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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y 24. 2019

사슬이 풀린 뒤

오기영 이야기 - 007

사슬이 풀리기 까지 ....



아내가 물 묻은 손을 닦고 친정 오라비 댁으로 간 새에 아침 신문을 펴든 나는 사회면 꼭대기 기사의 주먹 같은 글자에 눈이 쏠렸다.

경기도경찰부에서는 어제 새벽 경인가도(京仁街道)에 무장 경관 삼백여 명을 출동시켜 철통같은 비상경계망을 치고 수사한 결과 영등포 부근에서 최근 수년래 조선 내 지하운동의 지도인물 김형선(金炯善)을 체포하였다고 실려 있었다. 

“이 사건에 관련되는 것이 아니오?” 하는 눈치로 내가 형님을 바라볼 때에 형님은 그렇다는 듯이 빙긋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나서, “소가 잡혔어!” 하였다. 

“소가?” 하고 나는 다시 그 주먹 같은 굵은 활자로 나타난 김형선이라는 이름을 보았다. 그리고 그 부드럽고 온순하나 그 눈에 불길이 일던 소를 생각하였다. 산골짜기 샘물이 바다가 된다는 혁명 의욕을 말하던 소를…. 

예감은 기묘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한 동생은 신의주감옥에 있고 또한 동생은 부산감옥에 있으니 자기는 필시 서대문감옥에 갈 것만 같다고 하던 그 소가 정말 서대문감옥을 가게 된 것이다. 

당시의 서대문 감옥 전경 

(소=김형선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볼수록 온순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다만 그 부드러운 눈이 다시 볼 제는 쏘는 듯한, 누르는 듯한 빛이 있었다. 두 번째 그를 만났을 때 나는 그의 눈에서 불이 나는 듯함을 보았다. 조용조용히 형님과 자기와의 현재 사명에 대한 신념을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본 것이다.

“적(敵)의 세력은 우수하고 우리는 약하다. 그러나 적의 세력이 꺾일 날이 있을 것이다. 산에서 흐르는 조고만 샘물을 보면 그것이 하찮은 것 같지만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리는 동안, 다른 샘 줄기와 합쳐서 개울이 되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 샘 줄기 적에는 낙엽 하나를 흘려 버릴 힘이 없지마는 강이 되고 바다가 되면 기선도 군함도 띄울 수 있다. 나나 기만이나 모두 지금은 하찮은 샘 줄기다. 그러나 우리가 가는 곳은 강이 되고 필경은 바다가 될 것이다. 벌써 우리는 우리와 같은 많은 샘 줄기를 만나서 뭉치고 그래서 자꾸 커다란 개울이 되어 간다. 적이 우리를 찾아서 잡아 가두고 죽이고 하지만 그것은 마치 샘 줄기를 없애 보려는 쓸데없는 노력인 것이다. 샘을 막으면 땅속으로라도 흐르고 수증기가 되어 하늘에 올라가도 그것은 또 비가 돼서 다시 내려오는 것이다. 아무리 적이 지독하더라도,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도 우리 마음에서 혁명 의식을 강탈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의 혁명 의식이 뭉칠수록 커지고 적의 세력을 깨뜨리는 힘이 커질 것이다.”

이렇게 확고한 신념을 쏟아 놓을 때에 그 온순하고 부드러운 얼굴에는 홍조가 돌고 눈에서는 불이 이는 듯하였다.

그는 다시, “우리가 오늘날까지 적과 싸우는 동안 희생이 많았다. 사실 우리의 혁명전선은 많은 투사들의 피에 젖어 있다. 나나 기만이도 잡히는 날이 죽는 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혁명 의식을 포기할 수 없는 한 우리의 투쟁은 죽음을 각오하고 계속되는 것이다”라고도 하였다. 또

“나두 기만이처럼 기영이 같은 남동생도 있구, 여동생도 있는데 그 애들도 모두 혁명 전선에 참가해 있다.”

고도 하였다.

“지금 동생들은 어디 계시지요?” 하고 내가 물었을 때,

“남동생은 부산감옥에, 여동생은 신의주감옥에 있어. 그래서 아마 나는 잡히면 서대문감옥에 있게 될 것만 같다니.” 하면서 재미있는 공상처럼 말했다.

이튿날 그가 떠나려 할 때 여비에 쓰도록 내주는 돈을 말없이 받더니

“기만이에게 치부해 두라구.” 하고 웃으면서 일어섰다.

김형선 수형기록 카드에서

그 소가 바로 이때에 철창 속에 들어가서 14년 후 이 땅에 해방이 와서 감옥문이 열리고야 비로소 세상에 다시 나온 김형선이었다. 

8년 징역을 살고 난 뒤에 오히려 전향을 아니 한 죄로 다시 예방구금(豫防拘禁)에 걸려 그대로 감옥 속에 파묻혀 있기 6년 만에 해방과 함께 옥중생활이 끝나는 지독한 운명을 출발하는 소식이 이 신문 기사였다. 

(118-1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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