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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ul 05. 2019

어떤 나라든지 그 나라 여자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한다

[편집실주] 이 글은 개벽신문 제85호(2019.6.15)ㅡ동학의 비결에 게재된 글입니다.


심국보 / 신인간 주간, 본지 편집위원

결혼식 동시 입장"


동학, 천도교는 1860년 창도 이후 여성의 수도(修道)를 권장하고 여성의 권리 향상을 위해 노력해 왔다. 특히, 동학의 2세 교조 해월신사 최시형의 경우 ‘일남구녀(一男九女)’라 하여 도를 통하는 사람들 중 여성의 비율은 아홉, 남자는 하나라 하여 여성의 역할을 크게 강조하였다. 또한 해월은 “앞으로 우리 교중에 십만 명 이상 지도할 부인이 십여 명 나올 것이다”고 하여 뛰어난 여성 지도자의 출현을 예고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동학, 천도교에서는 1897년 ‘향아설위(向我設位) ’라 하여 제사의식을 간소화하여 여성의 가사노동 부담을 줄이고, 백여 년 전인 20세기 초에는 결혼식에서 ‘남녀 동시입장’을 공식화하여 여성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하기도 하였다.


향아설위와 남녀 동시입장은 천도교의절에 그대로 수록되었다. 이 둘이 가지는 현대적 의미는 남녀평등이다. 남녀평등과 관련하여 천도교가 성취한 제도적 성과를 꼽으라면 선거제도의 혁신이다. 남녀 동시입장, 향아설위, 선거제도 순으로 알아본다.  


“남녀가 평등하니 동시입장이다”


거의 30년 전 내가 결혼할 때다. 그때 신부는 천도교인이 아니었지만 결혼식은 동시입장으로 진행했다. 천도교의절에서 다른 것은 두고 동시입장은 관철시켰다. 동시입장을 결혼 조건의 하나로 내세웠다. 이유는 단순히 설명했다. 남녀가 평등하니 동시 입장이라 했다. 주변의 반응이 좋았다.


흔히들 보는 결혼식장에서 신랑이 먼저 입장한 뒤에 신부의 아버지가 신부를 신랑에 건네는(?) 장면을 보면, 나는 여성은 주체적이지 못한 종속적인 존재인가 하는 의문을 가진다. 물론 다들 그렇게 하니까 그리하는 것이니, 이런 나의 생각이 잘못일 수도 있겠다.


천도교의 교세가 점차 약해지다 보니 천도교단 내에서도 결혼식에서 신랑신부 동시입장의 의미를 제대로 모르는 듯하다. 결혼식에서 동시입장을 하면 그만이지만 상대측이 있으니 눈치가 보인다. 자신은 천도교인이지만 상대측은 천도교와 무관하니 동시입장을 포기하고 만다. 그런 절차가 뭐 중요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혼례의식에서 핵심인 동시입장을 실행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천도교만 신랑신부 동시입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천도교 의절에 따른 것은 아니지만 남녀평등이라는 시대의 대세에 따른 동시입장이다.


천도교의절에는 뻔히 인쇄까지 해 놓았다. 천도교의절을 보라. 혼례식, 약혼식이 있은 후에 적절한 시기와 장소를 선택하여 절차에 따라 혼례식(결혼식)을 행한다.


1. 예식의 장소는 결혼식장이나 자택, 또는 교당이나 그 외의 적당한 곳으로 정한다.

1. 신랑과 신부의 예복은 원칙적으로는 당일에 입기 위하여 마련한 복장을 착용한다.

1. 주례(主禮)는 반드시 교회 예복을 착용한다.

1. 집례(執禮)는 예복을 입지 않아도 무방하다.

1. 후행인(後行人) 또는 인도인(引導人)은 양가의 부모가 되는 것이 원칙이나,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친척, 친지 중에서 모범 부부를 선정해도 무방하다.

1. 신랑과 신부는 동시에 입장하고 그 뒤에 양가 부모 또는 다른 친지나 친척되는 부부가 예탁 앞까지 후행한다. 퇴장할 때에도 후행인이 따른다.

1. 신랑과 신부의 위치는 예탁을 향해서 신랑은 왼쪽에, 신부는 오른쪽에 선다.


