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을에서 나고 자란 개벽 유전자
- [이 글은 <개벽신문> 82호(2019.2/3합병)에 게재되었습니다]
전주 한옥마을 왕의 뜰 경기전에는 와룡매가 피고, 마을민들의 골목 동문길, 저문 하늘에는 막걸리 냄새가 퍼졌다. 왕의 뜰과 골목길의 경계에서 봄이 오고 있다. 해토머리 섬진강을 거슬러 마을과 마을을 지나고 들과 산을 넘어 온 봄은 개벽 바람꽃을 타고 오고 있다. 이병한, 조성환, 박길수 등이 근대 자본 개화세를 지나 개벽세를 피우고자 한다.
필자가 사는 전주 한옥마을과 인근 도로명이 감영로, 동문길, 태조로, 은행로, 충경로이다. 길들은 왕으로만 통하고 있었다. 개벽세가 이 길로 오겠는가?
마을민들에게로 가는 "전봉준로", "김개남로(좁은 소로길에 있다)", "동학로", "입성로", "집강로" 등은 없다. 이 길들에서 동학혁명은 단지 추모의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왕조의 본향답다. 그러면 전주는 왕의 도시인가? 동학혁명에서 가져와 민의 도시라 하지 않았던가?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20대 청년 시절에 동경대전을 읽었다. 뭘 알아서 읽은 게 아니었다. 읽어야 될 것 같아서 그냥 읽었다. 그러다가 마르크스를 만나서 그만두었다. 치기로 읽어서 배운 것도 마음에 새겨진 것도 없다. 정읍이 고향이니까! 필자의 본적이 손화중 선생과 같은 정읍 음생골 지척이니까! 고등학교 주춧돌이 보천교 십일전궁에서 가져온 것이라 하니까. 보천교의 본산 입암산을 늘 보았다. 호남 삼신산의 하나라는 고부 두승산도 늘 보고 살았다. 살던 마을에서 들었던 여러 이야기들이 있다. 그 풍경을 한 토막 옮겨 본다.
정읍시 이평에서 배들평이라고 부르는 들 동쪽 정우면의 60년대 말~70년대 초였다. 외가 사랑방에서 어른들의 구라(?), 뻥(?)을 들었다. 배들평 서쪽은 전녹두 생가가 있는 조소리와 만석보가 있다.
“명숙 선생이(전봉준, 봉준은 암호명 내지는 군호라 한다.) 여기로 해서 원평 김덕명이나 칠보 최경선을 만나러 갔을 게야.”
“울 할아버지가 난(동학혁명)에 나가셨다던데.”
“울 할배는 전녹두 전령을 하셨다네.”
“야, 이눔아 뻥치지 마라. 언제는 호위무사를 하셨다더니”
뻥이었든 구라였든 상관없다. 그런 이야기가 술추렴의 호롱불 밑에서 전해졌다는 것이 중요하다.
신동엽문학관의 김형수 시인은 필자에게 말했다.
“큰 뻥이 사라진 세상은 얼마나 초라한가?”
그 큰 뻥이 어찌 ‘개벽’이 아니겠는가? 근대에 부합하고, 성장에 눌리고, 내면으로 숨고, 상품으로 기획되는 문학에 큰 뻥이 생겨야 한다는 말 아니겠는가?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개벽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전하는 이들이 비록 ‘개벽’이라는 말을 의식하지 않을지라도.
욕설에 이런 말이 있다.
“야이 천지개벽할 놈아.”
큰 구라를 튼다는 말이겠다. 뻥을 치게 놔둬야 한다. 상상력의 보물이다.
어릴 때 모래 놀이를 하며 불렀던 노래가 있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지금 생각하니 개벽하자는 말이다. 고장 나고 쓸모없게 된 근대를 개벽하자는 말로 바꿔도 좋겠다. 두꺼비는 독사의 뱃속에서 자란다지 않던가? 참으로 개벽 정신의 유전자가 끈질기다. 이것을 어찌 국민교육 학교에서 배우겠는가? 동무가 있었다. 동무들과 어울리는 것에서부터 개벽이다. 오늘의 마을에 동무가 있는가? 사람의 유대가 자라는 동무! 그 많던 동무들은 품을 팔러 어디로들 갔나?
