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다시개벽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걸음 Jul 02. 2019

"모든 위대함은 질문하는 데서 비롯된다!! 2"

-질의와 응답 

[편집실 주] 이 글은 제18차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대학중점연구소 콜로키움에서 최진석 전 건명원 원장님이 강연 이후에 진행된 질의 응답 내용을 기자가 녹취 정리한 것입니다(<개벽신문> 제85호(2019.6.15) 게재). 콜로키움은 “한국 인문학의 과제: 개벽을 향하여”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는데, 강연 이후 ‘질문’과 ‘재질문’ 또한 강연만큼 뜨겁게 진행되었습니다. 문책은 기자에게 있습니다.


녹취/정리 : 박길수 (개벽신문 주간) 


<강연 내용>


<질의 응답>


사회(김봉곤) : 교수님의 강의가 매우 흥미진진하고 우리 마음에 많은 영감을 불러일으킨 것 같습니다. 이어서 질의응답 시간을 갖겠습니다.


OOO : 저는 영광에 있는 원불교 교역자 교육기관인 영산선학대학에서 국어와 한문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일찍이 교수님 책을 읽으면서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오늘 교수님 강의 중에서 특히 추상적 지식, 지식의 추상화 능력의 중요성에 대해서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제 질문은 예측 타당성에 관한 것입니다. 지식이 지식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은 예측 타당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관상>이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조선 최고의 관상가였지만 수양대군 편에 서지 않은 김내경에게 수양대군의 책사 한명회가 찾아와서 “당신은 조선 제일의 관상가로서 우리의 거사가 성공할 줄 몰랐단 말이오?”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김내경은 “당신들의 관상에 무슨 특별한 것이 있는 줄 아시오? 당신들은 다만 큰 파도를 탔을 뿐이오. 나는 작은 파도를 보았지만, 그 뒤에 오는 큰 바람을 읽지는 못했소.”라고 말합니다. 제 질문의 요지는 결국 학문의 경지는 파도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서 파도를 일으키는 큰 바람이 무엇인가를 보는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소태산 대종사가 위대한 점은, 그 바람을 이미 보시고, 그 시대에 대한 예측을 기반으로 이렇게 회상을 펼치켜서, 그 결과 100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원불교가 한국의 4대종교로 자리매김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남북통일과 관련하여 큰 바람이 불어오고 있는 것이 느껴집니다. 이에 대해서 교수님이 읽으신 더 큰 바람이나 징조가 있으시면 말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최진석 : 이건 상당히 조심스런 질문이어서 삼가는 마음으로, 그러나 에둘러 가지 않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소태산 대종사께서, ‘앞으로 이렇게 될 것이다’라고 미래를 예측하셔서 원불교를 창도하신 점이 위대하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소태산 대종사의 위대한 점은 그 시대에 발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물러서지 않고 덤비신 데 있다고 봅니다. 그 덕분에 지금의 위대함이 주어진 것이지, 이렇게 위대해질 것이라는 예측 타당성에 기반하여 움직이고 가르침을 편 것이 핵심은 아니라고 봅니다. 제가 함부로 말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보다 큰 바람을 예측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말씀을 하셨는데, 저는 예측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작은 걸 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위대한 사람과 평범한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위대한 사람은 남들이 보지 않는 것을 봅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뭐라고 하는가? 그것을 ‘조짐’이라고 합니다. 모든 변화에는 조짐이 있습니다. 연애를 하다가도 헤어지기 전에는 수십 가지 조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맹목으로 빠져 있는 사람은 그 조짐을 보지 못하는 거죠. 그러다가 어느 날 상대방이 헤어지자고 하면 “왜?” 하면서 절망에 빠집니다. 그러니까 그 조짐을 보는 감수성을 갖는 것이 중요하고, 그 조짐을 먼저 보았을 때 그것을 자기 문제로 생각하느냐 못 하느냐가 핵심이지, 그 조짐이 어떤 결과로 나타날 것인지를 예측하는 것이 위대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데 그 조짐을 보는 능력을 저는 ‘질문’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조짐을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자기 문제로 간주하느냐 안 하느냐, 그것을 자기문제로 생각하고 덤비는 사람을 불교에서는 ‘보살’이라고 합니

다. 이것이 첫 번째 핵심입니다.


