한 사회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수정과 보완의 과정을 거치며 끊임없이 변혁해 나간다. 이런 의미에서 천은 변혁을 이끄는 안내자인 동시에 동력 그 자체이다. 트랜스모더니티는 현실을 비판하고 타자, 희생자, 하위주체들이 집단적으로 희망하는 세계를 그려줌으로써 라틴아메리카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 대륙의 현실은 불평등, 저발전, 가난, 부패, 불의, 비민주, 식민이라는 단어들로 표현되듯이 매우 부정적이다. 이런 현실을 극복하고 변혁하려는 열망은 천의 역동성, 염원성, 창조성과 그 성격을 같이 한다. 현재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 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하늘’의 출발점인 것이다.


[참고문헌]

엔리케 두셀(2011),  <<1492년, 타자의 은폐, 근대성 신화의 기원을 찾아서>>, 박병규 옮김, 그린비

김은중(2011),  <권력의 식민성과 탈식민지성: 유럽중심주의와 제3세계주의를 넘어서>,  <<이베로아메리카

연구>> Vol. 22, No. 2.

김윤경(2010), <1980~1900년대 에콰도르 원주민 운동: CONAIE의 상호문화성과 복수국민>, <<서양사론>> Vol. 10, No. 107.

조영현(2009), 「중남미 해방신학: 구스따보 구띠에레스의 신학을 중심으로」, 『이베로아메리카연구』 Vol.

20, No. 1.

강성호(2008), 「유럽중심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 라틴아메리카 ‘근대성, 식민성 연구그룹’의 탈식민 전략」, 『역사비평』 Vol. 84(가을).


주석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누가 구름 한 송이 없는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 // 닦아라, 사람들아네 마음속 구름 /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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