70년대 중반이었나? 정읍에서 동학혁명기념제가 열렸다. 학생들이 일본군으로 꾸미고 행진하고, 동학군이 정읍에 입성하였다. 전투가 벌어졌다. 온 마을 사람들이 행사 주무대였던 농고 운동장에 가마솥을 걸었다. 국밥이 끓고, 어른들은 풍물을 치고 술을 마셨다. 북을 때리고, 장고를 치며, 징을 울리며 여기 사람이 온다. 개벽이 온다.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은 윗뜸, 아랫뜸 패가 갈려 싸움을 벌렸다. 말리지 않았다. 한풀이의 방식이고 이튿날이면 화햇술을 마실 테니까! 그것은 해원상생이었다. 온 정읍이 시끌벅적 왁자지껄했다.
이일로 행사 관계자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다던가? 관선군수는 목이 나고. 향아설위 제사로서의 동학혁명기념제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지금 황토현에서 하는 기념제는 동학혁명기념제가 아니다. 해원상생 개벽의 향아설위 제사가 아니다.
올해 5월 11일은 황토현 승전일을 동학혁명국가기념일로 제정한 첫날이다. 기념식이 해원상생 개벽의 향아설위 제사가 될까? 애국가 부르고 축사하고 공연하고 끝나는 기념식이 될까? 아마도 제사가 아닌 기념식이리라.
내 유년의 기억에 또렷하게 자리 잡은 일들이 개벽의 유전자였음을 깨달은 것은 50이 다 되어서였다. 정확히는 혁명에서 개벽으로 돌아온 것이다. 마을은 개벽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어릴 때의 마을에는 개벽이 있었다. 신동엽은 서사시 <금강>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그 가슴 두근거리는 큰 역사를
몸으로 겪은 사람들이 그땐
그 오포 부는 하늘 아래 더러 살고 있었단다.
앞마을 뒷동산 해만 뜨면
철없는 강아지처럼 뛰어다는 기억 속에
그래서 그분들은 이따금
이야기의 씨를 심어주고 싶었던 것이리.
그 이야기의 씨들은 떡잎이 솟고 가지가 갈라져
어느 가을 무성하게 꽃피리라.
시인의 말처럼 이제 개벽화가 무성하게 꽃필 것인가?
1860년 동학의 창시와 1894년 동학혁명은 중화제국에 속한 조선이 독립하는 깃발이었다. 동학이 위대하게 기억되어야 하는 것은 수탈에 맞선 민중혁명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리 좁게 볼 수 없다. 고려의 몽골제국과 조선의 중화제국으로부터의 새로운 천하의 길, 천년의 기획이었다. 고려와 조선을 거친 천년 동안의 회심의 기획이었다. 새로운 천하였다. 말 그대로 다시개벽의 시작이었다.
동학은 서구의 근대국민국가를 받아들인 일본과 다른 행보였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중화제국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했던 조선 사대부의 소중화주의나, 대청제국의 중화세계와도 달랐다. 동아시아에서 중화세계는 중국과는 다른 서로 별개의 것이다. 조선은 중국이 아니지만 중화제국의 일원이었다. 문화적 속국이니 정치적 속국이니 하는 것은 공맹을 중국에 한정하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유대의 속국이라 할 수는 없지 않는가? 동학은 유학의 조선인민화이기도 한 것이다. 서구와 다른 개벽천하의 시작이었다.
만세일계(萬世一系) 천황의 나라를 자처하는 사무라이의 국가 일본은 중화세계 밖에 있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서구의 근대 국민국가 이념을 받아들이고 수립했다. 일본의 대동아공영론은 서구 근대 국민국가의 동아시아적 침략이었다.
해방된 조선은 남과 북 모두 서구 근대화의 길을 따라갔다. 남은 미국 자본주의이고 하나는 서구적 소련 사회주의였다. 북이 주체사상으로 자기 길을 간다고는 하나 중소와 미일의 포위 속에서 나온 자구책이지 동아시아적 보편성을 가진 것이 아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정치민주화와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다고는 하나 속빈 강정에 불과하다. 오천년 역사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타고르가 동방의 등불이라 한 것은 동학의 사인여천(事人如天) 세계였다. 양반도 상놈도 카스트도 없는 세계, 오늘로 말하면 전태일도 이재용도 없는 대동(大同)세계이다. 흰 옷 입은 조선이 아니었다. 동학은 천하 보편성을 가진 위대한 기획이었다.
동학은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송여립 등등 훌륭한 몇 장군의 복기가 아니다. 천하대동의 얼굴로서 복원되어야 한다. 돈벌이 관광의 기획이어서는 좁다. 전라도의 동학이어서도 좁다. 동학은 전봉준과 전태일이 만나고 천하인을 만나는 21세기 새 천년의 기획이어야 한다. 전쟁과 폭력이 없으며 부자와 가난한 자도 남자와 여자도 없는 국가와 국민도 없고 개벽 자치민이 있는대동의 개벽세계여야 한다.