그 다음으로, 어떤 이론을 받아들여서 사는 사람은 어떤 사안이 옳으냐 그르냐, 아니면 선이나 악이냐가 항상 중요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끌고 가는 사람은 옳으냐 그르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문제냐 아니냐를 중요시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들 중에 그것이 옳기 때문에 태어난 것은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은 문제이기 때문에 태어난 것들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문제를 해결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아직 선악이나 진위가 닿기 이전의 것입니다. 그런데 종속적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이미 있는 기준을 중심으로 옳으냐 그르냐를 따집니다. 대답에 익숙한 사람들은 원래 모습이냐 아니냐를 따집니다. 원래 모습은 시제로 하면 과거입니다.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인재들은 다 과거를 삽니다. 미래를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 인재들이 채우는 사회는 과거 논쟁으로 빠져 듭니다. 과거를 한 치의 티끌도 없이 정확히 해야 진실한 삶을 사는 것처럼 느끼도록 훈련되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신문을 펴 보면 미래 이야기는 하나도 없습니다. 왜 그런가? 과거를 기준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모습이 기준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그 기준에 맞으면 참이고 맞지 않으면 거짓입니다. 그 기준에 맞으면 선이고 맞지 않으면 악입니다.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사람들이 주도하는 사회는 거의 모든 논쟁이 진위 논쟁 아니면 선악논쟁입니다.


조성환 박사가 번역한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라는 책의 저자인 오구라 기조 교수도 “한국은 도덕적이지도 않으면서 도덕 지향적이다”라고 말합니다. 대답에 길들여진 사회는 도덕 지향적일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원래 모습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강의나 강연을 할 때 “질문하세요~”라고 하면, 질문하는 사람들이 먼저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게 맞는 질문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질문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고유한 것이고,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백점이에요. 그런데도 이렇게 말합니다. 질문에도 옳은 질문과 그른 질문이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영혼이 고정되어 버린 거예요. 질문은 궁금해서 하는 것인데, 어떻게 세상에 옳은 궁금증과 그른 궁금증이 있겠습니까? 저는 예측보다도 문제의 강을 건너가려는 도전 정신, 그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OOO : 예, 매우 공감되는 말씀입니다. 지금 교수님 말씀이 원불교하고도 통한다고 봅니다. 제가 티벳 불교 사원을 방문해서 수행 중인 한국인 스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여기서 무엇을 공부하고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이분이 “저는 지금 실체, 현실을 파악하는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저는 티벳 불교가 밀교라고 해서 무슨 호풍환우하는 대단한 주문 공부, 아주 신비적인 공부를 하는 줄 알았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을 바로 보는 공부를 하고 있다”는 답변이었습니다. 그것이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과거에 묶이지

말고 현재의 문제를 바라보고, 여기에 내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결정된다는 말씀과 일맥상통한다고 봅니다.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최진석 : 근대 이후 세계는 근대를 잘 겪은 서양은 주도권을 잡았고, 근대를 잘 겪지 못한 동양은 주도권을 잡지 못했습니다. 동양에서도 근대를 잘 겪은 일본이 가장 강성해졌고, 그 다음은 중국이고, 근대를 가장 잘 겪지 못한 우리나라는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인류가 근대라는 시기를 지나오면서 얻은 큰 교훈이 있습니다. 근대 이후 인간은 심리적 기대와 객관적 사실을 구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근대가 인류사에 남긴 덕목입니다. 근대를 내면화한 인재들은 무엇이든지 근거를 가지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심리적 기대와 객관적 사실을 혼돈하지 않습니다.


최근의 통일문제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저는 지금 남북 관계나 한미 관계가 우리의 심리적 기대치를 객관적 사실로 착각하고 행동하는 면은 없는지 반성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통일이나 평화로 가는 길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순간 이런 사안이야말로 확실한 근거에 입각해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제대로 가는 길이라는 겁니다. 이 문제를 직접 다루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관심을 갖고 참견하고 참여하는 사람들이 이런 태도로 임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과 기대를 혼동하지 않으려면 사태를 바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럽의 메디치 가문을 보러 많이 갑니다. 그곳을 다섯 번이나 다녀왔다는 부자도 마나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메디치 가문을 보고 오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왜 끝이냐? 저는 제대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으로 끝나 버린다고 생각합니다. 메디치 가문을 제대로 보았다면, 이런 생각이 반드시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내가 할 메디치 가문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런데 메디치 가문을 보고 왔다면서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들은 거기에 가서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인가? 그걸 우리는 ‘돈지랄’이라고 합니다(웃음). 돈만 쓰고 보지는 않은 것입니다. 


