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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un 03. 2019

“모든 위대함은 질문하는 데서 비롯된다!”

[이 글은 <개벽신문> 제84호(2019.5)에 게재된 글입니다.]


강연 : 최 진 석 |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건명원 초대원장 / 기록 정리 박길수 (본지 주간)


[편집실 주] 이 글은 제18차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대학중점연구소 콜로키움의 강연 내용을 기자가 녹취 정리한 것입니다. 콜로키움은 “한국 인문학의 과제: 개벽을 향하여”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는데, 강연이 끝나고 강연만큼이나 뜨거운 ‘질문’과 ‘재질문’이 오고갔습니다만, 이 글에서는 강연 내용만을 수록하였습니다.(질문은 다음 호에) 문책은 기자에게 있습니다.


철학은 내 문제를 붙잡고 씨름하는 것


오늘 발표 주제는 ‘학’ ‘인문+학’ ‘한국’ ‘개벽’ 등의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모두가 책 한 권이 나올 주제입니다. 차근차근 풀어나가 봅시다.


먼저, 제가 이 자리에서 오늘의 주제인 ‘동학-개벽’에 대한 관심에 불을 지핀 사건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서강대에 근무하게 된 지 3년쯤 지났을 때 일입니다. 공적인 지원을 받아서, 한국의 철학과 학문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국제 학술대회 실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의견을 내기를, 한국의 사상과 철학을 국제화하는 것이니, 우리 고유의 사상체계인 동학을 주제로 하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선배들은 “그것은 철학이 아니잖아!”라고 해서, 그것을 주제로 하지 못하고 주자학을 주제로 하는 학술회의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로서는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게 참 보통일이 아니라는 반성과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오게 된 것은 제자인 조성환 박사(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의 ‘부름’을 받아서인데, 조성환 박사는 일본에서 공부 잘 하고 있던 중에 제 강권으로 한국에 돌아와서 한국학을 전공하고, ‘한국의 천관’으로 박사학위를 했습니다[<천학天學에서 천교天敎로: 퇴계에서 동학으로 천관(天觀)의 전환>]. 한마디로 조 박사는 한국의 사상을 철학화하고 알리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어떤 면에서는 수십 년 전의 저의 문제의식을 실제로 해결해 나가는 도정(道程)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좀 빠르기는 하지만, 오늘 강연의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자면, 저는 그것을 ‘인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답을 하고 싶은데, “인문학, 철학, 사상은 보편으로 승화된 철학의 결과물을 내면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문제(의식)를 보편의 높이로 승화하는 것이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즉, “자기 삶을 철학화하는 것이 곧 철학이다.”라는 것이 오늘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남들이 다 좋다고 하는 것을 외우고 내면화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문제를 붙잡고 씨름하는 것이 철학”이라는 말입니다.

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질문하는 것이 인문학이다’라는 의미에서 나는 “한국에서는 아직 인문학이 시작되지 않았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무슨 말인가? 그 반문에 답하기에 앞서서, 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인문학도 하나의 ‘학(學)’입니다. 학은 모두가 기호, 부호, 관념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기호, 부호, 관념이 우리가 말하는 지식, 이론들입니다. 그러므로 “왜 학(문), 인문학을 하는가?” 라는 물음은 “왜 인간은 지식, 즉 이론을 정립하려 하는가?” 라는 물음으로 심화됩니다. 


