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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un 09. 2019

일하지 않는 한울님 (2)

-다시 개벽론의 새로운 축 개척을 위하여 

필자가 '일하지 않는 한울님' 론(論)을 제기하는 이유/배경 가운데 하나는 전통적으로 '일-노동'이라고 여기던 범주가 확장되고, 변화하고, 재정의되는 시대상이 놓여 있다.


자본주의 시대가 되면서 일이란 '상품생산'에 간여하는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행위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부지불식간에 자리매김되었다.  그라나 3차 산업혁명을 넘어 4차 산업혁명 시대로 접어들면서  그러한 관념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가사(家事)는 한자어 자체가 집(안)'일'이라는 뜻을 담고 있음에도 오랫동안 '엄격한 의미의 일 = 노동'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른바 '그림자노동'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가사노동은 '자본주의적인 노동관'에 따르더라도, 상품생산에 필요한 노동을 뒷받침하는,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인 으미의) 노동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으로서 (간접적인 상품생산) 노동이라는  관념상의 변화가 일어났다. 이른바 시급 노동자에게 더 긴요한 범주로 제기되는 '주휴수당'에 대한 우리 사회으 의식이 보편화되는 것도(아직은 법적 강제력에 의존하고 있지만) 이러한 (재생산에 필요한 휴식도 '직접노동'을 보조하는) '간접노동' 일종이라는  의식의 변화 혹은 확장이나 심화를 반영한다고 본다. '일하지 않는 한울님'이다. 


오랫동안 "정상적이이 않은 일" 혹은 "일답지 않은 일"이라고 폄하되어 왔던 (사회적 관념상으로도 그러하고, 그 일을 하는 당사자들조차 그러한 의식을 가졌던) 이른바 '알바 - 아르바이트 - 임시직' 노동도 이제 우리 사회의 '당당한(?)' 노동=일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다. 그것은 '(부정적인 의미로 볼 때의) 계약직 노동자'*가 정규직 노동자보다 더 많아진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일 그 자체'에서 '삶 = 자아실현'의 의미를 찾던 전통적인 노동관에서 벗어나 '일은 수단' '일 이후의 여가나 내가 하고 싶은 일[=비급여]을 하는 것이 진짜 내 삶'이라는 관념이 확장/심화되는 시대상황과도 맞물린다. 예를 들어 몇 개월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단기/중기 해외여행을 다녀오고, 다시 몇 개월을 아르바이트를 하기를 되풀이하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은 것이, 이러한 판단을 뒷받침하는 사례이다.  *[계약직은 '절대적 기준으로 부정적인 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고 본다. 산업구조상 계약직이 필연적인 경우가 - 노동자, 자본가 양쪽 모두의 입장에서 - 많아진 시대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또한 (이것은 이미 그 역사가 오래되었지만) 오늘날은 '꼰대세대'의 관념으로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여러 가지의 직업들이 생겨난 것도 '일'에 대한 관념을 뒤흔드는 한 요인이 된다. '딴따라'로 천대(?) 받던 직업이 '연예인' '아이돌'로 선망의 대상이 되는 직업이 되었고, '가방모찌'에 불과하던 '매니저'가 그 연예인보다 더 선망의 주인공으로 떠오르기도 하며, '주방장'(?)에 불과하던 허름한 아저씨가, 세계 탑클래스의 직업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셰프"이거나 '구세주 = 골목식당'으로 자리매김한다. 늙어 꼬부라져서 죽을 날만 기다리던 사람(cf. 할아버지 할머니)이 어느날 갑자기(?) 세계적인 스타[유튜버, 1인크리에이터, cf. 박막례 할머니]로 떠오르기도 한다. 