종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수행은 보라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상(相)을 갖지 말고 보라고 가르칩니다. 보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탁자 앞의 컵을 가리키며) 이것을 보십시오. 깊은 수양이 되지 않고는 이것을 볼 수 없습니다. 시선이 이 앞에까지 오다가, 자기가 원래 가지고 있는 관념을 가지고 미리 판단을 해 버립니다. ‘저것은 컵이야.’ 그리고 그 결론을 가지고 돌아가 버립니다. 본다는 것은 자기 시선이 이 컵에 직접 맞닿는 것입니다. 대개는 완전히 보기 전에 판단을 해 버립니다. 판단을 먼저 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 이상을 알 수 없게 됩니다. 그 이상을 넘어갈 수 없어요. 판단하는 것은 미리 멈추는 것입니다. 절에 가면 스님들이 상을 짓지 마십시오, 성불하십시오, 그 두 마디밖에 안 합니다. 그런데 그건 사실 같은 말입니다. 상을 짓는다는 것은 선입견을 갖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상을 짓지 않는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입니다. 상을 짓지 않고 보는 것은 내 전체가 관여하는 것이고, 판단하는 것은 나에게 있는 선입견이 먼저 작용하는 것입니다.


‘아바타’라는 영화를 보면, 아바타 족들이 “I love you”를 “I see you”라고 말합니다. “나는 당신을 본다”는 말은 “당신이 있는 그대로 내 인격에 도착합니다.” “내가 가진 선입견으로 당신을 재단하지 않습니다.” “나는 모든 선입견을 내려놓은 상태로 당신의 전체를 영접합니다.” 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메디치 가문을 갖다 와서 아무런 변화가 없는 사람은 그곳에서 판단을 하고 왔지, 보고 온 것이 아닙니다. 보지 않으니까 인격적인 변화가 없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18년을 강의했는데, 18년 동안 강의가 끝날 때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싼 돈을 내고 너희랑 내가 만났다. 이 강의를 통해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네 영혼에, 그리고 내 영혼에 어떤 변화도 없다면 우리는 거금을 매개로 사기극을 펼친 것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교리를 배우고, 업적이 있는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것이 종교생활을 하는 이유입니다. 그다음에 당신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물음에 대답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판단기계[몸뚱아리]’만 끌고서 왔다 갔다 한 것에 불과합니다. 보는 능력, 이것을 유지한다면 순간순간이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에서 수행이란 보는 능력을 예민하게 가다듬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든 종교 교화의 장에서든 이런 식의 작은 성공들을 스스로에게 경험시켜야 합니다. 메디치 가문에 다녀오면, 조그마한 성공을 흉내 내서 자기에게 경험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매일 매일이 새로 깨달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론을 다루는 사람들, 가령 철학을 다루거나 종교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연구에 빠져서, 마치 자기가 철학적 삶을 사는 것처럼, 종교적 삶을 사는 것처럼 착각에 빠지게 되면, 어느 순간에 알 수 없는 먼 곳에 스스로 유폐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순간순간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작은 승리들을 자기 자신에게 경험시켜야 합니다. 작은 승리를 경험시키는 일을 하지 않고, 그냥 이론과 원래 가진 생각들에 빠져서 높은 이론을 교환하는 것이 높은 경지를 교환하는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면 굉장히 위험해집니다.

감주영 : 저는 생명사상에 관심을 갖고 한살림에서 근무하면서,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 박맹수 교수님을 모시고 동학사상과 한국근현대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질문하라! 다르게 하라! 고요하라”고 하신 말씀이 가슴에 남았습니다. 특히 “질문을 던지고 무언가를 만들어서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 인간이다”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도 바른 방향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GMO, 유전자 조작 식품의 경우에는 인간이 자연에 변화를 가한 것입니다. 인간의 생존에 필요해서 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역으로 인간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GMO에 대한 연구 개발도 인위적으로 변화를 야기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즉 인간에게 해가 되는, 특히 인간의 생존과 안전에 해가 되는 것을 만드는 방향으로 변화를 야기하는 것에 대해서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최진석 : 우선 GMO(유전자조작식품)를 반대하는 분들은 그 위험성을 대단히 심각하게 보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과학적 발전 단계로 본다면, 현재의 GMO가 완성된 것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현 수준에서도 GMO가 인간에게 실제로 해가 되느냐 아니냐에 대해서도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건 일단 놔두고, 다시 한 차원 높여서 따져 보기로 하죠. GMO를 연구 개발하는 것도 인간의 행위이고 이것을 막는 것도 인간의 행위입니다. 이 행위 사이의 충돌이나 변증법적 통합 과정으로 인간의 문화적 역량이 커지게 됩니다. 그것이 인류가 발전해 온 역사의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설령 지금 단계에서 GMO가 해가 된다고 해서 그것을 최종적인 결론으로 삼고, 영원히 연구개발해서는 안 된다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가? 저는 그렇게 결정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이것이 인간에 해가 되지 않는 것으로 개발이 된다면, 인간에게는 엄청난 이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 안에서 생태계 교란의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만, 그 문제도 인간이 하나하나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즉 어떤 경우에도 지금 있는 어떤 상태를 변형시키는 인간의 행위들은 나쁘다고 보는 것을 저는 위험하다고 봅니다. 대상을 변화시키는 행위, 이것은 인간들이 아주 오랜 옛날부터 해 온 지극히 인간적인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이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부터 자연을 변형시키는 일을 해 왔습니다.


