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회 개벽포럼을 마치고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평화’라는 말을 자주 들었던 기억이 난다. 대표적인 것이 ‘평화헌법’으로, 평화주의를 담은 헌법9조를 일본 사람들은 ‘평화헌법’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조항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에 반대하는 ‘9조 모임’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평화학’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도 일본에서이다. 지금은 한국에서도 ‘평화학’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생소한 개념이었다. 한편 당시에 나는 중국 도교를 공부하고 있었는데, 중국인 도교연구자들이 쓴 글을 보면 ‘생명’이라는 말이 숱하게 등장하였다. “유교=도덕”이라면 “도교=생명”이라고 할 정도이다. 단지 도교연구자들뿐만 아니라 현대 중국철학자 대부분이 생명예찬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 보니 ‘생명평화’라는 말을 쓰고 있었다. 그것도 불교, 기독교, 한살림 할 것 없이 누구나 쓰고 있는 것이다. 신기하였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최근에 일본에서도 ‘생명평화’라는 말이 쓰이고 있는 것 같지만, 빈도수나 분야면에서 한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에서 이 말이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했는지를 추적해 보았다. 맨 처음 나온 자료가 기독교 진영이다. ‘생명평화마당’, ‘생명평화센터’ 등의 용례가 보인다. 좀 더 찾아보니 2011년 무렵에 진보적 기독교 진영에서 이 담론을 적극적으로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었다. 기독교의 정체성이 없어진다고 하는 -.
그러다가 마침내 도달한 것이 2001년 2월 16일에 시작된 ‘생명평화결사’이다. 이 결사는 “좌우익희생자와 뭇 생명 해원상생을 위한 범종교계 100일 기도”를 드렸고, 이 기도가 끝난 5월 26일에는 지리산 달궁에서 <생명평화 민족화해 지리산위령제>가 거행되었다. 이 위령제는 “좌우대립으로 희생된 원혼들과 지리산에서 죽어간 뭇 생명들을 위로하고 새로운 세기의 비전을 모색하기 위한 자리”로, “지역과 종교와 이념의 벽을 허물고 민족의 화합을 모색하는 한마당이자, 개발과 파괴로부터 지리산을 온전히 보전하기 위한 생명살림운동”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1 범종교계에서 전개한 이 ‘영성운동’은 죽은 영혼도 달래주고 지리산도 보존하며 민족의 화합을 도모하는 일종의 종교계의 ‘한살림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낭독된 선언문의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지리산 선언문>
오늘 우리는 생명평화와 민족화해를 염원하면서 민족의 영산 지리산에 모여 위령제를 올렸습니다. 지리산은 1억 5천만년 전부터 이 땅을 지켜온 우리의 삶 그 자체입니다. 우리 역사 그 자체인 지리산 봉우리 봉우리마다에는 우리 선조들의 삶의 자취가 남아 있고 지리산 골짜기 골짜기마다 역사의 아픔이 배어 있습니다.
지리산은 민족사의 가장 비극적인 현장입니다. 너와 나, 영남과 호남, 세대와 세대, 좌익과 우익, 종교와 종교, 인간과 자연을 가리지 않은 지리산은 그 누구도 외면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그 넉넉한 품안에 모두를 끌어안았습니다. 그처럼 소중한 어머니의 산, 지리산이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리산의 핏줄을 끊고 가슴을 갈라 지리산을 죽이는 것은 끝 모를 인간의 물질적 탐욕입니다. 어리석은 우리는 욕심에 눈 멀고, 편안함에 귀먹어 마침내 삶의 뿌리마저 파헤쳐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지리산을 죽이는 것은 생명을 죽이는 것이니, 나 자신을 죽이는 것이며, 나아가 후손들을 영원히 죽이는 것입니다. 지리산은 살아야 합니다. 지리산이 더 이상 고통의 땅, 절망의 땅이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우리는 지리산을 탐욕의 불구덩이로부터 살려내고자 합니다. 지리산을 살리는 것은 우리를 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리산을 살리기 위해서는 먼저 지리산에 서려 있는 역사의 아픔을 달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한을 안은 채 지리산에서 죽어간 수많은 생명들의 원을 풀어 주어야 합니다. 지리산에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그리며 한많은 세상을 떠난 많은 넋들이 떠돌고 있습니다. 이 넋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맺힌 한을 풀어내 지리산이 품고 있는 역사의 아픔을 치유할 때 비로소 한반도를 뒤덮고 있는 냉전의 찬바람이 물러가고 사랑과 평화의 나무가 자라날 것입니다.
