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영 전집>(전6권)
일제강점기에서 해방공간까지 신문기자 및 문필가로서 왕성한 취재 및 시사 논평을 투고하였던 오기영 선생의 생전 단행본과 기고문 등을 모아 새로 역은 책 등 전6권의 전집이다. 이 책들은 한 가족의 투쟁-고난사, 한 기자의 취재기를 넘어 민족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될 대서사시요, 민족의 정신과 문화, 생활의 보고요, 통일독립 미래의 귀중한 길잡이로서 살아 숨 쉬는 고전이다.
오기영[1909-1962(최종 생존확인)]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한 언론인으로, 동아일보 배천지국 수습사원으로 사회 첫발을 내딛어, 1928년 동아일보 평양지국 사회부기자가 되었다. 평양과 신의주를 오가며 사회부 기자 활동을 하는 동안 형 오기만의 국내 활동을 지원하고, 부인과 함께, 차례로 감옥을 들락날락하는 가족들의 옥바라지에 매진하였다. 일제 말엽에는 조선일보 특파원으로도 일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언론계에 복귀하지 않고, 경제 재건을 위해 경성전기주식회사에 투신하였다. 1946년부터 다시 ‘신천지’를 비롯한 잡지 언론에 투고하고, 1947년 12월 <민족의 비원>을 시작으로 <자유조국을 위하여> <사슬이 풀린 뒤> <삼면불> (이상 1948년) 등의 단행본을 발간하였다. 1949년, 더해만 가는 좌우익 갈등 상황에서, 중도주의자로서의 그의 주의주장과 우익 계열인 부친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좌익 계열로 분류되는 형과 동생의 이력 등이 빌미가 되어, 결국 월북하여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서 활동한다. 50년대 말까지는 동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신문에 간간이 기고하였으며, 1958년에는 언론계에 복귀하여 <조국전선> 주필이 된다. 현재 1962년(54세)에 과학원 연구사로 활동한 기록이 최종 확인된다.
1945년 해방이 된 다음날. 오기영은 망우리 가족 묘지를 찾아갔다. 무덤 위에 태극기를 덮어 놓고 그 앞에서 서서, 오기영은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그곳에는 사회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오기만, 그리고 오기만의 후원자이자 그의 아내인 명복이 안장되어 있었다.
살아서, 무덤에 조문하는 이들도 죽음의 상처로 얼룩진 이력의 소유자들이다. 사회주의자로서 독립운동을 하다 수감 중에 해방과 함께 서대문감옥에서 놓여나온 동생 오기옥과 조카 오장석 그리고 사회주의 운동으로 수감된 적이 있는 여동생 오탐열, 독립운동으로 수감 중에 얻은 병으로 친정오빠를 잃은 오기옥의 부인, 독립운동으로 수감 중에 얻은 폐결핵으로 사망한 남편을 둔 누님이 함께 하였다.
그 자리에서 오기영은 소리친다. “이제부터는 노예의 무덤이 아니다!”
그것은 기쁨의 탄성이면서, 심장에서부터 울려 나오는 통곡이었다.
일제강점기에서부터 시작된 ‘적폐청산’은 단지 과거의 문제에 발목 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미래를 향해, 구김 없이 행복을 구가할 수 있는 사회를 위해, 그리고 통일 조국의 평화세계을 위하여 꼭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적폐의 역사에 짓눌리고 가려져 묻혀 있는 정의로운 역사를 발굴하여 우리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그 역사의 진면목으로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재조명하는 일이다. 적폐의 청산과 미래의 건설은 분노의 표출이 아니라, 민족사의 구성원들이 마땅히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도록 하고, 받아야 할 기림을 받도록 하고, 얻어야 할 명예를 누리며, 기억되어야 할 뜻과 정신이 온전히 기억되도록 하는 데서만 가능해진다.
그것은 이미 돌아간 영웅들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 그리고 이 땅에서 우리를 기억하며 살아갈 후손들이 스스로 자랑스럽고 행복하고 정의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할 기본이며 근본이 되는 일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올해, 이러한 민족사 복원의 염원과 움직임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고 두드러진다.
