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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Apr 13. 2019

개벽마을에서 천하를 생각하다(3)

- 마을에 묻는 질문과 개벽의 항산항심체 

강 주 영 | 전주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운영위원


1. 개벽꽃 피는 마을



눈 밝은 이들이 아시아가 일어선다고 하고, 동서가 반전한다고들 하는데 한적한 소도시 마을에 사는 목수에게 무엇이 일어서고 반전한다는 것인지 궁리에 궁리를 더하여도 눈앞은 깜깜하기만 하였다.


만국병마(해월신사법설, 개벽운수)와 괴질운수(용담유사, 안심가)에 모든 문이 활짝 열리고 군산복합체와 투기금융자본에 세계는 이미 하나의 시장이 되었는데 아시아의 일어섬 같은 소리는 현실감이 없었다. 일어섬과 반전이 아시아의 서구적 경제 성장이 아니라, 고장 난 근대 문명의 전환을 동에서 이끌 것이라는 선학들의 속말을 모르지는 않았다.


동서가 반전(자리바꿈이 아니라 이병한의 표현을 빌리면 동서의 대합창/합장)하면 약육강식의 경쟁이 사라지는가? 입시지옥과 헬조선이 사라지고, 부부 중 하나만 일해도 가족이 행복한 시대가 된다는 것인가? 횡포한 개인의 합법적 권력에 지나지 않는 국가가 어느날 개과천선하여 약자들의 호민관이라도 된다는 것인가? 마을이 국가보다도 위에 있어 마을 민회가 국가의 최고 권력이 되어 국가는 마을 권력의 연합체가 되는가? 한해륙(韓海陸, 이윤선, <남도인문학> -한반도가 아니라 바다를 포함한 한해륙이 맞다고 본다)의 분단을 끝낼 통일이 평양이 삼성시가 되는 게 아니라, 서울과 평양이 먼저 온 인류의 미래가 된다는 것인가?


마을에서 국가, 아시아, 동양과 서양은 너무 멀었다. 국가를 매개하지 않고 마을에서 천하(天下)를 품을 수는 없는 것인가 하는 물음을 가졌다. 천하가 실재하는 지구나 우주 공간이 아니고 서로가 서로를 모시고 살리는 리(理)나 영성(靈性)의 공간이라면, 리와 영성이 관념이나 혹은 도덕이 아닌 실재로서 드러난 마을의 조성 원리인 향약으로서, 도시 마을 단위의 노동생산체로 구현된다면… 그런 리와 영성을 가진 마을이라면 실재하는 자연 지리 공간인 천하로 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런 리와 영성은 아시아의 것이로구나? 그 리와영성으로 만국병마 괴질운수까지 치료하는 것이 반전이고 일어섬이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했다. 


동서의 반전은 비관적인 인류세를 멈추고, 만인만물이 오손도손 평화롭고 행복하게 되는, 동학식으로 말하면 경천(敬天), 경인(京人), 경물(敬物)의 삼경세(三敬世) 문명으로의 ‘다시개벽’(용담유사 안심가)은 아닐는지!


이제 그때가 되었다는 것인가? 어느 시일(侍日 - 천도교의 예배) 날이었다. 용담유사의 ‘다시개벽’이라는 말이 문득 눈에 번쩍 띄었다. 그냥 종교적인 말이거나 무극대도(無極大道)를 깨우친 수운이나 해월같이 높고 깊으신 분들이나 하시는 말씀으로 밀쳐놓고 있었다. 르네상스나 패러다임의 전환이 아니라 ‘다시개벽’이구나. ‘아! 맞다. 이 말이 있었지!’


용담유사 안심가의‘십이제국(온 세상의) 괴질운수 다시개벽 아닐런가’라는 문장이 현실감 있는 말로 밀려왔다. 그날 일기장에 ‘닭울음소리 같이 듣는 개벽꽃 피는 마을’이라 적었다. 닭 울음소리 함께 들을 만한 인간적 유대의 공간…. 마을에서 새기고 되새기고 또 물었다. 지금이 개벽운수의 그때입니까? 해월이 답했다.