사례를 들어 얘기해 보겠습니다. 세계적으로 고고학이 발전한 나라는 영국을 위시해서 일본, 중국, 독일, 프랑스, 미국 등입니다. 제국이었거나 제국을 추구한 나라들입니다. 그중에서도 일반적으로 고고학은 영국이 제일 발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영국에 고고학적 유물이 이 세계에서 제일 많은가? 아닐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이집트가 아닐까요? 우리가 주목할 것은 고고학 유물을 생산한 나라보다 고고학이 발달된 나라가 더 부강한 나라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실제의 고고학 유물과 학문으로서의 고고학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유물은 보이고 만져집니다. 반면에 ‘학’은 보거나 만질 수 없습니다. 이처럼 지식은 그 자체로는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세계를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추상화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삶 속에서 눈에 보고 만져지는 사물을 갖는 것보다, 그것을 설명하는 능력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고 더 부강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구체적이고 물성적인 것을 갖는 것보다, 그것을 설명하는 능력, 즉 학문이나 사람을 갖는 것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설명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 중에서는 더 잘 설명하는 사람이 더 높아지고, 더 잘 설명하는 사람 중에서도 설명 자체의 원리나 법칙을 가진 사람이 더 높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계를 더 효율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 원리나 법칙이며, 그 원리나 법칙에 따라 이 세계를 설명해 놓은 관념, 부호, 기호, 장치가 ‘지식’입니다.

 

우리는 왜 더 ‘높은 지식’을 추구하는가?


특정한 대상에 대한 정보, 대상을 설명하는 것은 모두 지식입니다. 그리고 이 지식이 특정한 방법론으로 묶여 있는 것이 ‘학’(學)입니다. 물리학은 물리학자들이 사용하는 방법론에 따라 대상을 묶어 놓은 체계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과학이란 과학적 방법, 철학이란 철학적 방법과 대상으로 묶은 것입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그러면 지식에는 높은 지식과 낮은 지식이 있는가 ?”하는 물음이 따라 나옵니다. 그리고 “왜 우리는 더 높은 지식을 가지려고 하느냐?”라는 물음도 더불어 따라옵니다.


가령, 더하기 빼기 문제와 같은 초보적인 지식과 1차방정식을 비교해 보면, 방정식이 훨씬 많은 경우에 두루 그리고 높게 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1차방정식보다는 3차방정식이 더 높은 정보를 다룬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지식이 높다’고 제가 표현한 것은 ‘높은 지식’일수록 “현실에 대한 통제력이 더 크다”는 뜻입니다. 다르게는 “적용 범위가 더 넓다”거나 “영향력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높은 단계의 지식은 커다란 영향력과 통제력을 발휘합니다. 낮은 단계의 지식은 작은 영향력과 통제력만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초등학교에서 중-고-대의 상급 학교로 올라가는 것은 더 높은 단계의 지식을 추구하기 위해서입니다. 높은 단계의 시선으로 이 세계의 진리와 삶의 원리를 추구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계와 사회에 대하여 큰 영향력과 통제력을 갖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학’과 ‘학’ 사이에도 위계가 있다


다음 단계로, 인문학은 여러 지식 체계 가운데 어떤 높이에 있는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에 앞서 “지식에 정말 높낮이가 있는가?”를 질문할 수 있겠는데, 이에 대해서는 ‘있다’는 결론만 말씀 드립니다. 그게 제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그 지식의 뭉치인 학(學)과 학(學) 사이에도 높낮이가 있습니다. 이런 조건을 염두에 두고, 인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인간이 사는 세계는 “인간이 만든 덩어리”와 “인간이 안 만든 덩어리”, 이 두 종류의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간 세계는 이 두 덩어리 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중에서 인간이 안 만든 것은 저절로 돌아갑니다. 이것을 ‘자연’(自然)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만든 덩어리는 ‘문명’(文明)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쓰는 말 중에 문(文) 자가 들어간 것은 모두 인간이 만든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이 직면하는 세계는 문명과 자연밖에 없습니다.