동학혁명 국가 기념 첫해이고 삼일혁명 백 주년이다. 개화세로부터 언제 독립하여 다시개벽의 바람꽃을 피워 개벽세로 갈 것인가? 유학의 향교와 서원이 동학의 ‘접’(接)으로 개벽했다. 사대부와 선비의 천하가 무지렁이 민중의 시천주(侍天主)로 개벽했다. 눈이 번쩍 뜨였다. 무릎을 치며 탄복했다. 베 짜는 아낙이, 코흘리개가, 천한 노비가 하늘이라니, 겸상에서 진지를 나누다니, 청상과부를 개가하라니, 부인을 공경하라니…. 공감하니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향교와 서원을 뛰어 넘었다. 접과 접이 ‘장소의 혼’으로 삼천리 곳곳으로 연결되었다. 천하대란의 시대였다. 동방의 공공재 천하, 사대와 사소로서 공존하던 천하체계를 일본이 대동아공영으로 바꿔치기 했다. 왕도가 아닌 패도였다.
개화당이 있었다. 동도서기(東道西器)가 아니었다. 동을 접고 서에 홀렸다. 조급했다. 동도로 서기를 접하지 않았다. 무능하고 게으른 개화당들이 일본의 접을 만들었다. 청과 공존한 조선처럼 일본과도 공존할 줄 알았다. 하니 무식하고 게으른 것이다. 오늘의 개화당은 미국의 접을 만들고 일본의 접을 지키고 있다.
유학을 진화시키지 못한 정체된 유인들이 천하무인 천하체계를 잊고 사리의 권력에 빠졌다. 위정척사였다. 위정이 조선을 사랑하고 약탈자 서학을 척사함이 그럴듯하나, 과연 고이면 썩으니, 동학을 위정하지 않고 척사했다.
시천주, 인내천! 상하와 남녀가 어찌 대등하지 않으리. 천하에 경계에 있으리오. 거기에 있음으로서 어울려 존재하는 것이다. 민족으로 나뉘고 민족으로 자결하고 자강하는 것이 아니다. 천하인으로 자결하고 자강하는 것이다. 다만 천하를 교란하는 반천하를 반하는 것이다. 가물치, 쏘가리, 붕어의 조선 하천 생태계에 침투한 포식자 블루길과 베스를 거부한 것이다. 천하를 잊고 권력에 탐닉한 모리배를 격퇴하려 한 것이다.
반외세 반봉건이 맞는 말이다. 허나 부족하다. 드러난 형세만을 보는 것이다. 천하를 민족으로서 근대국가로서 쪼개려 한 것이 아니다. 근대 민족국가의 자강과 자각의 투쟁이 아니다. 오래된 미래 천하 일가의 투쟁이다. 동학인들은 민족인이기 전에 천하인이다. 시천주에 어찌 피부색과 말의 다름, 남녀노소가 작동하겠는가. 모두가 천하인 것을. 패도로서 천하를 교란하는 천하교란자에 대응한 것이다. 일본 민족국가에 대응한 것이 저들과 같은 조선 민족국가였던 것인가. 포식자들의 헛-세계화로 사멸해가는 민족국가라면 저 동학의 혼은 그 수명이 159년도 못 된다는 것인가? 헛-세계화에 대응하는 진세계화로 오늘의 동학을 다시 새겨야 하는 까닭이다. 저 서구의 논리는 패도의 헛-세계로 자본의 십자군일 뿐이다. 민주 교조, 자유 교조, 사회 교조, 민족 교조에 맞서 다시 신동학을 호출하는 까닭이다.
우리나라의 근대는 천하대란 춘추전국시대였다. 개화, 위정척사, 동학, 서학이 대립하고 공진하지 못했다. 오늘의 민주파와 성장파는 개벽을 척사하고 자본을 위정한다. 서구로부터 이식된 근대 개화의 터전에서 개화파의 좌파는 사회주의와 민주파로 우파는 반공수구 자유주의로 분단되었다. 2개의 주권국가가 탄생하였으나 보국안민의 광복은 오지 않았다. 고금의 분단 속에서 천하체계의 민(民)이 하늘인 민본(民本)의 의(義)가 단독자 개인의 리(利)를 다투는 자유민주교조로 변질되고 있다.
