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영이야기 - 006
동전 오기영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집필한 글들을 엮어서 전집을 만들었다. 그의 문필활동의 기록이자, 시대의 증언을 한 자리에 모았다.
그가 기자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1920년대 후반 이래 그의 기사와 칼럼은 때로는 사건에 대한 요령 있고 정밀한 기록으로, 때로는 사태의 추이를 전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는 역사적 투시와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 때로는 현실에 대한 시의적절한 풍자와 건설적 대안으로 당대인의 사랑을 받았고, 후대인에게는 당대사를 증언하는 중요한 사료로 주목을 받았다. 그는 후배 기자들에게는 본받아야 할 선배였고, 기자 사회 전체적으로 ‘신문계의 일재’(逸才)라는 평가가 늘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의 글이 가진 중요성이 다시 현대인의 주목을 받기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분단이 빚어낸 역사적 맹목성으로 인해 한국 사회에서는 극소수의 전문 연구자만이 그의 글을 우연적으로 접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의 글이 다시 학계와 독서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데에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지구적 차원의 냉전 해체라는 역사적 변화가 중요하게 작용했지만 그간 역사학계와 문학계의 학문적 온축도 한몫했다. 한국 근·현대 역사와 문학에 대한 연구가 양적으로 확대되고 질적으로 심화하면서 연구자들의 자료 탐사 범위와 해독의 깊이가 넓어지고 깊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동전의 글이 가진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동전의 글을 매개로 한 학계의 연구와 조부의 족적을 찾으려는 외손녀의 노력이 시기적으로 겹쳤고, 그것들이 합쳐져서 해방 직후 출간된 그의 책들이 2002년에 복간될 수 있었다.
이 전집은 해방 직후 출간된 <사슬이 풀린 뒤>, <민족의 비원>, <자유조국을 위하여>, <삼면불> 네 권의 책을 출간 당시의 체제에 따라 각권으로 복원하고, 거기에다 해방 직후 동전이 쓴 글들 가운데 네 권의 책에 미처 수록하지 못한 것들을 모아서 함께 묶었다. 또 동전이 일제강점기에 신문, 잡지에 집필한 글들 역시 수집해서 따로 두 권의 책으로 엮었다. 부록은 그의 연보, 집필 원고, 후대 연구자들의 연구논문 목록에다 그의 형 오기만, 매제 강기보, 그리고 동생 오기옥의 흔적을 추려서 실었다. 어느 분이나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자신의 몸을 바쳤다.
역사 자료의 전산화 덕분에 동전이 신문이나 잡지에 쓴 글들을 책상머리에서 별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가 식민지기에 집필한 글들을 모두 모아서 책으로 엮어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식민지기에 집필한 글들을 새로 발굴하고 수집, 정리하여 한자리에 모아낸 것은 이 전집이 처음이고, 향후 학계의 유용한 자산이 될 것이다. 해방 직후 그가 쓴 글들을 읽을 때마다 삶의 현장에 대한 생동감 있는 이해와 당시 사회에 대한 투철한 현실 인식, 깊이 있는 역사의식과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해박한 지식, 나름의 뚜렷한 문제의식과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실천적 지향이 어디서부터 비롯되고, 또 어떻게 마련될 수 있었는지 늘 궁금했다. 동전이 해방 이전에 썼던 글들을 읽으면서 궁금증의 일단을 해소할 수 있어서 시종 즐겁게 편찬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이 전집에 실린 동전의 글을 시간 순으로 늘어놓고 보니 그의 첫 번째 글은 공교롭게도 한 편의 시다. 그가 열다섯 살 나던 해에 지어서 동아일보에 실은 '꽃 잃은 나비'라는 시는 나라 빼앗긴 한 소년의 절절한 조국애를 드러낸다. 학력도 변변치 않은데 약관의 나이에 동아일보 정식 기자로 평양에 부임하여 기자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은 그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주위로부터 남다른 취재 능력과 문재(文才)를 인정받았다는 증거다. 