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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un 03. 2019

해월신사 묘소 참배기

- <천도교회월보> 제171호, 포덕65(1924, 대정13), 12월호

박래홍(朴來弘) / 현대어역 박길수 

- <천도교회월보> 제171호, 포덕65(1924, 대정13), 12월호, 28-29쪽. 

(사진 : 해월신사 묘소를 참례한 중앙총부(종리원) 임직원들)

[편집실 주 : 6월 2일은 동학 천도교의 2세 교조이신 해월 최시형 선생(신사)의 순도기념일이다. 1898년 경성감옥에서 순도하신 날. 포덕 65년, 춘암 박인호 선생이 중앙총부 직원들을 대동하고 해월 선생 묘소를 참례하던 당시를 알 수 있는 기사. 이 기사는 춘암 선생의 장자이신 박래홍 선생이, 선발대로 묘소에 이르기까지의 여정, 춘암 선생(상사) 일행을 영접하여 묘소 참례를 마치고, 다시 춘암 선생을 모시고 서울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서울에서 걸어서 여주까지 가는 길의 광경이 눈에 선하다.]


[사진설명 : 이 기사의 해월신사 묘소 참례 당시 사진. 이 사진은 종교평화연구원 원장/법보신문 논설위원이신 이병두 선생님으로부터 제공받았다.  사진 속 인물은 홍일창, 한순회, 박래홍, 정광조, 권동진, 오세창, 최석련, 최린, 이인숙 등이다. 천도교의 신파/구파 핵심인물이 한자리에 있는 보기 드문 사진이다. 당시 기사에는 이 사진과 다른 사진 한 장이 더 실려 있는데 안타깝게도 춘암상사께서 참례하신 후 찍은 사진 원본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11월 14일, 숙약(宿約; 오래전에 한 약속)인, 오전 7시, 훈련원(오늘날 동대문운동장 근처 - 편집자 주) 전차종점에 이르니, 동행을 약속한 동반 중 한 사람도 아직 오지 않은지라. 기다린 지 30분 만에 낙재(樂齋) 홍일창(洪一昌) 군이 도착하고, 함께 기다린지 30분 가량, 8시가 되자 일웅(一熊) 이두성(李斗星), 운곡(雲谷) 최두선(崔斗先) 두 사람이 도착하니, 일행 4인이라. 곧 왕십리행 전차에 몸을 싣고 종점에 내리자, 시가는 아침 연기에 잠기었고, 아침해는 동천에 붉었다 


살곶이다리(箭串橋), 뚝섬[纛島; 성동구 성수동. 둑제(纛祭)를 지내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을 지나 서남으로 삼전도(三田渡)를 훑어보며 송파나루[松坡津]를 건너기는 10시경이다. 나루터 가 주막[津頭江店]에서 요기하고 몇 이랑[數畝]을 더 가니 산기슭에 엿이 놓여 있는데, 이는 지키는 주인도 없고 다만 엿 목판만 길가에 놓아 두어 누구나 돈을 놓고 엿을 집어 먹게 된 순후(純厚)한 시골풍경이 그대로 표현되었더라. 


일행은 호기심으로 각 1푼의 돈을 던지고서 각각 1개씩 엿을 집어서 먹고 가며 한참 동안 이 사회 조직이 어떠하니, 사회 도덕이 어떠하니 하며 의론이 분분한 화제가 되어 가는 줄 모르게 남한산 밑에 다다랐다. 시원한 시냇가 모래밭[淸溪邊白沙上]에서 준비성이 많은 낙재 군이 가지고 온 흰떡[白餠]을 나누어 먹고 한달음[一路]에 곧장 진남루(鎭南樓)로 올라가니 이곳은 남한산성 남문이다. 


남한산성은 일명 일장(日長)산성이니 백제 시조 온조와 13년 7월에 목책[柵]을 세우고 백성을 이주하게 하며, 9월에 성을 쌓고 군(郡)을 정하였다가, 백제가 신라에게 망한 후 한산주(漢山州) 남한산주 등 이름을 거쳐 오다다가 이조 인조왕 14년 병자에 청나라 군사가 침범해 오거늘, 인조가 이 성에 파천하였던 팔자 기구한 산성이다.


성 안에는 백제 시조를 제사하는 숭렬전(崇烈殿)이며 삼학사를 제사하는 현절사(顯節祠)가 있고,  연무관, 행영(行營) 등 반퇴전와(半頹全臥; 반쯤 퇴락하고 전부가 허물어진)의 여러 전각[百殿]이 널려 있고, 단갈퇴비(短碣頹碑)는 곳곳 흩어져 있어서 아래 위 수천년의 파란을 말하는 듯.