의절에는 이런 해설에 이어 혼례식 식순이 나열되어 있다. 100여 년 전 시대를 앞서 만든 절차다. 동시입장은 신랑과 신부에게 더 도움이 된다. 부부가 화순하게 지내는 것은 남녀평등의 실천에서 시작된다. 부화부순, 이것은 동학, 천도교의 기본정신이기도 하다. 신랑신부 동시입장은 비록 100여 년 전에 시도된 것이지만 해가 갈수록 남녀평등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분명히 밝혀주는 천도교의


문화로 자리 잡아야 한다. 천도교인들의 실천이 필요하다. 젊은이들에게 대한 포덕이기도 하다.


“평상시에 식사를 하듯이”

어느 천도교인의 제사상(왼쪽)과 우리집 제사상(오른쪽)


또 거의 30년 전 일이다. [또 하나의 문화]라는 책에서 40대 여의사의 체험을 충격적으로 읽었다. 그는 결혼 10년이 넘도록 의사로서의 바쁜 생활 속에서 자신의 동창생은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지만, 시댁의 그 많은 제사에는 빠짐없이 참석했어야 했다. 자신은 얼굴조차 모르는 시댁의 먼 조상들을 위해 결근을 해서라도 제사에 참석하건만, 정작 같은 의사인 남편은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자신의 조상들 제사에 참석도 않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이런 모순된 상황이 잠자던 그의 의식을 일깨운다.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을 갖추면서 비로소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그는 이혼한 후 담담하게 자신의 체험을 술회한다.


위의 의사가 나에게 던지는 문제의식은 자못 엄중했다. 여성단체에서 설이나 추석에 벌이는 ‘웃는 명절’ 캠페인과는 차원이 달랐다. 누가 음식 장만하고 설거지하고 하는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제사’라는 의식이 가지는 가부장적 모순과 허위를 정확하게 폭로하고 있다. 부계 혈통만을 중시하는 제사의 본질적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었다.


이 의사의 충격적인 체험이 나를 전율하게 했다. 그때부터 나는 기존의 제사법을 버렸다. 집안에 먼저 이야기를 하고 돌아가신 어머니 제사는 청수 한 그릇으로 모셨다. 설이고 추석 차례도 그렇게 했다. 우리 집 제사를 참관하신 사촌형, 특히 형수님이 반응이 너무 좋았다. 제사 때 여성들이 가사노동에서 벗어나는 것도 우리 시대의 하나의 과제이다.


“평상시에 식사를 하듯이 위를 베푼 뒤에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심고하고…”라고 하신 해월의 말씀에 따른 향아설위의 제사법에는, 제사상은 따로 없다. 청수 한 그릇 올리는데 무슨 상이 필요한가. 동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천도교인 집안이라 하더라도 향아설위의 형식은 다양하다. 제사음식을 차리기도 하지만 차리지 않는 집안도 있다. 향아설위라 해도 옛날과 지금은 다르다. 동학 시대에는 음식도 차리고 위패도 놓았지만 지금은 청수 한 그릇으로도 족하다.


유교적 영향력이 강했던, 보수성이 강한 경상도 지역에서 천도교식 제례의 경우 주문을 하고 청수는 모시지만 실제는 유교식 제사와 별 차이가 없는 경우도 있다. 남북분단이 고착화된 지 70년을 넘기면서 북쪽 중심이던 천도교세가 남쪽의 천도교, 경상도 교인의 비중이 늘면서 향아설위 등 혁신적 현대적 의미가 있는 의절이나 제도 역시 그 형식만 흉내 내는 듯하여 안타깝다.


선거제도의 혁신


천도교가 이룩한 선거제도에서의 남녀평등이라는 혁신은 놀랍다. 동학, 천도교가 여성 동덕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것은 뉴질랜드가 ‘세계 최초’로 여성 참정권을 인정한 것보다 앞선다고 한다. 김정인 교수는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3.1운동이 끝나고 천도교가 위기 국면을 돌파할 때도 민주주의가 화두였다. 중앙집권에서 지방분권으로, 독재에서 중의로, 차별에서 평등으로, 천도교를 이끌자는 천도교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운동을 주도한 혁신파를 이끈 사람은 최동희였다. 그는 최시형의 장남으로,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나온 재원이었다. 최동희는 천도교의 민주화운동을 시대적 요구이자 정의로운 방향이라며 지지세력을 모았다. 천도교 민주화의 요구는 곧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다.


1921년 7월에 천도교 내 대의기구인 의정회에 관한 규정이 반포되고, 전국 60개 구역에서 대의원인 의정원을 뽑는 선거가 실시되었다. 500호를 단위로 하는 1개의 선거구에서 의정원 1명씩을 무기명 투표로 선출했다. 18세 이상의 교인은 누구나 1표를 행사할 수 있었다. 여성도 투표권을 가졌다.