거룩한 스승이던 선생님들도 '노동자 =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정립한 지 오래고, 공무원 역시 '국민의 공복'이기도 하지만, '노동자(=공무원 노조)'로서의 정체성이 가장 핵심적인 정체성으로서 중시되는 시대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노조 조직률이 여전히 선진국에 비해 부족한 상황 자체가 문제이기도 하지만, 시대상황만 놓고 볼 때,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고집하는 것은 점점 낡은 것이 되어 가고 '창조자'로서의 자기혁신이 필요불가결해지는 시대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간과하면, 노동자 자신만 손해이다.] 그에 따라 '평생 직장'이라는 말은 '명예의 전당 용어'가 된 지 오래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었던 '평생 직업'이라는 말도 곧 박물관 용어가 될 처지가 되었다. 고령화 시대와 맞물려 인생 3모작이 인구에 회자되고, 지금의 중고생이 사회에 진출하는 2, 30년 이후에는 보편적으로 죽기 전까지 최소한 서너 개의 직업, 많게는 수십 개의 직업을 섭렵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관념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들로, 오늘날은 전통적인 의미 혹은 전통적인(꼰대적인) 관념에서 볼 때는 '일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일 같지 않는 일로써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보상(급여, 수입)을 얻는 것이 점점 더 일상적인 풍경이 되어 가고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한국사회를 오늘날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피식민지였다가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국가로 성장하게 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는 교육열도 다른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여전히 '좋은 대학 = 좋은 직장 = 성공적인 삶'의 등식이 사회의 지배적인 등식이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균열의 조짐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일하는 한울님'은 명백하게 '긍정적이고 신성한 가치'를 드러내는 숙어였지만, '일하지 않는 한울님'이라는 숙어는 '일하지 않는 한울님도 일하는 한울님'이라는 긍정적인 관념과 '일하지 않는 한울님 = (일하고 싶어도) 일하지 못하는 한울님'이라는 부정적인 관념이 혼재되어 있다. 어쩌면, 그러한 혼재성이야말로 이른바 '제4차산업혁명' 시대의 '노동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최저임금이나 기본소득은 '일하지 않는 한울님'의 시대를 가속화하는 입구 풍경의 하나이다. 

그것이, "(부정적인 의미의) 일하지 않는 한울님 시대"를 가속화한다는 것이 이른바(?) 보수주의자의 시각이고

그것이, "(피할 수 없는 미래상으로서의) 일하지 않는 한울님 시대"의 삶의 행태를 준비하는 데 필수적인 제도라고 보는 것이, 그리고 (긍정적인 사회상으로서의) 복지사회로 가는 데 필수적인, 나아가 심지어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제도라고 보는 것이 진보주의자의 시각이다.


이러한 '일하지 않는 한울님' 시대의 철학과 문화에 대한 탐색은 계속되어야 한다. 


일하지 않는 한울님의 시대란, 

'같잖은 것'이 '~같은 것'보다 낫거나, 최소한 동등한 사회이다.


현재 우리가 아는 한, '인간이 손을 사용한 노동'을 하면서부터

인간은 '유인원'으로부터 '인간'으로 진화할 수 있었고 / 진화를 시작하였다. 

그래서 '일하는 한울님'이란 다시 말하면, '일이 낳은 한울님, 일로써 한울님이 된 존재'의 시대를 의미한다면

오늘날 우리 앞에 전개되는 '일하지 않는 한울님'의 시대 

AI(인공지능)가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도 문제이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AI가 인간을 변화시킬 것이 확실시되는 현 시점에서

과연 AI가 우리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를 알아 가는 것이다. 


물리적인 수준에서만 보자면 

일하는 한울님의 시대가 선천이라면

진정한 후천은 '일하지 않는 한울님'의 시대와 더불어 진행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일하지 않는 한울님' 론(論)은

다시개벽 담론, 개벽파의 사상, 개벽학의 중요한 축으로서, 

'노동개벽'을 위한 담론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극히 일부 종족을 제외하고 인간에게 의복이 '피부의 일부'가 되고

오늘날은 스마트폰이 '신체의 일부'가 된 것처럼

앞으로의 시대는 'AI'나 (신체의 기능을 보조/보완하는) 로봇이 우리 존재의 

필수불가결한 일부로 당연시되는 시대가 될 것이다(이미 되어 있다).

'일하지 않는 한울님'의 시대란 바로 그 시대를 위한 철학, 윤리학, 생명학의 키워드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있고 나서 노동이 있은 것이 아니라, 노동이 있어서 인간이 생겨났다. 부모님이 있어서 우리가 태어난 것처럼, 노동의 결과로 인간이 인간으로서 진화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동학의 스승들은, 특히 해월 최시형 선생은 그 노동을 '한울님의 일'로서, '한울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곧 한울님임'을 선포함으로써 '후천개벽'의 관념을 완성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선포의 연장선상에서 오늘 우리는 다시 '일하지 않는 한울님'의 시대를 목격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개벽학의 또 하나의 과제인 셈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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