식민지기에 쓴 그의 글을 읽을 때에는 그가 기자생활의 대부분을 평양에서 했고, 또 평양의 민족운동계, 사회운동계와 깊이 교류하면서 기사와 칼럼을 쏟아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또 기자생활 초반에 해당하는 1920년대 후반기와 1930년대 전반기에 다수의 현장보고(르포)를 장기간 연재한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문마다 사회부 기자들이 꽤 많이 포진했지만 그처럼 정력적으로 현장보고를 통해서 심층취재를 여러 건 수행한 기자를 쉽게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평양은 일제의 식민지배 하에서도 조선인 상공업이 비교적 발달했던 지역이고, 민족운동의 본산 중 하나였다. 동시에 다른 어느 지역보다 사회운동이 활발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그는 그곳에서 조선인 상공업자와 노동자들이 부딪힌 현실을 현장에서 체험할 수 있었다. 또 민족주의 지도자들과 교류할 수 있었으며, 평양의 사회운동계와 항일 혁명가로서 활동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애쓰던 그의 형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현장 중심의 심층취재를 기초로 르포 형식의 연재에 치중하거나 칼럼 집필에 열심이었던 것은 자신의 관찰과 체험에 의지해서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맞는 새로운 사회적 대안을 만들어 가려는 그 나름의 노력을 보여준 것이다.
동전이 사회부 기자로서 식민지기를 증언했다면 해방 이후에는 평론가의 입장에서 ‘해방’과 미·소 양군의 ‘분할점령’이 가져온 조국의 현실을 증언했다. 그가 경전(京電)에서 일한 것이 단순히 생활의 방편을 쫓아서 그리 한 것은 아닐 테고, 해방된 조국의 현실에 대한 그 나름의 대응이자 고민 끝의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뼛속 깊이 ‘글쟁이’이자 ‘신문쟁이’였다. 결국 ‘투필’(投筆)에 실패하고 해방 이후의 정치적 격변과 경제적 혼란, 사회적 난맥상을 그만의 시각과 관점으로 정리해 나갔다.
당시 발간된 그의 책 네 권 가운데 <민족의 비원>은 1946년 1월에서 1947년 5월 사이에 신문과 잡지에 기고한 주로 정치 분야 칼럼을 모은 것이고, <자유조국을 위하여>는 1947년 5월에서 1948년 4월 사이에 기고한 주로 정치, 국제정세 분야 평론을 모은 것이다. <삼면불>은 1946년 7월에서 1948년 3월 사이에 작성한 주로 사회 분야 칼럼들을 모아서 간행한 것이다. 이 세 권의 평론집은 시기별 현안에 따라 그때그때 작성된 칼럼들을 주제별로 분류한 형식을 취했고, 각각의 칼럼은 대체로 사안의 성격과 추이에 대한 정리, 원인에 대한 진단과 결과의 예측, 대안의 제시와 제언을 담고 있다. 해방 직후의 급박한 정세 변화를 기자의 짧고 가파른 호흡이 아니라 평론가의 냉철한 눈과 긴 호흡으로 되짚으면서 나름의 대안을 모색한 셈이다. 현장 취재로부터 한 발 물러나자 정세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비판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긴 안목으로 난마와 같이 얽힌 현실 정치를 전망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식민지기의 글들이 평양이라는 지역사회에 응축된 민족의 현실을 위주로 했다면, 해방 이후 쓴 평론들은 당시 한국 사회가 당면한 각종 현안 외에 외군 점령에 반영된 국제정세의 변화까지 면밀히 추적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한편 한편의 글마다 그의 예리한 관찰력과 비판적 안목, 사안의 심층을 깊숙이 파고 드는 직관과 치밀한 탐구 과정을 보여준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인데 그렇게 많은 혁명가들이 일제에 맞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분투했지만 그들이 남긴 기록, 또는 그들에 대한 당대인의 기록이 흔치 않다. 동전이 1946년 3월부터 잡지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서 출간한 <사슬이 풀린 뒤>는 항일 혁명가로서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헌신하다 옥살이 후유증으로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그의 형 오기만, 그리고 그와 고통을 함께 나누었던 가족들에 대한 기록이다. 형과 형이 가는 길을 응원하며 보살폈던 그의 어머니와 아내에게 부치는 헌사이자 그들에 대한 필자의 회억(回憶)의 글이다.