다음으로, 인간은 이 세계를 이해하고 관리하고 통제하는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반론이 나올 수 있는데, 제 결론은 “인간의 세계에서는 그렇다”라는 점만 강조하고 계속하겠습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더 효율적인 방법을 계속해서 만들어냅니다. 그 가운데 가장 고효율적인 방법이 지금까지 말한 ‘지식’이라고 부르는 체계입니다. 그래서 지식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인간의 지식은 “문명에 대한 지식”과 “자연에 대한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문명지식과 자연지식, 지식 사이의 층위


여러분에게 익숙한 용어로 다시 풀어서 말씀드리면, 이른바 넓은 의미의 이과(理科)에 속하는 지식은 인간이 안 만든 것, 즉 자연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지식이고, 넓은 의미의 문과(文科)에 속하는 지식은 인간이 만든 것, 즉 문명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지식입니다. 앞에서 ‘높은 지식’을 추구하는 것은 “높은 단계의 시선으로 이 세계의 진리와 삶의 원리를 추구하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계와 사회에 대해 커다란 영향력과 통제력을 갖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원리를 추구하고 더 높고 더 큰 영향력과 통제력을 추구하는 것은 왜인가? 한마디로 안정적인 생존을 위해서입니다. 안정적인 생존을 위한 영향력과 통제력을 발휘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지식입니다. 자연에 관한 지식과 학(學)은 다시 두 덩어리로 나누어집니다. 제 식으로 말하면 ‘귀족학문’과 ‘안 귀족학문’입니다. 귀족학문은 지식(앎)의 방향, 메시지, 원리, 규칙, 원칙을 만드는 것으로, 이것을 이학(理學)이라고 합니다. ‘안 귀족학문’은 이것들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것으로, 이것을 공학(工學)이라고 합니다. 문명에 관한 지식과 학(學)도 다시 두 덩어리로 나누어집니다. 귀족학문은 인문학(人文學)이라고 하고, ‘안 귀족학문’은 사회과학(社會科學)이라고 합니다.


자연에 관한 인간의 설명 방식[學] 가운데 ‘가장 높은 단계’의 것은 수학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수학은 가장 고도로 추상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은 수학적 지식이나 체계가 없으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수학은 다른 어떤 하위 학문 없이도 전개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 원리로 인문학에서는 철학이 최상위의 학문이고, 그다음으로 문학, 사학 순으로 자리매김 됩니다. 같은 원리로 사회과학은 경제학, 정치학, 법학 순으로 자리매김 됩니다. 이렇게 하면, 인문학 가운데 철학이 최고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유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원을 생각해 봅시다. 원은 실재하는가? 여러분은 머릿속으로 원의 형상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원 그 자체가 아니라 ‘원 모양’, ‘원의 형상’입니다. 직선, 곡선도 마찬가지고, 돌이나 나무 같은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그 모양이나 구체적인 사물일 뿐, 그 이름이 지칭하는 존재 자체는 아닙니다. 그 존재성은 우리의 머릿속에만 있습니다. 도형을 다루는 학문을 기하학이라고 하는데, ‘기하(幾何)’란 ‘거의 어떤 것’이라는 뜻입니다. ‘거의 어떤 것’이라는 말은 ‘그것 자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하학이든 수리학이든 구체적으로 묘사하거나 구성적으로 보여주는 일이 아직도 가능한 것이 수학입니다. 철학은 철학 안의 어떤 것도 동작이나 모양으로 나타낼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철학이 수학보다 더 추상화된 학(學)입니다. 수학이 자연학 가운데 최고의 학(學)이라면, 철학은 인문학 가운데 최고의 학(學)인데, 수학과 철학 중에서도 철학이 더 상위의 학이라는 말입니다.

지식 사이의 위계는 추상화 정도로 결정


앞에서 더하기 빼기보다 3차방정식이 ‘더 높다’고 한 것은 그것이 더 추상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 인간의 매우 독특하면서 기발한 능력이 바로 추상 능력입니다. 초-중-고-대의 차이는 추상 정도의 차이라고 단순화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누가 이 추상을 더 높은 데까지 하느냐가 그의 통제력과 영향력의 크기를 결정함을 알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추상 능력입니다. 학문의 높낮이도 추상의 정도로 결정합니다. 다시 말해 추상 능력이 통제력과 영향력 정도를 결정하는 궁극적 관건입니다.