23. 問曰「何是顯道乎」 神師曰「山皆變黑 路皆布錦之時也 萬國交易之時也」 

묻기를「어느 때에 현도가 되겠습니까」 신사 대답하시기를「산이 다 검게 변하고 길에 다 비단을 펼 때요, 만국과 교역할 때이니라.」

24. 問曰 「何時如斯乎」神師曰 「時有其時 勿爲心急 不待自然來矣 萬國兵馬 我國疆土內 到來而後退之時也」 

묻기를 「어느 때에 이같이 되겠습니까」 신사 대답하시기를「때는 그 때가 있으니 마음을 급히 하지말라. 기다리지 아니하여도 자연히 오리니, 만국 병마가 우리나라 땅에 왔다가 후퇴하는 때이니라.」 

- 해월신사법설, 개벽운수편


평민들이 헐벗음을 벗어나 나무를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산이 우거지고, 길에다 비단을 깔 정도가 되고, 모든 나라가 서로 통상을 할 정도로 물자가 풍부하고, 서로를 침략하지 않고 평화로울 때가 개벽운수라! 


원불교 개교 표어가“물질이 개벽하니 정신을 개벽하자”가 아니던가? 만국병마의 괴질운수 세계화가 물러가기는커녕 여전한데 지금이 개벽운수의 그때라고 보아도 되는 것인가? 어디인가에서 고비원주(高飛遠走)하는 개벽파들이 마을과 나라와 천하에 목소리를 내고 행동할 때인가? 모든 준비에는 끝이 없으니 모자라도 일어설 때인 개벽운수의 시절이 된 것인가?


2. 마을에 던지는 질문



도시에 마을이 있는가?(이 글에서 마을은 도시 마을을 말한다. 농촌 마을은 논의의 밖에 있다.) 있다면 마을은 무엇인가? ‘마을 만들기’는 무엇인가? 마을이 만들어지는 것인가? ‘마을 공동체’는 또 무엇인가? ‘마을 공화국’이라는 말도 있다. 공화는 또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이 그 어떤 마을을 만들어야 하는 개벽운수인가? 마을을 만든다면 민주당, 한국당,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 민중당, 녹색당들의 정치는 마을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국가가 있는데 마을공화국이라니? 공화는 무엇이란 말인가? 마을과 공장은 어떻게 되는가? 마을공화국이라면 그 마을에는 무산자, 유산자 하는 계급이 없는가? 마을공화국 운동은 계급투쟁을 포기하는 것인가? 


공장에서 프롤레타리아로 일하고 마을에 돌아오면 그는 마을민인가? 마을의 하숙생인가? 마을에 먹고 사는 것이 없는데 마을공화국이 되는가? 마을은 국가의 축소판인가? 도시 마을이라는 말이 가능한가? 도시 마을은 하숙촌이지 않은가? 하숙촌이 생활공동체가 되는 게 가능한가?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때로 이런 질문이 필요한가도 의심이 된다. 마을에 먹고 살 것이 있어야 마을 만들기든 마을공화국이든 할 것 아닌가? 그렇다면 마을 만들기는, 혹은 마을 공화국은 마을이라는 생산체(?)가 시장에 진입하여 경쟁하는 시장 단위인가? 아니라면국가 단위의 시장과 독립된 마을 생산체가 가능한가? 마을은 기업과 경쟁하는 관계인가? 공장, 사무실, 가게와 경쟁하라는 것인가? 마을 공화국은 대한민주공화국의 정치 주체로서 결국 마을과 마을의 연합으로서 국가를 이루자는 아래로부터의 민주화 운동인가?


개벽이든, 혁명이든, 문명 전환이든 그것들의 주체는 결국 사람일 텐데, 사람들의 단위는 공장(사무실 포함)인가? 마을인가? 마을은 노동 해방을 할 수 있는가? 노동 해방은 무엇인가? 노동 해방은 일을 안 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노동 해방은 부불노동-잉여가치의 수탈을 없애는 것뿐 아니라 나의 자아와 일이 각지불이(各知不移)한 상태이다. 하늘의 이치(일단 그런 게 있다고 하자. 여기서는 모시는 삶의 인격화로 하늘 또는 한울님을 쓴다)를 실현하는 즉 시천주(侍天主)하는 삶이 옮겨지지 않는, 즉 시천주를 거스르는 것들에 대한 투쟁이 ‘불이’라면 각지불이한 마을이 곧 개벽 마을일 것이다. 


그런데 시천주와 각지불이를 모르는 마을의 코흘리개와 애기 엄마와 종이 상자 수레를 끄는 노파들에게도 개벽 마을이 가능해야만이 개벽마을이라 할 것이다. 각지불이한 삶, 다른 말로 공공(公共)한 삶이 마을 자체로 가능해야 마을 공화국이라 할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당신 공공하도록 근대의 경쟁하는 이성을 던지고 공공하는 영성으로 개벽하시오.” 이렇게 계몽할 수는 없지 않는가? 공공하라고, 일부러 서로 공공할 수 밖에 없는 삶의 조건을 만들 수는 없지 않는가? 여기서 던지는 질문들은 오늘 이글에서는 답하지 못 한다. 오늘은 마을공유지, 마을작업장에 관한 내용으로 질문에 대한 논의의 길을 열어 본다.