오늘의 위령제는 생명평화와 민족화해를 위한 첫걸음입니다. 지리산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많은 넋들의 원통함을 풀어줄 때 비로소 한반도의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통일을 이루며, 나아가 온 누리의 생명과 온 누리의 사람들을 행복하고 평화스럽게 만드는 새 삶의 계기가 마련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위령제를 통해 살아 있는 많은 이들의 가슴에 응어리진 한이 함께 풀릴 것으로 믿으며 위령제를 올렸습니다. 영령들이시여! 고이 잠드소서 - . 살아있는 우리들은 왜곡된 우리 역사를 바로잡고, 나라와 겨레의 발전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루겠습니다.
2001년 5월 26일 생명평화 민족화해 지리산위령제 봉행위원회 일동2
이날 공동봉행위원장인 조계종 총무원장 정대스님은 봉행사에서 “오늘 위령제를 통해 민족에게 화합을, 생명에게는 평화를 움트게 하는 서원을 모아야 하겠으며 지리산 골짜기를 떠나지 못하는 숨져간 넋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맺힌 한들이 풀어지도록 지극한 마음으로 발원하고 정성을 모으도록 하자”고 말했다고 한다.3 이에 의하면 ‘생명평화’라는 말은 “억울하게 죽어간 생명들을 위로하여 평화를 주자”는 의미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원혼들의 해원상생을 의미하는 것이다.
위령제가 끝나자 <생명평화 민족화해 평화통일 지리산 천일기도>가 이어졌다. 이 기도에는 각 종교계를 비롯하여 김지하 시인, 김영호 교수(경북대) 등도 함께했다. 대표로 실상사 주지 도법 스님이 하루에 4번씩 1000일간 기도를 올리며 자연과 인간, 사람과 사람, 남과 북, 지역과 지역, 종교와 종교, 이념과 이념 등 한반도의 평화를 가로막아온 벽들을 허물고, 상생과 화해를 기원했다.
이 1000일 기도는 2003년 11월 15일에 회향식을 갖고, 이번에는 다시 ‘생활 속의 평화’를 추구하는 <지리산평화결사>로 이어졌다.4 운동의 대상이 죽은 자들의 영혼에서 산 자들의 생활로 전환된 것이다. 생명평화결사 기획위원장을 맡은 이병철 전국귀농운동본부장은 “생명평화결사는 요구나 비판이 아니라 스스로 평화가 되는 공부를 하자는 것”이라며 “자기 수련과 공부를 통해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가슴에는 평화를 담고 즐겁고 신명나게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향하는 생명평화운동”이라고 말했다.5 여기에서는 ‘생명평화’가 지금 살아있는 자들에 대해 쓰이고 있다. 즉 살아있는 이들이 “평화롭고 생명력있는” 삶을 살자는 운동으로 생명평화운동이 확대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운동의 중심에는 항상 도법스님이 있었다. <개벽포럼>의 오프닝을 도법스님으로 시작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지금으로부터 150여년 전, ‘다시 개벽’을 처음 주창한 동학의 핵심사상은, 해월
지난 3월 21일 목요일 오후, 창덕궁 옆에 위치한 은덕문화원에서 제1회 개벽포럼이 열렸다. 이날 모신 ‘개벽의 일꾼’은 생명평화운동과 화쟁운동의 대명사로 알려진 지리산 실상사의 도법스님. 40여명 가까이 모인 청중들과 1시간 동안 강연을 듣고 1시간 반 동안 대화하였다. 2시간 넘게 진행된 이날 대화마당에서, 지난 20여년 동안 도법스님이 걸어온 생명평화의 발자취가 우리 사회에 평화의 분위기가 형성되는데 보이지 않는 촉매제 역할을 했음을 모두가 공감하였다.
포럼을 마치고 머릿속에 맴도는 한 마디는 ‘현장’이었다. 그는 철저한 현장주의자였고, 그런 점에서 민중실학자였다. 일본의 국민적 영화 <춤추는 대수사선>에서 주인공 아오시마 형사는 “사건은 현장에서 일어난다”는 명대사를 남겼다. 이 말을 빌리면, 도법스님은 이번 포럼을 통해서 “개벽은 현장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각인시켜 주었다.
최시형의 ‘활인도덕(活人道德)’이라는 말로부터 알 수 있듯이 동학은 살림사상이었다. 그 사상은 1894년에 동학농민군의 「살생하지 말라」는 규율로 이어졌고, 1919년의 <삼일독립선언문>에서는 “폭력의 시대가 가고 도덕의 시대가 온다”는 비폭력평화주의로 재현되었다. 그리고 70년 뒤인 1989년에는 ‘농민과 농토와 밥상 살리기’의 일환으로 한살림운동이 일어났고, 그로부터 10여년 뒤에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생명평화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지난 촛불혁명이 비폭력적으로 끝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운동의 축적과 결코 무관하지 않으리라. 멀게는 동학사상과 농민혁명의 유산이 바탕에 깔려 있었고, 가깝게는 2001년 이래 15년 동안 지속되었던 생명평화운동의 내공이 암암리에 작용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촛불혁명이 일어나기 1년 전인 2015년 12월에 있었던 제2차 민중총궐기대회가 사상 유례없는 평화집회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데에도 도법스님의 역할이 컸다. 당시 도법스님은 대한불교조계종 화쟁위원회 위원장이었고,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은 조계사에 피신해 와있었다. 도법스님은 이날 포럼에서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해 주었다.