이런 기준으로 물리학과 경제학의 차이를 예로 들어 보면 이렇습니다. 약 80명에 이르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중에서 5명이 물리학자입니다. 즉 물리학자는 경제학상을 받을 수 있는 역량, 그 분야를 연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경제학은 물리학에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당연히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경제학자는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경제학은 수학을 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습니다. 경제학보다 수학이 더 추상화된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수학이 추상화 정도에 있어 최상위 포식자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나는 “지식을 다루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효율적이고 높은 통제력을 발휘하는 길인가? 아니면 “특정한 학문을 하는 사람이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러한가? 지금까지 제 강의를 잘 따라왔다면, “지식을 다루는 사람”이 더 높은 단계를 지향하고 차지한다고 바로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식을 다룬다고 생각하면 경제학을 하면서도 물리학을 할 수 있습니다. 특정한 학문을 한다고 생각하면 경제학을 하면서 물리학을 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중요한 학문 방법이자 태도로 거론되는 통섭이나 융합도 특정 학문에 자의식이 너무 강하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선언적으로 얘기하면, 지식을 다루는 것보다 더 크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려면 “세계를 설명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세계를 설명하는 사람보다 더 크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려면 “생존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왜 지금 인문학이 유행하는가?


최근에 인문학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인문학이 중요하기 때문에? 인문학은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중요했습니다. 다른 이유가 필요합니다. 우리나라도 이제 국민소득 3만불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한마디로 물적 토대를 어느 정도 구축했습니다. 이 시점에 인문학이 유행하는 이유는 이제 물적인 추구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인문학적 높이의 시선, 인문적 높이에서 세상을 다룰 필요성이 절실해졌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예로든 “세계적으로 고고학이 발달한 나라”는 하나같이 제국을 꿈꾸거나 운영해 본 나라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인류학이나 언어학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제국과 학문 사이에 모종의 인과관계가 있음을 짐작케 합니다. 제국을 이루려면 제국을 이룰만한 영향력과 통제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 기본이 바로 지식과 이론입니다.


어느 나라든 발전 초기에는 나라 운영에 긴요한 통찰력(insight)이 법학이나 정치학에서 나옵니다. 법학이나 정치학이 주도권을 가집니다. 이런 초기 단계가 지나서 국가나 사회적 자본이 커지고 다양해지면, 법학이나 정치학만으로는 제어되지 않습니다. 이때쯤에는 경제학, 경영학, 사회학 등의 주도권이 커집니다.


이런 학문의 성장에 힘입어 사회가 더 성장하고 다양화되면, 다시 한 단계를 상승하여 철학, 심리학, 예술 등의 시선, 다시 말해 한층 더 높은 추상능력을 필요로 하는 학문 분야가 주도권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인문학입니다. 이렇게 인문학이 주도하여 발전하는 사회를 선진국이라고 합니다. 우리 사회가, 그리고 현대 한국인들이 인문학에 목말라 하는 까닭은, 바로 우리 사회가 이제 선진국으로 도약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진국 단계의 임계점, 막바지에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학문들이 선진국 여부와 관련되는가? 상상력이나 창의성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상상력과 창의성은 문제를 포착하고 개념화하는 능력과 관련됩니다. 상상력과 창의성이 선진국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우리나라 CEO는 대개 경제경영 전공자입니다. 하지만《 USA TODAY》라는 신문의 조사에 의하면, 미국 상위 1000개 기업의 CEO 중에서 경제경영 전공자는 3분의 1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머지는 인문학 전공자입니다. 우리 사회가 인문학을 요구한다는 것은 중진국을 지나서 선진적 높이로 상승해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입니다. 이것은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문적 시선이 선도적 시선이다”라는 사실을 동의하고 절감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선도적 시선이 우리 삶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변화를 야기하는 사람, 결과를 소비하는 사람