흥미 있게도 동전은 그의 행적과 사회적 관심사는 물론 그의 주변사와 개인적 관심에 대한 소회나 그가 그린 행적이 가진 개인사적 의미, 또는 그의 사색의 편린들을 책이나 칼럼의 형식으로 여러 군데에 남겨 놓았다. <사슬이 풀린 뒤>가 대표적이고, 그 외에도 신상에 변화가 있을 때마다 간헐적으로 칼럼을 통해 그러한 변화를 대상화시켜 풀어놓거나 변화를 맞이하는 주관적 감상을 그대로 술회하고 있다. 기자라면 좀처럼 잘 쓰지 않는 서술 전략이다. 의도적으로 그런 글을 남긴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어쨌거나 나름대로 그의 생각과 활동을 객관화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이고, 그의 행적을 추적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시간 순으로 이 전집에 실린 동전의 마지막 칼럼은 '미소 인민에게 보내는 공개장'이다. 상징적이게도 나라의 독립을 희원하는 열다섯 살 소년의 각오를 형상화한 시로부터 시작된 전집이 이제 그 소년이 갓 불혹을 넘긴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 두 쪽이 된 조국과 민족을 어떡하든지 이어보기 위해 외국의 인민에게 보내는 절절한 호소로 끝을 맺는 셈이다. 이 전집은 동전이 살아생전 썼던 모든 글을 집대성한 ‘전집’을 목표로 하였으나 그 목표를 미처 이루지 못한 채 그의 북행 이전의 글들을 집대성하는 데 그쳤다. 아직 동전이 돌아가신 해조차 확정하지 못하고 서둘러 그의 저작집을 상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걸머진 분단의 짐과 무게를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고, 남은 족적을 쫓아 그의 문필활동의 기록을 마무리할 수 있는 방도도 없었다. 백 번째 맞이하는 3·1운동이 민족의 통일을 재촉하는 화신(花信)이 되기를 빌고, 또 그가 북행 이후 쓴 글들도 모두 모아서 전집을 마무리 할 수 있는 날이 하루 속히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외손녀 김민형 교수가 책과 자료 보따리를 들고 처음 내 연구실을 찾은 것이 기록적인 더위가 온 나라를 달구던 작년 7월이었다. 그로부터 세 차례 계절의 변화를 겪은 뒤 원고를 상재하게 되었다. 동전과 대화를 나누는 심정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이 작업에 동참하여 전집이 나오기까지 자료의 발굴과 수집, 자료 정리와 원고 정서, 해제 작성, 목록과 연보의 정리, 도판 편집은 물론 교정과 편집 실무에 이르기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은 편찬위원들 한 분 한 분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편찬위원들 모두 보람을 느끼며 작업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따님과 손녀 등 가족의 배려와 응원이 없었다면 작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기나긴 기다림, 그리움의 나날과 달래기 어려운 아쉬움을 어찌 몇 쪽의 글월로 다 담아낼 수 있을까마는 전집 발간에 즈음하여 두 분이 세대를 달리하는 표현 방식으로 그간의 소회를 담아주었다. 일찍이 동전의 글이 가진 사학사적 중요성을 알아채고 그의 글을 학계에 소개하고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해 주신 강만길, 서중석 두 분 원로선생님께서 마음에서 우러나는 글로 전집 발간을 축하해주셨다. 전집 출간에 관심을 가지고 성원해준 모든 분께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비록 미완의 전집이지만 홀가분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동전에게 발간 소식을 전해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