위 내용을 인용한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라는 책에서 ‘천도교 연합회’의 활동을 “천도교 민주화” 라는 시각으로 잘 해설하고 있다. 천도교가 뉴질랜드보다 앞섰다는 것은 1906년의 ‘천도교대헌’ 반포를 두고 하는 말이다. 뉴질랜드의 경우 투표권이 주어진 것은 1893년, 피선거권이 주어진 것은 1919년이다. 피선거권과 관련하여 천도교대헌이 공포된 것은 1906년이니 뉴질랜드의 1919년보다는 13년 앞섰다고 할 수 있다.


의암 선생은 1906년 일본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여 1906년 2월 ‘천도교대헌’에 따라 천도교의 조직체계를 ‘대도주’를 정점으로 중앙총부와 지방의 교구제로 정비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제로 조직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4월에는 부인 전교실을 정하였고, 부인전도사 제도를 실시하여 여성도 남성과 같이 포덕 일선에서 활약할 수 있게 함으로써 여성의 의식개혁과 지위 향상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천도교대헌의 선거규정은 다음과 같다.


제3장 6관. 중앙총부원 / 대교구원/중교구원/소교구원 

1조. 중앙총부원 : 대도주가 특선함

2조. 대교구원 : 해교구의회에서 공선함

3조. 중교구원: 해교구의회에서 공선함

4조. 소교구원 : 해교구의회에서 공선함


여기서 공선은 공개적인 선거를 말한다. 1906년 천도교대헌, 1921년 천도교 의정원의 선거관련 규정이 김정인의 표현대로 “천도교가 여성 신도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것은 뉴질랜드가 ‘세계 최초’로 여성 참정권을 인정한 것보다 앞선다.”라고 할 수는 있다. 물론 그 내용에서 오늘날과 같은 실제적인 남녀평등의 선거가 되었는지는 더 살펴볼 일이다. 여성이 실제의 선거에서 거의 당선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어떤 나라든지 그 나라 여자 이상으로 진보하지 못한다.”


소파 방정환이 1924년 한 말이다. 여성의 지위, 인권이 그 나라 진보의 척도라는 의미다. 여성의 기가 살아야 진보했다고 할 수 있고 또 보수할 것도 있다. 최근 검찰이 조선일보 관련자들의 성매수 등의 사태를 다루면서 턱없는 짓을 하는 걸보면, 백 년 전 방정환의 생각마저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을 본다. 못난 조선의 후손들이다. 여성의 싸움만으로 진보는 가능하지 않다.


방정환의 언급도 동학, 천도교의 경전에 나오는 말씀들 못지않게 중요하다. 독실한 천도교인이었고 의암 손병희의 사위였던 방정환 아닌가. 그 좋은 말씀들의 행진, 마치 화석처럼 천도교경전 속에서만 반짝거리는 것이 현실이다. 말씀과 그 실천은 별개다. 해월의 말씀 ‘향아설위’가 멋있긴 한데 실천은 별개이며, ‘천도교의절’ 속의 한 구절 ‘동시입장’은 그냥 적혀 있는 말씀일 뿐이다. 월산 김승복의 말씀 한 구절 옮겨본다.


오래 전입니다. 서강대 교수인 불란서 신부 한 분이 계십니다. 한국으로 귀화해서 한국 여자와 결혼해 살면서 교수직을 하시는 분입니다. 어느 날 그분이 천도교중앙총부를 방문해서 얘기를 좀 하자고 했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총부에 있는 교역자들이 다 모여서 얘기를 하는데, 첫마디가 천도교인들은 교회의 교세가 왜 이렇게 됐는지 아느냐는 것입니다.

대답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니까 다시 말씀하시기를 “스승님이 남겨놓은 경전을 보니까 영부와 주문에 대한 것이 있는데, 교인들이 영부를 받아서 쓰시느냐?”고 하니, “혹 쓰는 사람도 있고, 안 쓰는 사람도 있다.”고 답했지요. “강령도 받느냐?”, “강령 받는 사람도 있고 안 받는 사람도 있다.” 하니까 불란서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 신앙한다는 사람들이 자기 교조가 이렇게 하면 된다고 다 밝혀 놨는데 그걸 안 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강령도 받아서 아픈 사람 강령치료도 해주고, 또 영부를 받아서 아픈 사람에게 영부를 대접해서 병도 고쳐줘라. 그래야 사람들이 모일 것 아니냐. 그렇게 되면 교회가 잘되지 말라고 고사를 지내도 잘 될 거다.” 그런 말씀을 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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