감주영 : 강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사라짐으로 이것이 사라진다”는 연기설을 말씀하셨는데, 그럼 이것이 이렇게 변화되니까 저것이 저렇게 변화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 변화되면 좋은데 나쁜 쪽으로 가면 안 좋게 되겠죠. 그래서 저는 무조건 건너가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 생명이 계속 유지되도록 하는 방향성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최진석 : 그 문제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가 GMO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깊이 생각하고 넓게 연구하지 못해서 충분한 답변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라는 점만은 공감하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이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고 창조를 모색하는 활동의 결과로 우리 생존의 질과 양이 좋아졌다고 하는 것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저의 일관된 입장입니다. 일단 수명이 늘어났고 환경이 좋아졌습니다. 아직 충분히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우리 생존의 질과 양을 증진시키는데 인공적 요인이 크게 기능했다는 점을 저는 긍정적으로 봅니다. 지금 있는 것을 손대면 안 된다고 하는 입장에 대해서는 저는 동의하지 않는 편입니다.


권도갑 : 오늘 말씀 가운데 “어떤 교리 속에도 종교의 창시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교수님의 유튜브 강의를 여러 번 들었는데, 닮아 가려고 하지 말고 자기 삶을 찾아가라는 것이 오늘도 중요한 메시지라고 생각됩니다. “지금의 개벽은 질문하는 것이다.”고 하는 말씀도 와 닿았습니다. “나는 왜 오늘 이 자리에 있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었고, 다시 한번 “왜 내가 출가를 했는가?” “나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돌이켜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도 살아오면서 소태산을 닮으려고 부단히 매달려 살아왔습니다. 이제와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니까, 지금의 후배들도 전부 그런 생각에 묻혀 지낸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학교나 교단이 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가 하고 안타까웠는데 오늘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나부터 시작해야겠다는 답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물음을 가지고 갈 때, 그것이 작은 성공을 발견해서 기쁨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한국사회에서 가족공동체의 아픔이 가장 큰 것이라고 보고 지난 15년 동안 가족이 화목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전념해 왔습니다. 그 일을 해 나가는 나의 태도, 교단(원불교)의 입장 등에 비추어 볼 때, 그래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가늠해 보는데 있어 오늘 이 자리가 참으로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가장 확실하게, 저에게 개벽을 이루는 일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라는 점을 깨닫고, 그 길로 더욱 정진해 나가기 위한 새로운 물음을 분명히 갖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최진석 : 과분한 칭찬 감사합니다. 저의 강의가 좋은 동기부여가 되고, 새로운 길을 여는 데 도움이 되었다니 저 또한 고맙습니다.