지금까지 인간-자연-문명 사이의 상관관계와 그 사이에서 인간의 지적 활동의 중요성과 위치, 그리고 그 귀결로서 인문학의 위상과 위계를 이야기했습니다. 지금부터 이야기를 좀 더 심화시켜 보겠습니다. 문명을 만드는 인간의 활동을 ‘문화’라고 합니다. ‘문’(文, 紋)은 “무엇인가를 만든다”는 것이고, ‘화’(化)는 “변화를 야기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문화’란 “무언가를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가장 원초적인 의미에서 문화적 존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조작하는 동물입니다. 조작의 결과는 인공(人工)입니다. 인간에게는 인공이 좋은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인간은 자연에 이끌리고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갈구하는 존재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으로부터 이탈한 존재, 즉 ‘성인’이라면 순수 자연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자연이 대부분의 인간에게 의미 있는 것은 인간다움을 벗어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공을 극단적으로 세련화해서 원래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인간화된 자연’입니다. 인간의 자연 지향은 인공적 활동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적인 것을 극단적으로 세련화해서 자연적인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을 좋아하는 성향입니다.


예술이 아름다운 것은 인공이기 때문입니다. 떠오르는 태양은 예술이 아닙니다. 내가 그린 못 생긴 태양이 오히려 더 예술이고, 거기에서 인간적인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때 태양은 인간의 손이 가해진 변화를 거친 태양이자 인간화된 자연입니다. 제가 노자철학을 30년 전공한 사람인데, 노자철학의 정수라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은 자연에 순응하는 가치를 가르친다고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노자가 인위적인 것을 배제하는 삶을 가르친다는 것이지요. 다 거짓말입니다. 노자가 지향하는 무위도 결국은 인위의 한 형태입니다. 무위도 인위요, 유위도 인위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무언가를 행위 해서 변화를 야기하는 존재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격이 달라집니다. 누군가는 무언가를 해서 변화를 야기하는 일을 하고, 누군가는 그 결과를 수용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무언가를 해서 변화를 야기하는 것”을 “자유롭다, 독립적이다, 주체적이다, 창의적이다, 인간적이다”라고 말하며, 단지 “변화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을 ‘종속적’이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인간이 문화적 존재라고 정의하는 순간, 인간에 대한 이해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인간은 “변화를 야기하는 인간”과 “변화된 결과를 받아들이는 인간”으로 크게 나뉘어집니다. 변화를 야기하는 인간이 주도하는 나라가 선진국이고, 남이 창조한 결과를 받아들여 향유하는데 머물러 있는 나라는 중진국 이하의 단계입니다. 지금 한국에서 인문학 열풍이 부는 현상의 이면에는 우리나라가 한반도에 자리 잡은 이래 최초로 선진국으로 진입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기회, 갈림길 앞에서 고뇌하는 당대인의 고민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따라하는 문명의 단계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이룩한 것들 가운데 창의적이고 변화를 야기해서 얻은 것이 없지는 않지만, 그런 것이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 주된 요소가 되지 못하고, 남이 해 놓은 것을 따라하고 베끼고 향유하는 경향이 여전히 우리 사회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국 인문학의 현주소와 앞으로 가야 할 길


구체적인 예를 들면, 우리가 지금 쓰는 물건 가운데 우리가 만들기 시작한 것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한글 이외에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제가 다른 자리에서 이 질문을 던졌더니 어떤 분이 “이태리 타올요!’라고 대답하시던데(웃음), 맞는 말이지만 문명의 단계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지요. 그밖에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아직은 없습니다. 다른 말로 우리는 아직 독립적이고 자유로우며 창의적인 문화 활동을 해 본 적이 없다고 할 수 있고, 인문적 단계에 도달해 본 적이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는 것은 이제 우리가 그런 세계를 염두에 둘 만큼은 성숙했다는 것, 그 가능성을 느끼는 단계에 와 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지금 단계에서 한국 인문학의 과제는 인문학을 인문학답게 시작하는 일입니다. 종래와 같은 인문학적 과제와 성과를 답습하고 추수하는 것은 거꾸로 가는 일입니다. 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문명을 만들거나 제도를 만들 때, 가장 근본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바로 ‘생각’입니다. 우주선도 ‘생각’이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으로 만들어 본 것이 없다”는 말은 “생각한 적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 왔다”는 말입니다. “평생 아무 생각 없이 산다,” “우리는 아직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이렇게 말해도 됩니다. 무서운 말이고 큰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화를 벌컥 내겠지만, 그럴 일이 아닙니다.