3. 마을의 항산항심체



마을이 항상 생산하고 그로써 마을민을 항상 안민하는 항산항심(恒産恒心)의 마을을 생각해 본다. 실재하는 항산항심체가 없다면 마을 공화국은 뜬구름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도시 마을의 일정 구획마다 마을 주민이 자유로이 어떤 용도로도 사용 가능한 마을공유지를 생각해본다. 마을공유지가 있으면 비싼 임대료도 원주민 추방(gentrification)도 없다. 경쟁과 배제도 없다. 부동산 공화국도 약해진다. 국가복지가 아닌 마을 자치복지가 가능하다.


민법에서는 262조 수인의 소유는 공유로 271조에서는 수인이 조합체로 소유할 때는 합유로 275조는 법인이 아닌 사단의 사원이 집합체로서 물건을 소유할 때에는 총유로 하고 있다. 민법대로라면 마을사단을 별도로 등록해야 한다. 정확히는 마을은 소유권의 주체로 성립되어 있지 않다. 마을총유를 별도의 사단을 형성하지 않아도 주민등록상 마을 주민이면 마을 총유지, 총유건물에 대해 소유권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마을공동체기본법>을 제정하고 마을총유를 명기하고, 민법의 총유를 개혁하여 마을총유를 넣어야 한다.


마을총유지는 갈등을 일으킬 수도 있지만 항산항심(恒産恒心)하고 유무상자(有無相資)하는 삶의 핵심이 될 수도 있다. 지금도 갯벌은 어촌계 등을 통해 마을 총유지로 기능하고 있다. 우리 전통 마을에서 마을 총유는 훌륭히 관리되어 마을의 공동 이익에 기여했다. 갯벌, 공동 보메기 하던 농업 수로, 마을의 하수처리장인 마을 연못, 마을 저수지, 공동 우물, 방앗간, 마을 마당, 마을 공동 논과 밭, 마을 정자, 서원, 향교 등… 이를 자치 관리하던 마을 향약, 대동계, 촌계, 두레 등 개인이나 단체에 지원되는 자금을 마을공동체의 총유자산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내쫓김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다. 모시는 살림이다. 도시 자치자급경제의 토대가 된다. 운영은 마을민회가 한다. 마을총유자산이 있으니 마을민회가 활성화될 것이다. 갈등도 있겠지만 마을이 항산항심하고 유무상자하는 길로 갈수 있을 것이다.


도시 마을 공유지에 주민 총유자산으로 마을작업장(초소형 공장, micro factory, 공장이 주는 어감을 피하기 위해 마을작업장으로 쓴다)을 만들자. 모두가 주인이고 모두가 일하는 사람들이다. 마을 작업장은 자치자급소농두레체(연합)의 도시 마을형이다. 기술과 네트워크의 발달로 첨단이지만 초소형 공장(micro factory)이 마을에 들어설 수 있다. 집중집적된 거대 산업단지에서 유연분산화된 마을으로의 귀환이다. 관념에 고정된 대형 조립화 라인, 포디이즘을 버리자. 일터가 마을에 생긴다면 이산가족이 될 필요가 없다. 가족공동체가 부활할 뿐 아니라 마을공동체가 부활한다. 공동체가 부활하면 보육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마을작업장은 주주의 것이 아닌 마을 주민의 총유자산이기에 마을에서 삶의 모든 것이 순환한다. 장거리 출퇴근도 사라진다.


미국의 로컬모터스는 동네 카센터 규모에서 3D출력기와 부품으로 자동차를 조립 생산한다. 이 로컬모터스는 한국에도 진출을 시도한다고 한다. 디자인은 전 세계의 인터넷 유저들과 공동으로 한다. 개벽적이다. 과거의 수공업장에 첨단 기술과 네트워크가 결합된 것이다. 3D 출력기로 차체를 만들고 부품은 기존 자동차 회사에서 사와 만드는 마을작업장이다. 


로컬모터스는 상품을 만드는 공장이지만, 우리는 이 개념을 마을의 생필품을 자급하는 마을 작업장으로 생각해 보자. 기술의 민중적 소유이다.