□□□ : 저는 서강대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2년 전에 익산으로 이사 왔습니다. 학교에서 교수님 명성을 익히 들었는데, 수업은 못 듣고 여기 와서 강의를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강의를 들으면서 뇌에서 개벽이 일어난 느낌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기존에 알고 있던 명사의 정의가 전부가 아니었구나라는 점을 알고 나서 여러 가지 전환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제 삶에 변화가 있을 것 같다는 소감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또 학문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갖고 살아왔는데 오늘 강의를 통해 인문학을 통해 달리 세상을 바라볼 수 있구나, 학문적으로 세상을 탐구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이번 강의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 ‘인문학’, ‘과제’, ‘개벽’을 키워드로 해서 말씀하셨는데 저 모두가 나의 삶이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음은 질문입니다. 첫 번째로 저희 원불교 교무들이 출가를 할 때 “왜 출가를 하느냐?” 하고 물으면 “소태산 대종사의 말씀을 전하는 전법사의 삶을 살기 위해서”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오늘 교수님 강의를 듣고 제가 이해한 바로는, 그렇다면 그것은 대답하는 삶이 아닌가? 소태산의 법을 전하는 것이니까 대답하는 삶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개벽을 해야 한다면 대답하는 자의 삶에서 질문하는 자로의 삶으로 건너가라고 하셨는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법사로서의 삶과 질문자의 삶은 어떻게 병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종교에서는 “믿어라, 그러면 얻는다”라고 말하는데, 원불교에서도 신분의성(信奮疑誠)이라는 말씀이나 신심을 가장 우선시하는데 신심이라는 것은 대답하는 자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어떻게 해야 신심을 강화하는 것과 질문하는 자로서의 삶과 조화시킬 수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세 번째로 소태산 대종사나 종교의 스승님, 성자들의 경전에 있는 말은 이미 죽은 것이다, 그 성자가 살아 있는 것은 그 말을 할 때의 행위, 사건에서만 살아 있는 것이다,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 후학들이 소태산 대종사를 죽이지 않고 살리고자 한다면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고 여쭙니다. 마지막으로 일상에서 질문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드립니다.


최진석 : 제가 책임지지 못할 말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웃음) 첫 번째 질문은 스승님의 말씀을 따르고 전하는 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종교인(교무)인데, 그것이 질문하는 자로서의 삶과 어떻게 조화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라고 이해됩니다. 일단 종교의 핵심은 믿음입니다. 그런데 종교의 믿음은 미신이나 맹신과는 다릅니다. 구조적으로 보면 모든 종교는 같습니다. 창시자가 있고, 교리가 있고, 그리고 교의(의례)가 있습니다. 위대한 인간이 나타나서, 모든 사람들이 따르면 좋을 말씀을 합니다. 그러면 그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에 따라 수행해서 창시자가 말씀하신 그 삶의 높이로 살아보자고 해서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렇게 해서 교단이 성립됩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기독교를 보면 예수님처럼 살아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모여든 사람들이 모두 다 잘 알고, 잘하는 것이 아니니 그중에 전문가, 다시 말해 성직자를 양성해서, 성직자를 통해서 예수님처럼 사는 일을 좀 더 쉽게 잘해 보려고 합니다. 따라서 성직자들의 소명은 대답하는 태도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태도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질문도 교육을 받으면 더 쉽고 잘하게 됩니다. 실제 신앙의 현장에서 성직자들이 신도들에게 매일 매일 작은 승리를 경험하게 하는지, 매일 매일 질문을 좀 더 잘하게 하는지 까지는 제가 잘 모르지만, 그런 것을 직분으로 하는 분들이라는 점은 확실합니다. 성직자는 질문하는 법을 잘 가르치는 자격을 공인받은 분이기 때문에 질문하는 삶과 대답하는 삶이 크게 배치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믿음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말로는 ‘믿음’이라는 한 단어로 쓰는 말이 서양 말로는 두 가지로 쓰입니다. 하나는 belief이고, 다른 하나는 faith입니다. belief는 존재적 반성을 통해서 갖게 된 확신이고, faith는 주워들은 얘기나 옆에서 누가 하는 얘기를 따라가는 맹목적 믿음입니다. 올바른 종교의 믿음은 faith가 아니라 belief입니다.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거듭하고, 또 질문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반성하고, 그 다음에 성실히 수행을 통해서 갖게 된 확신입니다. 그런 점에서 faith와는 다릅니다. 그래서 종교적 믿음은 믿음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존재적 반성을 거친 것이기 때문에 상당한 개방성을 띠게 됩니다. 그 믿음은 질문으로부터 온 것이고, 또 새로운 질문을 향해 열려 있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음의 삶은 질문하는 삶과 거리가 멀지 않을 것입니다.


