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통문 - 018
*이 글은 2019년 6월 8일, 보은취회 현장에서 쓴 것입니다.
“보은취회 126”에 와서 나는 ‘일을 한다.’
책방을 열고, 글을 쓴다.
아니,
일하지 않는다. 논다. 쉰다. 숨을 쉰다. 살아 있다.
일하지 않는 한울님으로서, 살아 있다.
"일하는 한울님"은 동학 2세 교조 "해월 최시형" 선생의 사상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일하는 한울님'이라는 말을 '해월 최시형 선생'이 직접 쓴 것은 아니다.
“일하는 한울님”은 내가 아는 바로는 김지하 시인이 처음으로 대중화한 말이다.
[1984년에 간행된 <<밥>>이라는 단행본에 '일하는 한울님'이라는 글이 실려 있다.]
그 말은 해월 최시형 선생의 ‘베짜는 며느리’ 이야기로부터 유래한다.
해월 선생이 청주에 사는 제자 서택순의 집에 잠시 들러 툇마루에 앉아 있을 때,
방 안에서 서택순의 며느리가 베를 짜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월 선생이 서택순에게 묻기를
“지금 누가 베를 짜고 있습니까?”
서택순이 대답하기를
“제 며느리가 베를 짭니다.”
해월 선생이 다시 묻기를
“그대의 며느리가 베를 짜는 것이, 참으로 그대의 며느리가 베를 짜는 것인가?”하고 물었다.
서택순이 그 물음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훗날, 해월 선생이 제자들에게 이 일화를 들려주며
“도인(道人)의 집에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고 말하지 말고 한울님이 강림하셨다고 말하라.” 하셨다.
이 일화에서, “며느리 = 사람 = 한울님”이라는 생각이 조각되어 나왔고
그다음 ‘며느리가 하는 일 = 한울님이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조각되었다.
마지막으로 ‘사람이 하는 일 = 한울님이 하는 일 = 일하는 한울님’이라는 생각이 완성되었다.
이 ‘일하는 한울님’은 ‘사람의 노동’의 ‘신성(神性)함’을 잘 드러내는 말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개념이 되었고
나아가서 ‘일하는 자 = 노동자, 농민, 여성 등’의 거룩함(=한울님)을 드러내는 말로서
뭇 사람의 사랑을 받는 말이 되었다.
굳이 마르크스의 사상을 도입하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 전통사상에,
적어도 동학에서 재발견된 관념 속에서 사람의 노동, 노동하는 사람으로서
사람은 한울님이 될 수 있고, 일함으로써 사람은 한울님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일화,
해월은 36년 동안 내내 ‘도망-피신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므로 어느 곳에 머물러 있을 때도 언제 어느 때고 보따리를 들고
‘도망’을 쳐야 할지 모르는 불안한 하루, 정착하지 못하는 생활을 영위해야 했다.
그런데 해월은 언제 떠나야 할지 모르는 가운데서도 머무르는 곳마다 (과일)나무를 심었다.
제자들이
“곧 떠나야 할지도 모르는데 나무를 심어서 무엇합니까?”
하고 말하면 해월은
“이 나무 열매를 다음에 오는 사람이 따서 먹을 수 있으면 좋은 것!”
이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일(노동)’이 사람(만물)의 ‘생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본질적인 작용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이다.
또,
해월은 언제나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고, 논밭 일을 하지 않는 때에는
새끼를 꼬았다. 새끼를 꼴 짚이 없으면 꼬았던 새끼를 풀어서 다시 꼬기까지 하였다.
제자들이 묻기를
“어찌하여 선생님은 단 한시도 쉬지 않습니까?”
해월 대답하시기를
“한울님은 한시도 쉬지 않는데, 어찌 사람이 한시인들 쉴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일하는 한울님’이라는 생각/말은 이처럼,
한울님이 이 세상 모든 일에 간섭하지 않음이 없음[無事不涉],
참여하지 않음이 없음[無事不命]을 드러내 주는 말로써 이해되어 왔다.
그런데,
“일하지 않는 한울님!”이란 무엇인가?
‘일하는 한울님’이 ‘다시개벽’ 시대의 열쇠말이라면,
‘일하지 않는 한울님’은 ‘다시, 다시개벽’의 시대를 열쇠말이다.
자동화(로봇) 시스템이 인간을 대체하여 일을 하고
인공지능(AI)dl 인간보다 더 잘, 더 많은 일을 하는 시대가 되고 있다.
머지 않아, '일하는 사람'보다 '일하지 않는/못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은 시대가 도래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유토피아의 징조라는 전문가도 있고
디스토피아의 징조라는 전문가도 있다.
그 일을 감당해야 하는 민중들의 의견도 갑론을박이다.
2.
그 문제, 혹은 '일하지 않는 한울님'의 개념을 직접적으로 해명하고 접근하는 것은 뒤로 미루고
에둘러 갈 수 있을 만큼은 에둘러 가 보려고 한다.
“일하지 않는 한울님”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오늘날은 전통적인 관념이 전복(뒤집어짐)되는 시대이다.
다른 말로는 경계가 허물어지고,
‘나’(주체)와 ‘남’(타자)이 뒤섞이는(어울리는/혼혈의/다문화의) 시대이다.
예컨대, 오늘날은 생명의 전통적인 정의, 개념, 관념이 흔들린다.
생명=유기체라는 관념을 고수하기에는 ‘인공지능’(AI)이 등장 이후의 상황이 만만치 않다.
‘살아 있음’과 ‘죽음’의 경계도 희미해지고 있다.
‘뇌사’라는 개념을 ‘법적인 사망(죽음)’으로 인위적으로 규정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그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연명치료거부’를 주 내용으로 하는 ‘사전의료의향서’ 작성이 시대적 대세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이러한 사태의 상징적인 사건이다.]
또 하나 예를 들자면, 전통적으로 책이라고 하면, 종이에 인쇄되어 제본된 형태로 서점에서 판매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이제 ‘전자책’이라고 하는 ‘네트워크’ 상의 책이 등장하였고, 나아가서 인터넷의 각종 데이터들도 어디까지가 책이고 어디서부터는 책이 아닌지 그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모호해진다’는 말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지만, 현재의 상황(모호해짐)을 부정적으로 보고자 하는 의도는 없다. 그것은 필연적이며, 어쩌면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본다. ‘자연’은 ‘살아 있음’과 유의어라고 할 수 있다.
'일하는 한울님'이 '일하는 사람 = 민중'들의 '한울님임'을
자각하고, 발견하고, 선언하고, 선포(포덕)하는 상징어였다면,
'일하지 않는 한울님'은 다시,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새(지금, 다가오는) 시대에도
"여전히 사람이, 만물과 더불어 한울님임/일수 있음"을 선포하는
상징어이다.
개벽파, 개벽학이
‘일하는 한울님’ 시대로부터 ‘일하지 않는 한울님’ 시대로 이행하는 가운데
등장(재발견, 재조명, 재점화)한다는 것은 그 의미가 작지 않다.
건너가는 동안, 한울님이 흔들린다.
건너가기 전에도 한울님은 한울님이지만
'일하는 = 일하지 않는'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는 것은
우리 시대에 또 한번의 개벽이다.
한울님이 흔들리며, 건너간다.
흔들리면/흔들려야만, 꽃이 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