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오기영전집 제1권 <사슬이 풀린 뒤>의 일부분입니다.
(전략, 1910년이 되어) 그러나 나라는 기어이 망했다. 왜놈의 천하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전(前) 군수는 목을 놓아 울다울다 지쳐서 사흘째 식음을 전폐하였다는 소문이 퍼져나왔다.
여러 학교의 선생들과 학생 대표가 군수를 찾아가서 마당에 늘어서고 그중 최광옥(崔光玉) 선생이 군수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 최 선생은 평안도 태생으로 일본 유학을 하고 돌아와서 신교육 운동을 일으킨 선각자였다. 그가 전 군수의 교육 사업을 돕기 위하여 이 고을에 와서 여러 학교 교장의 선생님이 되어 있었다.
“영감, 고정하시고 몸을 돌보시오.”
하고, 그는 군수의 초췌하고 기운 빠진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제도 그제도 하던 말이었다.
“몸을 돌봐 무얼 하오, 나라 없이 살아 무얼 하오.”
군수는 눈물을 흘렸다. 어제나 그제나 다름이 없었다. 최 선생이 따라서 흐르는 눈물을 씻고 나서,
“죽기야 어려울 것 없지요. 허나 잃었던 나라를 찾아야 할 재목을 길러야 아니하오, 영감 일어나시오.”
하고, 권할 때에 군수는,
“선생 말씀이 옳소. 내 일어나리다.”
이렇게 해서 군수는 슬픔을 거두고 일어났다. 그는 나라 망한 것이 정부에 앉았던 양반 뼈다귀를 가진 녀석들 때문이었다고 학교마다 다니며 핏줄을 올려 격월(激越)한 연설을 하고,
“이제 우리는 나라를 도로 찾아 놓아야 죽어도 돌아갈 곳이 있다.”
고 하였다. 최광옥 선생이 그해 가을, 쇠약한 몸에 각혈을 무릅쓰고 학교 순회를 다니던 끝에 병이 더쳐서 세상을 떠났을 때, 군수는 장례식에 모인 온 읍 사람들과 여러 학교 500여 명 학생 앞에서,
“내 어젯밤 꿈에 최 선생을 만났소. 그렇게 마음이 착하고 진실한 예수교인인 최 선생이 으레 천당에 갔을 줄 알았더니 그렇지 못합디다. 천당에서 들이질 않더래요! 망국민은 천당 오를 자격이 없다고. 그래 내가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하였더니 최 선생 말씀이 ‘아니오, 이천만 동포가 이제 외국의 압제하에 도탄에 들었거늘 내 그것을 구하지 못한 몸이 무슨 염치로 천당의 복락을 누리겠소. 지옥이 지당하오.’ 아, 최 선생이 이런단 말이오. 여러분, 최 선생의 혼은 지금 천당에도 못 갔소, 그렇다고 지옥에서도 아니 받는대요, 생전에 쌓은 덕이 있는데 지옥이 당하냐고! 천당도 지옥도 못간 최 선생이 얼마나 가엾소? 이게 모두 나라 잃은 탓이오.”
군수는 말문이 막히고 그 대신 울음을 터뜨렸다.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떨구던 군중들도, 학생들도 모두 소리를 내어 울었다….
(배천읍 3.1운동(1919.3.31) 거사를 위하여) 지금 우리집 사랑방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읽고 서로 말없이 앉아 있는 이들에게서 나는 이 얘기를 열 번도 더 들었다. 그런데 오늘밤도 이들은 또 10년 전의 그 생각을 하는가 보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또 그들은 그 후 10년 동안 일본 헌병의 압박이며, 같은 조선 사람이면서 칼을 차고
보조원 노릇을 하느라고 동네 노인들이며 부녀자를 쩍 하면 아무데서나 뺨을 치고 발길질을 하는 것을 분하게 생각하는 듯하였다. 아마 상등병의 마부(馬夫) 노릇을 큰 벼슬처럼 여겨 제법 보조원 행세보다 더 괴악스레 구는 박칠성(朴七星)이에 대한 가지가지 괘씸하고 분한 것도 생각하는 듯하였다.
“옳은 말야! 더러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독립을 해야 해. 그렇잖으면 어차피 다 죽을 판이야.”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모두들 옳다고 하였다.
(하략)
참고자료
* <오기영전집>(전6권)은 5월 10일 이후에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