그런 가운데 선을 보이는 <오기영전집>(전6권)은 우리가 소중히 모시고자 애쓰는,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고난에 지지 않고 억압게 굴하지는 삶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한국 현대사의 ‘유사(遺事)’이다. 진즉에 발굴되고 널리 선양되었어야 할 이 귀중한 기록이 2002년에 일차로 소개된 데 이어 이번에 다시 증보되어 전6권으로 발간됨으로써, 우리는 민족사의 귀중한 서사시(敍事詩)를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1944년 12월, 오기영의 동생 오기옥은 결혼한 지 일주일 만에 종로경찰서에 수감되었다. 오기영은 ‘형님이 잡혀 다니고 내가 잡혀 다닐 때에는 그다지 괴로운 줄도 몰랐더니만 손아래 아우가 잡혀간 뒤에 처음으로 나는 마음의 아픔을 느꼈다. 비로소 과거에 어머니가 얼마나 마음 아프셨을까를 알았다.’며 마음 아파하지만, 그러나 정작 백방으로 석방을 위해 노력하는 누이와 달리 오기영은 일제 경찰에 빌 수도 없고 동생에게 전향을 권유할 수도 없다며 오히려 누이를 나무라기까지 한다. 한편으로 결혼 일주일 만에 생과부가 된 계수(제수)를 위로하며 오기영은 되뇐다. “어지간히 거친 운명에 시달리는 사람들끼리 모였다.”
오기영 가족의 ‘거룩한’ 삶의 내력은 1948년 손수 지어 간행한 <사슬이 풀린 뒤>라는 자서전(自敍傳)에 오롯이 실려 있다. “우리가 같이 체험한 / 피묻은 이 기록을 / 순국의 혁명가 / 선형(先兄) 오기만과 / 그의 동지요 / 나의 사랑하던 아내 / 이미 추억의 세계로 / 돌아간 김명복의 / 두 영(靈) 앞에 / 울며 바치노라.”라는 헌사로 시작되는 <사슬이 풀린 뒤>는 3.1운동 당시 부친(오세형)이 배천읍 만세시위를 주동한 뒤 투옥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오기영 또한 3.1운동으로 투옥된 교장선생님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그해 12월 친구들과 모의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11살의 나이로 투옥되어 고문(!)을 당한 경험이 그 뒤를 잇는다. 그러나 그것은 오기영 일가족의 민족운동사-고난사의 서막에 불과했다.
그 밖에도 그의 가족들은 그야말로 민족운동 전선에서 한결같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투쟁을 거듭하였다. 투옥되어 혹은 죽고, 혹은 병고에 시달렸다. 그 가족의 수난사를 간략히 보면 다음과 같다.
*오세형 – 부친, 고향, 배천의 3.1운동 주동자로 투옥되다
*윤인의 – 모친, 자녀들이 독립운동으로 고초를 겪는 역사를 온몸을 감당하다
*오기만 – 형. 신간회 사회주의 운동 등. 수감 중 얻은 폐결핵으로 사망 (1905-1937)
*오기영 – 3.1운동으로 투옥(11세), 사상범 투옥, 수양동우회 투옥 등 총4회 투옥
*오기옥 – 남동생.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수감 중 해방을 맞아 석방 (1919-1950?)
*김명복 – 부인. 오기만의 동지. 여섯째 아이를 낳던 중 간독으로 병사
*오장석 - 조카, 사회주의 운동으로 수감(1922-?)
*오탐열 - 오기영의 누이, 사회주의 운동으로 수감
*강기보 - 오탐열의 남편, 수감중 얻은 폐결핵으로 순국(대한민국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가족사이면서 민족사, 민족사이면서 서사시
누구보다도 오기영 자신이, 직접 기록하는 그 가족의 수난사 <사슬이 풀린 뒤>의 민족사적 가치와 의의를 자각하고 있었다. <사슬이 풀린 뒤>의 서문 격으로 책 서두에 배치된 <어머니에게 드리는 편지>는 “어머니. 쇠사슬에서 풀린 기쁨은 쇠사슬에 얽혔던 사람 보다 더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어머니는 노예의 어머니가 아니요, 나는 노예의 아들이 아닙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 오기영은 다음과 같이 의의를 밝힌다;
“우리는 이 모든 아픈 과거를 잊지 말아서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당대(當代)뿐이 아니라 길이 자손에게까지 이 피 묻은 기록을 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자유를 침략하였던 야만에 대하여 두고두고 적개심을 가져야 하며 그 적개심을 자손에게 상속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으로써 우리의 자손이 그들의 자유를 영원히 지켜 나가는 노력의 본보기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 이것이 우리 가족만이 겪은 일이라 하면 아무런 문제될 가치가 없습니다마는 형님의 말과 같이 이러한 일을 당한 조선 사람이 많기 때문에 이 기록은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42-43쪽)”
한마디로 이 기록은 한 가족의 투쟁-고난사이면서, 그 가족이 깊숙이 간여했던 독립운동사의 내밀한 증언록이다. 오기영은 <사슬이 풀린 뒤>에서 그 가족의 고난사뿐이 아니라, 그들이 간여하면서 만난 김형선 형제들, 박헌영을 위시하여 3.1운동 당시의 운동 과정, 하다못해 일제강점기 말기의 ‘한글 사용 금지’ 풍경까지를,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이 생생한 모습으로 증언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 하나하나가 고난과 눈물과 죽음으로 점철되었으되, 결코 패배의 기록이 아닌, 투쟁과 승리의 서사시로 오롯이 살려 내고 있다는 데, 이 책의 성취가 있다.