왼쪽 사진에 춘암상사의 모습이 보인다(왼쪽에서 두 번째). 오른쪽 사진은 상단에 있는 사진.

시남해막(市南海幕)에서 점심을 하고 동문을 나서니 인가는 하나도 없는데, 즐비한 물방아간은 하나의 기이한 풍경이며, 길가에 기해주필(己亥駐蹕 : 임금이 나들이하는 도중에 수레가마를 잠시멈추고 머무르거나 묵는 일)라고 큰 글자로 쓴 거대한 바위가 있으니, 이는 이조 종종 임금이 기해년에 영릉(寧陵; 조선 제17대 왕 효종과 비 인선왕후 장씨의 무덤.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 산83-1번지)에 행차하실 때 이 바위에 주필하였다 한다. 이 길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경안면(慶安面) 경안리에 이르니, 이곳은 군청소재지요 때마침 농산물 품명회의 제2일이라.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각종 경기와 연예로 불야성을 이루었더라. 여기에서 3정(町) 떨어진(許) 역리(驛里)에 광주군 종리원이 있는지라 종리원에 이르니 종리사 한순회(韓順會) 씨 이 10 수명의 교우(敎友)가 막 저녁 식사를 하고 있던 중이요, 시간은 오후 8시경이더라.


15일 이른 아침 6시 출발. 서리가 내리고 꽁꽁 언 길[霜天凍路]를 10리쯤 가서 대쌍령(大雙領) 고개에 이르니 붉은 해가 막 떠오르더라. 발걸음을 재촉하여 곤지암 주막에 이르러 휴식을 취하니 길가 보통학교에 ㅂ바위가 있고 바위 위에는 나무가 서 있고, 나무에는 기괴한 일화가 전해온다. 즉 바위 너머 산꼭대기에는 임진년의 명장 신립의 묘가 있는지라. 그 묘를 쓰고자 할 때 풍수의 말이 그 바위가 비쳐서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므로 곧 바위가 스스로 갈라졌다 하며, 그 신 씨의 묘는 분상이 3개이니, 신 장군이 충주 탄금대 물속에서 전사한 뒤 그 자손이 뒷날에 고기 한 마리를 사니, 고기 뱃속에 한 금관자(金冠子)가 있으므로, 그것을 매장할 때 3분은 아마 훗날 도굴을 방지함인 듯하다고 하더라.


실촌(實村) 장곡(長谷)을 지나 동북으로 원적산(圓積山)에 오를 때, 산은 해발 460여 척의 준봉이라. 산의 서쪽 기슭[麓] 길재마루로 넘으니 산은 동북으로 삼중사중으로 둘러쳐진 심산(深山)이요, 주봉 중에 배불뚝이로 튀어나온 곳[腹突起處]에 신사 산소가 있는지라. 우리 일동은 산소에 참배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춘암 선생 이하 3주임(崔麟, 李仁淑, 崔碩連-신도관 관정)과 한암[閑菴 吳世昌] 실암[實菴 權東鎭] 현암[玄菴 鄭廣朝] 3도사가 자동차로 현방리(玄方里, 산소에서 10리)에 내려서 오시므로, 우리 보행단 일행은 산에서 내려가 마중[奉迎]하였다.


춘암 선생께서는 노곤(路困)으로 (산 아래에) 머무르시고, 낙재 군을 더한 그 나머지 자동차로 오신 일행은 성묘 후 곧 돌아왔다. 


신사께서 무오(1898) 6월 2일 오후 2시에 경성감옥에서 수형(受刑)하신 후 그 시체를 거두어 광주(오늘날 송파) 이상하(李相夏)의 산에 매장하였더니, 그 후 이상하가 도(道)에 이의(二意)가 있어서 묘를 옮길 것을 요구하므로, 성사주[聖師主, 의암 손병희] 이하 여러 두령이 상의하고 포덕 41년(1900, 경자) 4월 말일에 송암(松菴 孫天民) 춘암(春菴 朴寅浩) 두 분께서 김지연(金志淵) 외 한 사람을 데리고 파묘하여 시체를 모시고 2일 만에 원적산 아래 현재 묘소에 이르니 의암성사께서 오셨고, 그 다음날 정암(正菴 李鍾勳), 인암(仁菴 洪秉箕) 두 분이 오셔서 그날, 즉 5월 2일에 장례를 행하였다 한다. 