거룩한 자여, 그대 이름은 질문!


그렇다면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과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다릅니다. 인문학을 하려면 “생각을 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철학’이 등장합니다. 지적인 활동은 생각을 하는데 가장 효율적인 양식입니다. “생각이 없다”는 것은 “지식을 만든 적이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아직 지식 수입국이지 지식 생산국이 아닙니다.


지식을 수입해서 하는 활동은 “대답하는 일”입니다. 생각이 있어서 하는 대표적인 활동은 “질문하는 일”입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새로운 것, 위대한 것, 앞선 것 중에서 대답의 결과로 나온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질문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이 기독교 만든 일, 마호메트가 이슬람 만든 일, 싯다르타가 불교를 창도한 일은 모두 질문의 소산이다. 원불교 역시 소태산의 질문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답한 사람이 아니라 질문한 사람입니다. 소태산 역시 대답한 분이 아니라 질문한 분입니다.


이쯤에서 종교 지도자에게 배워야 할 것이 분명해집니다. 소태산이 그 현실 속에서 어떤 질문을 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얽매이지 말고, 지금의 이 현실 속에서 나는 무슨 질문을 할 것인가로 생각을 돌려야 합니다. 소태산이 질문한 과정에서 나온 대답들을 헤집고 숙지해 나가면서 나 역시 내 질문을 찾고, 내 질문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아니라 소태산 대종사만을 바라보고 모시는 것으로 원불교를 제대로 신앙한다고 생각하면 과연 소태산이 좋아하실까요?


모든 위대한 일들, 거룩한 가르침은 다 “대답하라”고 가르치지 않고 “질문하라”고 가르칩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을 외우고 숙지하면서 질문에 참여한다고 생각하고 착각하는 것이 대다수 범인들의 형편이고, 종교인들도 그런 경우가 태반입니다. 대답 중심의 사고에서는 이미 있는 지식과 이론들을 누가 더 많이, 빨리, 원래대로 뱉어 내는가를 중시합니다. 그것의 궁극적인 도달점은 근본주의입니다. 근본주의란 원래 모습에 집착하는 것, 원래 모습을 최고 권위의 근거로 내세워서 군림하고 억압하고 배척하는 태도입니다.

대답은 소비·소모하는 것, 질문은 생산·창조하는 것


그러나 정작 대답만으로는 어떤 인공도, 문화적 활동도 시작되지 못합니다. 대답은 모든 문화적 활동의 결과를 다루는 것입니다. 대답은 질문을 소비하는 것이자, 탄생(질문)으로부터 사망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 위대함의 출발은 질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인간이 문화적 존재라는 말은 인간은 질문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앞에서 말한 “변화를 야기한다”는 것은 “질문하는 단계”를 말합니다. 종속되고 수용하는 것은 “대답하는 단계”입니다.


질문은 궁금증과 호기심이 안에 머물지 못하고 밖으로 튀어 나오는 일입니다. 궁금증과 호기심은 이 세계 어느 누구와도 공유되지 않는 것이며, 나에게만 있는 것이어서 유일하고, 그 자체로 독창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질문을 할 때 머뭇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 질문이 맞는 질문인지 모르겠지만...”이라는 단서를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질문의 정당성과 유효성에 대한 판단은 오직 질문하는 자에게만 주어진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질문할 때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합니다. 대답할 때 인간은 이미 있는 이론과 지식을 전달하는 중간역이자 통로로서의 존재로 전락합니다. 대답하는 주체는 자기로 존재하지 못하고 분열되어 있게 됩니다. 우리 각자가 추구해야 할, 되찾아야 할, 완성해야 할 우리의 모습은 질문하는 존재이자 독립적 주체로서의 나입니다.