세 번째는 스승을 죽이지 않고 살리는 방법에 대한 질문인데, 제가 죽인다는 말은 감히 한 적이 없습니다만(웃음), 그 질문의 숨은 뜻을 좇아 말씀 드리겠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대종사께서 무엇을 좋아하실지는 소태산 대종사께서 최초로 가졌던 고뇌와 질문 속으로 들어가면 보이고 알게 됩니다. 인간에게는 그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다만 소태산 대종사의 말씀을 자기의 편협한 삶을 정당화하거나 다른 사람을 이기는 데 사용하지 않고, 지속적인 반성과 존재에 대한 고뇌를 함께하면서 소태산 대종사의 고뇌 속으로 들어가면, 그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소태산을 죽이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야말로 소태산 대종사가 진짜로 원하는 바에 가 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대학원 수업을 하는데 서양철학을 전공하는 학생 하나가 수업을 들었습니다. 어느 날 저에게 좋은 책을 소개해 달라고 해서 [장자]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후에 그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면서, 좋은 책을 소개해 준 답례로 점심을 사겠다고 해서 그러마하고 같이 밥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하는 말이 “선생님, 장자의 말과 삶이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장자처럼 살아보려고 합니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야이, 미친놈아, [장자]를 읽고 감동을 받았다면서, 기껏 하는 소리가 장자처럼 살아 보겠다는 말이냐? 그럼 장자는 누구처럼 살았냐? 장자는 장자처럼 산 사람이다. 자기처럼 살았던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소태산 대종사도 자기 자신으로 살아간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자를 읽고 장자처럼 살겠다고 하면 장 자가 좋아할까요? 장자, 노자, 예수 등 위대한 사람은 다 자기처럼 살아서 위대해졌습니다. 우리가 배울 점은 바로 그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답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 : 세 가지 답이 다 일맥상통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네 번째 질문이 “일상 속에서 질문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였는데, 이에 대한 답도 그 안에 다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회 : 깊은 고뇌 속에서 나온 질문을 해 주시고, 교수님도 같은 고뇌의 깊이로 대답해 주셔서 좋은 공감이 일어난 듯합니다. 저도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즐겁습니다.


국담 : 저는 고창에서 텃밭 하나 가꾸며 사는 사람입니다. 교수님 강의를 들으면서 철학하는 즐거움과 철학하는 가치를 배울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강의를 마지막까지 듣고 보니, 중학생 때 들었던 철학자와 뱃사공 얘기가 떠올랐습니다. 어느 철학자가 강가에 이르러 뱃사공을 불러서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강 중간쯤 가다가 철학자가 뱃사공에게 “당신, 철학을 아시오?” 라고 물었습니다. 대답을 못하고 묵묵히 한참을 가던 뱃사공이 배가 강 중간에 이르자 철학자에게 “당신, 수영할 줄 아시오?” 라고 물었습니다. 왜 이 이야기를 꺼내는가 하면, 오늘 교수님 강의에서 즐거움도 느끼고 철학의 가치도 느끼는데, 그렇다면 삶의 가치는 어디에서 느껴야 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고고학이 발달한 나라, 영국의 예를 드셨습니다. 이집트도 한때는 대단한 문명국가였고, 제국 영국이 이집트를 침공해서 그 당시 유물을 돌려주지도 않고, 그 유물들의 고고학적 가치를 높이 칭찬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또 일본도 동아시아 삼국 중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근대화를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섬나라 왜구로서 노략질을 하던 나라인데, 조선의 문물을 가져가서 지금도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철학이나 이념과 현실의 괴리를 보여줍니다. 이때 현실의 가치, 삶의 가치를 철학적으로 어떻게 조명하는 하는가, 이것이 제 질문입니다.


최진석 : 결국 선진국이라고 해 봤자 전쟁하는 나라이고 착취하는 나라라는 말씀이지요. 예, 이게 사실 상당히 제가 풀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저는 조선의 학자 중에 제일 큰 학자로 다산 정약용을 손꼽습니다. 다산이 우리 역사상 가장 전 방위적인 학자였다고 할 수 있는데, 결국은 착한 도덕에 빠져서 사실적 판단을 하는데 실패합니다. 정약용 선생이 살아 있을 때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대량으로 유학 경전을 수입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그 소식을 들은 다산은 일본인들이 유학 경전을 읽었으니까, 이제 우리를 침략하는 버릇을 고칠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러니까 사태를 윤리 도덕적으로만 판단하는 우를 범한 것이죠. 그로부터 7, 80년 후에 우리는 일본의 침략을 받고 식민지가 됩니다. 다산이오판을 한 거죠.