<사슬이 풀린 뒤>를 비롯한 오기영 전집의 역사적 가치
<사슬이 풀린 뒤>는 처음에 해방공간에서의 최고의 잡지라고 할 <신천지>에 4회에 걸쳐 초고가 연재되었다. 이 기사는 폭발적인 호응을 얻어 내서, 일부 학교에서는 이 부분을 복사하여 교재로 썼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이를 증보하여 단행본 출간을 하려고 출판사에 맡긴 뒤 2년이 되도록 출간이 미루어졌다. 그러는 동안 정국은 걷잡을 수 없이 좌우익 투쟁의 혼란으로 접어들었고, 친일파가 득세하는 세상이 오고 말았다.
하여 오기영은 처음에 쓴 서문에 이렇게 덧붙이기에 이른다;
“3년 전 해방의 감격은 벌써 하나의 묵은 기억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도 기쁘더니, 그렇게도 감격스럽더니, 이제 우리의 가슴속에는 이 기쁨과 감격 대신에 새로운 슬픔과 환멸이 자리를 바꾸어 들어찼다. 이제 제2해방이 있어야 할 것은 누구나 아는 바요 그것을 기다리는 마음도 누구나 초조하다. 그런지라, 3년 전의 해방을 정말 해방으로 알고 기쁨과 감격의 눈물로 엮은 이 책을 읽을 때에 누구나 달라진 세월에 부대끼며 다시금 슬픔을 아니 느낄 수 없이 되었다. 무엇이 달라진 세월인가? 똑바로 따지면 다르기는, 1945년 8·15 이후 잠깐일 것이다. 도로아미타불이라면 심한 말일까? 전날에 내 형을, 내 매부를 죽게 하였고, 내 아버지를, 나를, 내 아우를, 내 조카를 매달고 치고, 물 먹이고 하던 그 사람들에게 여전히 그러한 권리가 있는 세상이다. 잘 살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이 따로 있고 인민은 여전히 호령 밑에서 불행과 무지와 빈곤에 울어야 한다면 이것은 인민의 처지에서 볼 때 권력 잡은 지배 세력이 바뀐 것뿐이지 인민 전체의 불행을 행복으로 바꾼 것은 아닌 것이다. 여기, 뒷날에 정말 해방이 오거든 또 한 번 <사슬이 풀린 뒤>를 써야 할 까닭이 있다.”
빛나는 역사의식, 미래를 투사하는 시선
오기영이 1948년 12월에 쓴 회고록 <사슬이 풀린 뒤>에서, 해방되던 날의 감격을 회상하며 쓴 대목은, 전집을 통틀어 백미라고 해도 좋을 혜안을 담고 있다. 그것은 1945년 8월 15일의 일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맞이할 통일독립/독립통일의 그날을 예견하는 시선이요, 그래서 염원이자 예언이며, 비원이자 선언이다;
“생각하면 우리는 이제 일본의 압박으로부터서만 해방된 것이 아니다. 역사는 다시 봉건시대로 돌아갈 리가 없고, 몇 사람만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그러한 사회제도가 생길 리 없으니, 우리는 실로 4천 년 역사를 통하여 처음으로 해방되는 백성이다. 얼마나 큰 기쁨인가. 모두 이 기쁨을 즐기는 것이다. 오늘 이 기쁨에 참예하지 못하고 거리에 나와 보지 못하는 사람이야, 어저께까지 동포의 이름을 팔아서 압박자에게 아첨하던 무리요, 거기서 조각 권력을 얻어 가지고 동족을 치던 무리뿐일 것이다. 지금까지 겪은 고초가 끔찍하나 나는 오늘 쥐구멍에 숨어야 할 무리에 들지 않고 이렇게 거리에 나서서 민족의 기쁨 속에 섞일 수 있음을 생각할 때에 또다시 가슴은 감격에 벅차다.”
8.15 해방은 우리 민족 최초의 해방이라는 것이다. ‘4천년 역사를 통하여 처음으로 해방되는 백성’이란 ‘하늘백성(天民)’이던 바로 그 순간의 회복이며, 4천년 동안의 고난적덕(苦難積德)으로써 도달한 ‘하늘백성’의 시대가 비로소 시작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기영의 시선은 어쩌면 당대에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시선이며, 오늘의 우리가 분단을 극복하는 날에야 비로소 체감하게 될 시선의 높이이기도 하다.
오기영 전집 전6권은 해방공간에서 그러했듯이, 우리가 민족적 자존감을 회복하는 역사를 써나갈 앞으로의 시대에 남과 북 모두에 ‘민족교과서’로 두고두고 읽혀야만 유감이 없을 것이다.
(책은 5월 10일 이후에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