그리고 신사의 시체는 두골 뒷부분이 없으시니 이는 수형하신 시체가 옥문에 나오실 즈음 어떤 흉한(凶漢)이 칼로 쳐서 떨어졌다. 이에 백공단(白孔緞)으로 염을 하여 장례를 행하셨다 한다.


16일 이른 아침, 이, 최 두 사람과 함께 춘암 선생을 따라서 신사의 묘소에 성묘하고 곧 내려와 자근데미 고개로 금하면(金河面) 송곡(松谷)을 지나 현방리에 이르니, 제암 한순회 씨가 보낸 인력가가 있는지라 선생께서는 인력거로 행차하시고, 우리 세 사람은 도보로 이천읍에 이르렀다.


17일 이, 최 두 사람은 노독(路毒)으로 피곤하여 자동차로 수원으로 가고, 나는 짧은 대나무 지팡이(短笻)로 친구를 삼아서 광주 종리원에 이르니, 오후 2시경이라. 춘암 선생께서 계시더라.


18일 오전 11시에 선생님[先生主]을 모시고 자동차로 서울로 돌아오니 오후 1시 반. (끝) 

 

해월 최시형 신사 묘소 (photo by Ⓒ 삼암 표영삼; 사진 복제 엄금)
현재의 해월신사 묘소(2020.01.04 Ⓒ 박길수)

[편집실 주] 아래 내용은 위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동학천도교인명사전>>(이동초 지음, 모시는사람들 펴냄)에서 찾아 게시한다. 


○박내홍(朴來弘)-혜암慧菴, 아호는 玄波, 1894년 9월 2일 덕산군 막동에서 동학접주 朴尙浩(朴相浩)의 장자로 태어나 종숙인 대접주 박인호(춘암상사)의 아들로 입양되었다. 1911년 경성관립정동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한 후 보성중학교를 졸업(5회-1917)하고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학업을 중단하다.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 발기인), 1920년 청년회를 조직하고 1924까지 (간사)중앙집행위원, 경성부종리원 종리사, 1925년에 중국 북경대학에 입학하였으나 교회사정이 허락되지 않아 곧 귀국하였다. 귀국 후 청년회중앙상무위원과 천도교청년동맹 중앙집행위원, 천도교청년동맹이 총동맹으로 변경되자 총동맹대표위원 및 신간회 총무간사로 활동하였으나 1928년 10월 5일 경운동 교회 경내에서 괴한 서을봉에게 피살당하였다. 9일 천도교대교당에서 천도교청년동맹과 신간회본부 연합장(위원장 권동진)으로 영결식을 거행한 후 고양군 용강면 신수철리(금호동) 공동묘지에 안장, 묘정에는 신간회 동지들이 작은 묘비가 세워주었다. 그 후 1936년 묘소를 갈현동 가족묘지로 옮겼다가 1964년 3월 춘암상사 묘소와 함께 포천군 소흘면 무봉리로 다시 이장하였다. 정부에서는 1995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00년 11월 5일 천도교청년회에서 묘정에 또 하나의 묘비를 건립하였다.  


○홍일창(洪一昌)-범암範菴, 홍세환(洪世煥)을 개명, 1890년 1월 3일 서산군 지곡면 문관리 출신의 계대교인, (본적-청주군 북이면 석화리)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청주군 청북학교 교감, 경성 종학학교 교장, 청주교구 강도원, 충청북도 의사원, 종리원서무과원, 경성부 대신사백년기념회원, 청년당중앙위원, 중앙종리원서무과 종리사, 1919년 3월 1일 최동호(崔東昊)등과 함께 조선은행 앞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같은 해 5월 상해(上海)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독립신문(獨立新聞)」 제작에 참여하고자 서울에서 최동호 정창수(鄭昌洙)등과 협의하고 군자금 모집계획을 세워 추진하려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1920년 10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9년 7월 23일 환원하였으며 1990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이두성(李斗星)-단암丹菴, 별호 一熊, 1890년 11월 25일 태천군 장림면 재남리에서 楠菴 李貞漸(李鼎漸)의 차남으로 출생하여 1903년에 입교하다. 12세까지 한문을 수업하고 16세에 경성광무학교를 수업, 정주공립보통학교 졸업, 경성양원여학교 교원을 거쳐 1910년에는 태천군 사범강습소 강사를 역임하다.그 후 관립평양고등학교 교원양성소를 졸업하고 영변보통학교, 태천보통학교, 벽동보통학교, 경성보성소학교 등에서 교편생활, 개벽사발행인, 청년회간무, 포덕과원 및 교회월보과원, 서무과종리사, 청년당 중앙위원(1923: 6회), 경성부 대신사백년기념회원, 포덕과 종리사, 성도관서 및 법도관서, 법도관 관서 등을 역임하다.1929년 4월 발병하여 1년간 치료하다가 1930년 5월 8일 41세로 경성 계동에서 환원하였다 