인간 역사에는 때때로 모든 질서와 가치체계가 한꺼번에 무화되어서 갑자기 야만으로 빠지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것이 하나는 전쟁이고 하나는 혁명입니다. 그러니까 전쟁과 혁명은 일상적인 삶을 기준으로 성립된 논리와 가치로 평가하거나 해석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모든 질서가 무너지고 야만으로 빠져서, 폐허 위에서 새로움으로 나아가는 두 형태가 전쟁과 혁명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윤리적이고 가치론적인 판단에 매우 익숙하고 거기에 함몰되어 있습니다. 전쟁은 나쁜 것, 피해야 하는 것, 해서는 안 되는 것, 이렇게 정해 놓고 시작합니다. 제가 한국에서 학생들하고 전쟁에 대해 토론을 하면, 논의가 거의 진전이 안 됩니다. 왜 그런가? 전쟁은 나쁜 것이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는 선입견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제가 워싱턴에 가서 세계 각국에서 온 젊은이들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전쟁은 나쁜 것이다”라는 판단을 먼저 하고 토론을 시작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습니다. 그들이 내놓는 질문은 “전쟁이란 무엇인가?” “전쟁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 “전쟁이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판단을 어떻게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합니다. 전쟁을 도덕적으로 판단해서 안 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 놓고 사는 문명과, 전쟁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묻는 문명은 그 현재와 미래가 매우 달라집니다.


선진국이 전쟁을 해서 착취를 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일어나는 범죄들에 대해서는 윤리적 인권 문제, 여성 문제 등을 따지게 되죠. 그렇지만 전쟁 자체를 선악으로 놓고 따지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선악 너머의 어떤 것입니다. 인간 본성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 다음은 철학자와 뱃사공 문제인데, 저는 지금 ‘학(學)’을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론적이고 지식의 범주이죠. 얼마 전에 지방의 한 교육청에서 장학사들 몇 분이 있는 자리에서 토론을 하게 되었는데, 그 중 몇몇 분이 철학 이야기를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철학자보다 양파 밭에서 일하는 할머니가 더 철학적일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예, 그럴 수도 있습니다”라고 얘기하면 모범답안인데, 제가 심성이 삐딱해서(웃음)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철학은 전문적인 사유 패턴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니까 철학자가 “당신 철학할 수 있어?”라고 묻는 물음의 무게와, 뱃사공이 “당신, 수영할 수 있어?”라고 하는 질문은 문명적인 높이에서 보면, 굉장히 폭과 깊이가 다른 질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학’의 효용성과 그 맛을 한 번 알고 나면, 우리가 친숙하게 할 수 있는 삶의 현장 안에서는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인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의 오늘 이야기는 ‘학’을 주제로 했고, ‘학’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관리하고 통제하는 하나의 효율적인 장치이다, 라는 얘기를 했다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하겠습니다.


박길수 : 저는 서울에서 왔습니다. 박맹수 교수님이 주관하시는 동학공부 모임에 참석하고 있어서, 오늘 이 강의에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강의 잘 들었습니다. 한 가지 좀 단순한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선생님께서 강의 시작 부분에 동학이야기를 꺼내시면서, 학문에 입문하던 초창기에 당시 선배학자들이 동학을 거들떠보지 않는 것에 충격을 받으신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동학 이야기를 건너뛰어서, 강의 중간쯤에서는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것 중에 우리가 스스로 만든 것은 한글 빼고는 없다고 하셨는데, 제가 동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보면, 동학이야말로 우리가 최초로 생각한 사상이자 철학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가 교수님 책을 몇 권 읽었지만, 거기에는 동학이야기가 기대했던 것만큼 많지 않았습니다. 오늘 선생님 강의를 들으면서, 동학이야말로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우리가 고유하게 생각한 것’의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최진석 : 예, 그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제가 연구나 저술 그리고 오늘 대화의 비중을 거기에 많이 두지 않은 것은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동학 연구는 조성환 박사가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웃음) 저는 역량이 부족할 것 같고, 저는 옆에서 조 박사가 연구한 결과를 가지고 말하는 역할을 맡으려고 합니다.


지금 질문자도 말하셨지만, 동학, 증산, 원불교 이 세 종교가 공통적으로 가진 가장 중요하고 큰 의미는 무엇인가 하면, 한반도에 최초로 생겨난 자생적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상이 그냥 사상이 아니라 우주론, 인생관 등이 모두 체계화가 된 고도의 사상입니다. 그것이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다음에 우리가 우리 생각으로 우리 삶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살아나는 데 삶과 문명을 창조해 나가려면 바로 이 생각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정상적인 태도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서두에 말씀 드렸듯이 제가 평생을 해 온, 철학을 하는 태도에 대해서 근본적인 반성을 하게 된 출발점이 기성학자들이 동학을 철학이라고 보지 않는 데 대해 충격을 받았다는 점을 그래서 말씀 드렸던 것입니다.