잘된 종교서적은 인간에게 궁극적, 최종적 질문을 던지는 책입니다. 비단 종교서적만이 아니라, 책을 읽고 질문을 떠올리지 못하는 건, 책이 좋지 않거나, 아니면 내가 책을 제대로 읽지 못했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 중에서 가령 종교 서적은, "네가 너냐? 너는 누구냐? 너는 네 질문이 있느냐? 아니면 다른 사람의 궁금증을 대행하고 있느냐? 너는 네 꿈을 꾸고 있느냐? 너는 네 생각을 하느냐? 다른 사람의 생각의 결과를 다루느냐?" 등을 묻고 따집니다. 그 물음을 붙잡고 씨름하는 것이 종교 수행이고 신앙입니다.


질문하는 자라야 자유·독립·고귀한 존재


위의 궁극적인 질문들은 낭만적이고 한가한, 그저 종교적인 명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받아야 할 당연한 질문들입니다. 이 질문에서만 모든 위대함이 피어납니다. 그 위대함은 어느 특정 개인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본래 누구나 타고난 것이며, 예외적인 상태가 아니라 반드시 도달해야 할 본래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그 위대함을 구현하게 될 때에 비로소 나 개인의 자유가 시작됩니다. 비로소 독립적 삶이 시작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죽기 전까지 내가 완수해야 할 소명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이 제기되지 않는 어떤 행위도 위대해질 수 없습니다.


다시 ‘인문학’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봅시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유로 해서, 오늘날 한국에서 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그 해답을 스스로 찾아가는 길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 말은 내 말인가, 다른 사람의 말인가? 지금 내 꿈이 본래 내 꿈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꿈을 대신 꾸는 것인가? 이러한 원초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것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기되지 않고,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남의 생각의 결과를 내 생각인 것처럼 착각하고 내면화하는 것은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행하는 헛수고에 불과합니다.


‘나’의 고유함에서 감동이 나온다!


인간은 인공적 조작을 하는 동물이고, 인공적 조작의 최고 단계를 ‘예술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술이란 무엇인가? 훈련된 지성이라면, 예술품 앞에서 규칙적인 호흡과 맥박이 무너지며, 잘 유지되던 안정성과 균형이 깨집니다. 여기서 ‘훈련된 지성’이란 세계를 지적으로 다룰 수 있는 교육을 받아서 지성을 함양한 사람을 말합니다. 사람은 훈련되고 교육되어야 합니다. 훈련되지 않은 지성은 ‘이발소 그림’과 ‘고흐의 그림’조차 구분하지 못합니다. 아무튼 훈련된 지성이 그 불균형에 빠지는 이유는 예술품이 가지는 압도적인 위압감 때문입니다. 훈련된 감상자는 균형이 무너지고 불균형과 불안에 빠집니다. 우리는 이것을 ‘감동’이라고 말합니다.


감동은 기본적으로 예술품에서 비롯되어 불안정을 야기하는 에너지, 혹은 그 에너지의 폭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결과입니다. 예술품이 가진 이런 압도적인 힘의 출발점은 ‘의외성’입니다. 의외적이지 않으면서 예술품의 반열에 오른 것은 이 세상에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의외성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고유함에서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네가 너냐?”의 다른 버전은 “너의 고유함은 무엇이냐?” “너는 무엇으로 ‘너’라고 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예술품의 의외성은 바로 “내가 나다!”라는 외침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그 외침이

훈련된 지성을 무너뜨립니다. 감동을 야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고유함에 대한 집착이 없이는 위대해지기 어렵습니다.