천하공물(天下公物) 대동사회(大同社會)의 천하무외관(天下無外觀)은 자본독재와 인민독재에 시달린다. 천하공물, 천하는 너와 내 것이 아닌 모두의 것인데 어찌 국가로서 경계를 다투며, 상하와 빈자와 부자로서 나뉠 것인가. 천하무외, 천하의 안과 밖이 없는데 인간이 자연을 수탈하고 자본과 시장이 민을 침탈하는 것인가?
어찌 혁명의 법칙으로 민을 종속시켜 혁명의 속도전, 물질개벽만의 사회, 인민독재를 만든다는 것인가? 삶의 부침이 어찌 혁명의 과학으로 판단되는 것인가? 서학의 천주(天主)천하와, 동학의 시천주(侍天主) 천하가 같은 것일진대 어찌 동과 서과 공명하고 공진하지 못하겠는가? 다만 서학의 십자군교도들이 근대 백여 년을 전쟁과 침탈로 새겼을 따름이다. 민본 없는 욕망자 개인의 질서화인 민주교도들이 중심 없는 투표 기술인 민주로서 역사의 종언을 외친다. 자유교도들이 천하와 나를 대동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자유의지를 시장자유로 대체하여 역사의 종언을 노래한다. 당을 천명의 구현체로 하는 프롤레타리아독재 사회주의로 역사의 종언을 노래한다.
자유교도, 사회교도들에 대안은 없다. ‘다른 백년’은 없다. 자유교도의 대한 민국과 백두혈통 주체교도들이 통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고백해야 한다.
오로지 남은 것은 희미해지는 민족뿐이다. 서울과 평양이 정반합하여 진화해야 한다. 평양이 삼성시가 되는 것은 통일이 아니다. 정치와 권력의 분점 형식에 불과한 연방국가는 잠자는 내전이다. 하여 오래된 천하체계를 호출한다. 서구의 연방이란 것도 천하체계에서 다만 그 형식을 빌려간 것이다.
다른 백년의 기획이 필요하다. 민본 없는 민주의 허상을 경계한다. 천명을 거스르는 시장의 자유를 불용한다. 당이 천명의 소유자라는 인민독재를 불용한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삼일혁명 백 주년에 ‘다른 백년’을 생각한다. 전라도 한, 슬픈 애상이 아닌 개벽이 좌절된 다시 ‘개벽의 그리움’이 한이다. 정여립의 천하 공물과 그대가 나이고 하늘인 것의 인내천의 전봉준, 하여 전라도 전주, 장소의 혼으로서 개벽을 호출한다.
무릇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고, 잘 배우고 행하는 것이 개벽의 출발이다. 민주에 머물지 않고 민본의 천하를 추구하는 것이 개벽이다. 민심이 천심이고 민심이 있는 곳이 천하이다. 그 민심의 천하 실체를 찾고자 한다. 아직은 안개이다. 하지만 서로 모여 놀고, 배우고, 행하면 다른 백년의 기획이 가능하며 통일의 실체도 분명해지리라.
하여 우리는 장소의 혼으로서 마을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시장의 단위 시민도, 국가의 국민도, 자유교도도, 민주교도도, 사회교도도 아니다. 우리는 어떤 교도도 아니다. 다만 다름을 인정하되 다름의 교도가 아니고 열린 개벽이고자 한다. 시민도 국민도 아닌 개벽마을 자치민이다. 자치민이되 천하를 품는 천하민이다.
마을과 마을을 연대한다. 연대된 마을들이 헛-세계화가 아닌 진-세계화의 천하 마을들과 교류하고 협력한다. 불통의 동서고금을 소통의 동서고금으로 한다.
좌/우, 진보/보수의 진영을 벗어나 자각하고 자강하는 마을 천하를 품는다. 한나라 안에서 이 마을과 저 마을은 다를 수 있으며 그래야만 한다. 보수 마을이 있고 진보 마을이 있다. 원하는 그것이 그것이게 한다. 국가에 의해 표준화된 복사 마을을 거절한다. 근대 천하대란의 난세에서 다른 백년의 기획으로 경향각지에서 백가쟁명하기를 기대한다.
* 이 글...<개벽마을에서 천하를 생각한다(2)>는 이병한의 <<반전시대>>, <<유라시아 견문 1>>을 읽은 독후감으로 2018년 2월 22일에 써서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이후에 출간된 <<유라시아 견문 2>><유라시아 견문 3>>, 조성환의 <<한국근대의 탄생-개화에서 개벽으로>> 들과, 최근의 개벽 담론을 접하고서 일부 수정한 것이다. 박길수는 흔히 삼일운동으로 부르는 1919년의 일을 ‘삼일혁명’으로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