○최두선(崔斗先)-천도교 재경학생친목회 서무부원, 청년당본부 농민부위원(1927), <교회월보>1924.7.15. 


○오세창(吳世昌)-한암閒菴, 아호 葦滄. 閒道人, 1864년 7월 15일 서울 수표동에서 중국어 역관(譯官)이자 구한말의 선각자 吳慶錫의 차남으로 출생하다. 역과에 합격하여 1885년 박문국 주사시보를 거쳐 1886년 박문국주사로서 <漢城旬報>기자를 겸하였다. 1894년 군국기무처 낭청(軍國機務處郎廳) 총재비서관이 되었다가 관제개정 이후 농상공부 참의, 우정국통신국장 등을 역임하다. 1895년 10월 을미사변 직후 권동진, 정난교 등과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곧 귀국하였다. 1897년 일본문부성의 초청으로 동경외국어학교에서 조선어교사로 1년간 체류하였다. 1902년(광무5년)개화당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하여 박영효, 조희연, 장박, 유길준, 권영진(仲兄), 유세남, 김옥균 등과 교류하였으며 천도교주 손병희를 만나 권동진과 함께 1905년 11월 13일 입교하였다. 1906년 1월 손병희와 함께 귀국한 후 천도교에서 창간한 <만세보>사장을 역임하는 한편 1907년 3월에는 의친왕의 수행원으로 도쿄에 갔다가 천장절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고 그해 7월 10일에 귀국, 11월 중추원 부찬의 주임관 2등(奏任官二等)에 임명되었다. 1907년 11월 일제 통감부에 의하여 강제 해산된 大韓自强會의 후신으로 창립된 대한협회 부회장과 일간지 <대한민보>사장으로 활동하였다. 1910년 10월 1일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자 남작 작위와 은사금이 내려졌지만 거절하였다. 천도교 중앙총부가 설립되자 교수, 이문관장, 고문 및 교수, 현기관장, 종법사 등 교직을 역임하다.민족대표 33인의 1인으로 삼일운동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고 3년간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1년 12월 22일 권동진과 함께 출옥하였다. 일제강점기 중반 이후 자택에 칩거하며 서예가, 전각가(篆刻家) 및 서예학과 금석학 역사가로 주로 활동했다. 1945년 해방 후 서울신문사명예사장, 민주의원, 대한민국촉성국민회장, 전국애국단체총연합회장 등을 역임하다.이후 남북협상과 단정수립론이 갈렸을 때는 입장표명을 하지 않다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에 참석하였다. 한국동란 때 대구로 피난하여 1951년 4월 나인협의 장례위원장을 맡기도 하였으며 1년간 병석에 있다가 1953년 4월 16일 대구시 대봉동 31번지 자택에서 90세로 환원하여 사회단체장으로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묘소는 망우리 애국지사 묘역에 있으며 1962년 정부에서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권동진(權東鎭)-실암實菴. 호는 憂堂, 1861년(신유) 12월 15일  괴산군 소수면 아성리 출생, 유년기에 윤치소, 이종훈, 의친왕 등과 필운학당에서 수학, 19세에 조선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2년 과정을 마치고 육군초관으로 3년간 근무한 뒤, 함안군수를 1년간 역임하다.그 후 거문도첨사로 있을 때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아 1895년 10월 을미사변 직후 오세창, 정난교 등과 함께 화를 피해 일본으로 망명하여 11년간 동경에 체류하면서 1905년 11월 13일 손병희의 권유로 오세창과 함께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1906년 1월 손병희와 함께 귀국하여 漢城 南署 茶洞 거주하면서 1906년(광무 9년) 6월 3일 윤치소, 김성수, 신상우, 김필수 등 90여명과 함께 동덕여자학교 설립에 사재를 출연, 동덕여학교 재단 이사,  1907년 9월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되어 2개월간 근무하한 후 오세창 등과 <萬歲報〉와〈大韓民報〉를 발행하였다. 을미사변 관련자로 지목된 인물들을 석방할 때 김홍집, 정병하(鄭秉夏), 조희연(趙羲淵), 유길준, 장박(張博), 이두황, 이범래(李範來), 이진호, 조희문(趙羲聞) 등과 함께 순종의 특명으로 사면. 1918년 11월 오사카(大阪)를 방문, 매일신보(每日新報)에 소개된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 14개 조항을 읽고, 12월에 오세창ㆍ최린 등과 함께 손병희에게 독립운동을 상의하였다. 삼일운동으로 투옥되었다가 1921년 12월 오세창과 함께 출옥하였다. 1926년 육십만세운동 계획에 관여하여 피검되었고, 1927년 신간회 부회장으로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민족주의와 공산주의가 연합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할 것을 논의하였고, 공산당과 급진민족주의자들이 국민당을 조직하여 민족독립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사전검거로 실패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신간회 민중대회 사건으로 징역 1년의 옥고를 치렀고 조선중앙일보 고문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한편 1906년 천도교중앙총부 설립 때부터 중앙총부 고문, 서응관장 및 전제관장, 전제관장, 도사, 교육과 및 포덕과 주임, 종리사장, 종법사, 대령, 장로 및 대종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광복 후 1945년 12월 14일 결성한 신한민족당 당수와 민주의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국민대회준비위원회 위원, 임시정부환영준비위원회 위원장,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장,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등으로 활동하다. 1947년 3월 9일 장호원 자택에서 87세로 환원하였다. 3월 15일 하오1시 천도교당에서 민주의원와 국민의회 및 종교단체 연합장으로 南相喆의 사회로 金九의 식사. 洪命憙의 애도사, 동덕여중생의 위령송과 각단체 대표들의 조사, 분향 등의 영결식을 거행한 후 홍제동 화장 장지로 향하였다. 1962년 정부에서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고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묘소를 조성하였다. 