전주에 이런 마이크로 팩토리(micro factory)를 이 마을, 저 마을 한 100개쯤 만들면 어떨까?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도시 재생 사업비 50조 원을 전국 3509개 읍면동으로 나누면 읍면동마다 약 142억이다. 읍면동마다 142억원을 들인 마을작업장 3,509개를 만들면 어떨까? 필자는 개벽이라고 생각한다. 현재의 도시재생 사업은 건물주만 좋아지는 사업으로 비판적으로 본다. 3509개의 마을작업장에서 직접 10명을 고용한다면 전국에서 35,090명이 고용된다. 연관 유발 효과는 더 클 것이다. 투자 10억당 몇 명하는 산업연관에 의한 고용유발계수로 전산업평균 15명을 적용하면 보수적으로 잡아도 70억이면(설비투자를 70억 건물비를 72억으로 본다면) 95명이다. 도시 마을 한 곳을 활성화시키기 충분하다. 전국적으로는 약 33만 명이다.


동학의 유무상자 정신이다. 이 마을작업장은 마을의 총유자산이기에 마을에서 윤리적으로 소비될 수 있다. 마을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전 세계적으로 윤리적 소비망을 건설할 수 있다. 대기업과 경쟁이 되겠느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마을작업장은 대기업이 가져간 마을 경제를 탈환해오는 것이자, 마을의 순환경제이다. 일방적으로 대기업에 뺏기던 부를 국가의 조세나 복지 정책이 아닌 스스로 탈환하고 재분배하는 일이다. 가구, 소금, 된장, 침구류, 자동차, 드론, 컴퓨터, 교구, 학교급식, 의복, 신발 등 대기업이 하는 모든 품목이 가능하다. 공장의 가구가 아닌 마을 목수의 가구, 공장의 구두가 아닌 마을의 수제화, 공장의 식품이 아닌 마을의 손맛으로 만드는 식품… 로컬모터스 예처럼 자동차나 드론도 가능하다. 부품은 외지의 기업들이 생산한 것을 사오면 된다. 자치자급 가능한 물품은 마을작업장만 만들어지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생협, 도농직거래, 공정무역, 공정여행 등 윤리적 소비가 확대되는 경향이 바탕이 된다.


마을 총유자산으로서의 도시 마을 두레인 마을작업장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자연적으로 마을민회가 활성화될 수 밖에 없다. 정치적으로 마을민회를 하자고 하면 어렵다. 하지만 눈앞의 생산과 분배를 두고 마을민회를 하자고 하면 쉬울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전통마을의 대동계나 촌계, 동학의 포와 접이 현대적으로 다시개벽되는 것이다. 투표가 아닌 마을을 직접 운영하는 민주주의가 된다. 시장의 식민인 시민(市民)이 아니라 서로 모시는 시민(侍民)이 된다. 천하의 마을들과 연대한다. 인터넷을 통한 교역망과 설계 기능 결합은 곧 마을이 천하와 연결되는 일이다. 이제 마을이 천하를 품는다. 상호의존적인 완전한 마을공화국이 실현되는 계기가 된다. 거대산단이 아니라 마을작업장이 미래이다.


마을작업장은 모시고 나누는 개벽경제의 시작이다. 마을작업장을 매개로 하여 다른 경제들도 활성화된다. 소비만 하는 마을이 아니라 생산이 있는 마을이라서 소매자영업도 활성화될 계기를 가진다. 이제 도시 마을 작업장 노동공동체와 농촌의 노동공동체 소농두레(연합체)가 연대하면 된다. 마을민회가 그 역할을 담당한다. 이천식천 유무상자하는 연대이다. 마을마다 특성이 다르다. 단순히 일자리를 만드는 게 아니고 스스로 자치자급하는 좋은 삶이다. 자치자급이란 홀로 농사를 지어 사는 삶이 아니라 타인을 수탈하지 않는 상호부조하는 삶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할 권리’가 아니라 모두가 ‘좋은 삶을 살 권리’이다. 국가에 요구하지 않고, 전복 탈취가 아니라 스스로 만든다.


마을공유지, 마을작업장은 민중의 직접 소유권과 마을권력을 세우는 직접민주주의이다. 지역의 노동, 생산, 소비, 교환을 바꾸는 비자본주의 호혜경제의 시작이다. 마을 개벽학당, 마을총유와 마을작업장, 소농두레(연합체)에서부터 개벽은 시작된다.






      

소걸음편집장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대표, 개벽신문 주간, 천도교중앙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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