“2015년의 일입니다. 민주노총의 한상균 위원장이 조계사에 와서 온 나라가 시끌벅적한 적이 있었죠? 이때 한상균 위원장이 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2차 민중궐기대회를 성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평화적인 집회가 이루어지도록 하자고 합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종교계를 비롯하여 시민사회, 노동계, 민중계가 모두 결심을 하였습니다. 당시 종편에서는 98% 평화집회는 불가능하다고 보도했습니다. 다들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불교 내부에서도 걱정을 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불교계에서 평화의 꽃길을 만든다고 앞장섰고 여러 종교계에서도 도와주신 덕분에 12월 5일에 실제로 평화집회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경찰은 경찰대로 우리 어떻게 해야지? 노동계와 민중계도 우리 어떻게 해야지?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노동계와 민중계는 강력 투쟁하는 것만 대비해 왔기 때문입니다. 경찰도 마찬가지이고요. 현장에서 나온 얘기들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싸우는 방식으로 문제를 다루는 것하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다루는 것 하고는 말로는 별것이 아닌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이 일이 있고 1년 뒤에 촛불혁명이 일어났다. 촛불정국이 절정에 달했던 날, 집회를 기획하는 측에서 폭력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치열한 토론이 오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다행히 비폭력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이때의 평화집회 경험도 한몫 했을 것이다. 1894년에 동학농민혁명이라는 개벽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1919년의 삼일만세운동도 상대적으로 쉬웠듯이 말이다.
도법스님은 생명평화 개념에 도달하게 된 배경에는 그것이야말로 유일하게 함께 사는 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지난 20세기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편을 갈라서 죽기 살기로 싸우게 된 이유가 뭘까? 그것은 반드시 함께해야 할 것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인생을 걸고, 목숨을 걸고 반드시 함께 해야 할 것, 그것은 무엇일까? 이렇게 물었을 때 우리가 도달한 결론이 ‘생명’이었습니다. 누구나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가치는 결국 내 생명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한 목숨 지키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생명의 가치는 누구도 자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가치를 중심에 놓고 함께 하겠다면 누구든지 같이 하자,’ 이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그다음에 던진 물음은 그렇다면 ‘그 생명은 어떻게 살고 싶은가?’였습니다. 당연히 평화롭게 살고 싶겠죠. 평화가 없는 생명은 정상적인 생명이라 할 수 없고, 생명이 없는 평화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생명과 평화를 하나의 개념으로 통합시키는 것이 바람직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생명평화’라는 말을 쓰게 된 것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웠던 사실은 “2001년 당시만 해도 생명평화라는 말을 벌벌 떨면서 썼다”는 고백이었다. 실제로 김지하 시인은 90년대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고 하여 민주세력으로부터 호된 비난을 받은 적이 있었다. 투쟁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되던 시기에 생명평화라는 기치는 회색분자로 보이기 십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20여년이 지난 지금 한국인들은 누구나 생명평화라는 말을 쓰고 있고, 그것을 당연한 가치로 받아들이고 있다.
‘개벽’이라는 말을 종교의 틀을 벗어나서 학문적으로, 그리고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쓰고자 하는 지금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개벽’이라고 하면 여전히 종교적이고 신비적인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을 두려워해서는 아무런 운동도 시작할 수 없다. 도법스님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20여년이 지난 지금 ‘생명평화’라는 말을 누구나 거부감 없이 쓰고 있듯이, ‘개벽’이라는 말도 20여년쯤 운동이 쌓이게 되면 국민적 상식이 되지 않을까? 마치 일제강점기에 조선학운동에서 시작된 ‘실학’이라는 말을 오늘날 모르는 사람이 없듯이 말이다.
주석
1 <녹색연합> 홈페이지. http://www.greenkorea.org/?p=18052
2 <생명평화 민족화해 지리산위령제 ‘성료’ : 달궁서 좌우익 초월...7대 종단, 2백여개 단체, 5천명 참석>, <<불교신문>>, 2002.02.15.
3 위와 같음.
4 <지리산 1000일 ‘평화기도’ 마쳤다: “간절한…기도는…결국 세상을 바꾸리라”>, <<한겨레신문>>, 2003.11.12.
5 <자기로부터의 혁명 “시~작! ” : 지리산생명평화결사 출범 … 남 비판보다 스스로 실천 중시>, <<한겨레신문>>, 2003.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