앞으로의 더 많은 얘기는 조성환 박사가 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만 더 하자면, 자생적인 사유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고 또 더 깊은 공부, 많은 연구, 더 넓은 논찬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유념할 것은 이것을 완벽한 것으로 놓고 다루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어떤 한 생각을 따르고 그것을 삶의 지침으로 갖는 한 방식은 지금에 와서는 그것을 숭배하는 것이어서는 안 되고, 그것을 어떻게 현대화할 수 있는가, 매우 도전적인 고민이 있어야 합니다. 옛날에 했던 생각을 금과옥조로 놓고 숭배하는 태도로만 일관한다면 큰 걸음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동학을 재건하거나 숭배하는 것으로 우리 철학을 만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의 동학, 이 시대의 ‘개벽학’을 다시 만들어가는 입장에 선다면, 매우 현대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여 말씀드립니다.


사회 : 중요한 말씀입니다. 본래의 동학을 완벽하고 완결된 것으로 보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의 나의 삶에서 어떻게 적용하고 변화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태도,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는 태도를 강조하셨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원불교사상연구원의 원영상 사무국장님의 질문으로 오늘 강의와 토론을 마치겠습니다.


원영상 : 저는 원광대에 재직하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원불교사상연구원 사무국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최진석 교수님을 모셔서 말씀을 듣게 되었는데, 좋은 강의 감사드립니다. 제가 작년부터 경향신문에 칼럼을 쓰고 있는데, 오늘 아침에는 “대학은 자본의 시녀인가”라는 주제로 칼럼을 썼습니다. 그 결론 부분에 대학이 인문학의 교두보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오늘 최진석 교수님의 강좌를 이곳 원광대학교에서 개최하면서, 이 시간만큼은 인문학의 교두보로서 충실하였다는 기쁨과 자부심, 그리고 감사함을 느끼게 됩니다. 저는 불교학이 전공인데, 교수님께는 외람됩니다만 중국의 육조혜능 대사가 다시 오신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일동 웃음) 육조혜능은 무학이었지만 제자나 청중들에게 지혜를 불러일으키는 가르침을 베푸시거든요. 오늘 교수님의 강의가 우리들에게 지혜의 눈을 열어 주신 위력은 육조혜능에 비견해도 좋다고 생각됩니다. 오늘날 자본주의체제에서는 지식도 종교도 소비되고 맙니다.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화하지 않고 말입니다. 오늘 말씀을 들어보니까, 제가 철학의 본질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종교의 현실은 확연히 그런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종교의 본령을 돌이켜보면 참된 신앙은 존재의 본질을 만남으로 해서 전율을 느끼는 것, 전율을 느낌으로서 내가 살아 있음을 낚아채는 것, 그 살아 있음의 힘으로 순간순간 창조해 나가는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까? 오늘 교수님의 강의는 그런 전율을 불러일으키고, 또 우리에게 질문의 동기를 불러일으켜 주셨습니다. 참으로 감회가 깊고,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를 빛내 주시고, 청중들에게 살아 있음을 다시 확인 시켜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다 함께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일동 박수)


최진석 : 조성환 박사가 제 제자인데, 오늘 제자가 오라고 하니까 아무 생각 없이 왔습니다. 와서 여러분들을 뵈니까 머리에만 있는 말이 아니라, 가슴에서부터 영혼에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저와 교감하려 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다른 곳에서 느끼기 힘든 감동입니다. 저하고 진실하게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아직 근기가 착실하지 못하고 경박해서 이야기를 조심성 없이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혹시 제 이야기로 마음을 상하신 점이 있다면, 제 진심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사회 : 뒤늦게 박맹수 총장님이 오셨습니다. 얼마 전에 원광대학교 신임 총장으로 선출되셔서 지금 한창 인수인계를 진행하고 계십니다.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박맹수 : 우선 최진석 교수님께 처음부터 참석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오늘 청중들이 몇 분이나 오실까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많은 분들이 참석하시고, 뜻 깊은 철학의 강연이 되었다니 마음이 흐뭇합니다. 제가 잠시 공부를 중단하고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정이 분 단위로 움직여서 참석을 못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여러분들이 즐거운 철학을 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 하는 일에 매진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음만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질의 응답 전 강의 내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