인간은 문명적이고 문화적인 존재,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주체적인 존재라는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이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고유함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고유함은 위대함의 씨앗이 됩니다. 바르게 해서 잘할 수 있는 가능성보다, 다르게 해서 잘할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하다 못 해 장난을 해도 인문적 높이에서 다르게 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위대함은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고유함의 결과가 바로 위대함입니다.


철학 책 속에 철학 없고, 경전 속에 가르침 없네!


지금까지 이야기를 정리해 봅니다. 인간의 사유 가운데 가장 높은 단계의 사유를 철학이라고 부릅니다. 철학을 왜 하느냐? 가장 높은 단계의 통제력과 영향력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철학을 플라톤의<국가론>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나 니체의 이론인 줄 알거나, 공자, 맹자, 장자, 노자, 주자의 책에 쓰인 내용인 줄 알아 온 지가 참으로 오래되었습니다. 그것을 외우는 것을 철학이라고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최고의 수준’은 진짜로 ‘철학하기’에 의해 펼쳐지는 세계에 비하면 발바닥 높이에 불과합니다.


<국가><도덕경><장자>는 철학이 아닙니다. 활자로 굳어지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철학이 아닙니다. < 국가>가 철학이 아니라, 플라톤이 <국가>를 쓸 때 사용한 사유의 시선, 사유의 활동, 질문이 바로 철학입니다. <반야심경> 안에는 부처님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을 솥에 넣고 팔팔 끓이면 한 줄이 남습니다.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사라지니 이것 또한 사라진다.” 


부처님이 이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 세상 사람들은 “이것은 이것으로 존재하고, 저것은 저것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다해 이것이 사라지고, 저것이 다해 저것이 사라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것이 정말 그런가?” “그것이 왜 그런가?”를 질문하고, 질문한 끝에 그것은 허상이고 망상이며, 실상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으므로 이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신 것입니다. 부처님이 인류에게 비춘 빛은 “이것이 이것이고 저것이 저것이다”는 세계관에서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다”는 세계관으로 건너가는 행위가 깨달음이라는 점을 온몸으로 보여주신 데에 있습니다. 부처님의 행위는 한마디로 ‘건너가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의 최후 진언인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는 “건너가세 건너가세 저기로 건너가세!”입니다. 저기로 건너가는 행위, 그 도전이 부처님의 행위이자 가르침이자 깨달음의 요체입니다.

철학을 공부하지 말고 철학하라!


마찬가지로,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어떤 교리 속에 그 종교의 창시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종교가 태어나기 직전의 혁명적 사건에만 그 종교의 창시자와 창교 정신과 가르침의 고갱이가 있습니다. 그 찰나의 순간을 보아야 합니다. 건너가는 행위는 하지 않고, 건너가는 행위에 대해 설명한 말만 외우고 재설명하고, 그 설명의 진위를 따지는 것이 오늘날 종교의 기승전결입니다. 그것을 벗어나야 합니다. 그 동굴을 벗어나 광명의 세계로 나와야 합니다.


다시 인문학 이야기로 돌아와서, “인문적으로 산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완성된 인문적 이론을 내면화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기가 처한 상황, 그곳에서 자기 눈으로 발견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덤비는 인문적 활동으로 일상을 채우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강연의 주제와 관련해서 결론을 말씀드리면, “지금의 개벽이란 무엇인가? 지금 우리가 맞이해야 할 새 세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는 삶에서 질문하는 삶으로 건너가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론을 숙지하는 삶에서 문제에 빠져드는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역사에 대해 이해하고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으로 대단한 일을 했다는 망상을 갖는 태도에서 벗어나서, 자기가 직접 역사가 되려는 무모한 도전에 빠져드는 삶이야말로 우리 시대가 맞이해야 할 ‘ 개벽’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후속 - 질의와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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