○홍병기(洪秉箕)-인암仁菴, 1869년 12월 10일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에서 출신으로 1892년 입교, 접주, 별집강, 대접주를 지내고 水淸大領으로 1894년 10월 여주 용인에서 동학군을 이끌고 동학혁명에 참가하였다, 1902년부터 박인호와 이종훈 등과 함께 일본을 왕래하면서 갑진개혁운동에 참여하였다. 漢城 南署 大山林洞에 거주, 중앙총부 도집 및 고문과원, 이문관장, 혜양과원, 중앙총부 진리과원, 경도사, 전제관장 서리, 현기사장 서리, 현기사장 서리, 대종사장, 장로 등을 역임하다.삼일운동으로 2년간의 옥고를 당한 후 잠시 종법원-종법사 및 포덕과주임으로 활동하였으나 1922년 12월 이종훈, 최동희, 이동락, 김봉국 등과 천도교연합회로 분립하여 이탈한 후 만주로 건너갔다. 1926년 길림성에서 고려혁명당 창당에 참여하고 고문으로 추대되었다가 일경에 붙잡혀 신의주 감옥에서 2년간 복역, 1929년 7월 가출옥 후 서울에서 거주하면서 중앙종리원 고문을 역임, 1949년 1월 26일 교통사고로 행당동에서 환원하다. 묘소는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한순회(韓順會)-제암霽菴, 1885년 12월 14일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 율리 출신으로 1906년 1월 14일에 입교, 광주군교구 금융원, 공선원, 광주교구장, 경기광주군 종리사, 광주종리원 종리사, 대신사백년기념회원, 광주군위원, 경기연맹집행위원, 해월신사백년기념위원, 신간회광주지회 위원장, 경기도연맹 집행위원, 觀信包 주간포덕사, 교주장실 봉교 및 봉도를 다년간 역임하다. 경성부 인의동으로 이전, 도훈, 관신포 선도사. 광복 후에는 전국대회준비위원회 위원장, 상주선도사, 한국동란 후 교화원장을 역임하고 장로에 추대되었다. 1927년 신간회 광주지회장으로 활동하고, 1933년 이후에는 봉도로 있으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할 목적으로 교도들로부터 특별희사금을 모금하다 피체되어 고초를 겪었다. 1961년 1월 28일 마장동 자택에서 환원하였으며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최석련(崔碩連)-계암桂菴, 1881년 의주군 월하면 마룡동 출신, 1909년에 입교, 의주대접주(1904), 林永秀 崔致善 등과 성화회를 개설, 의주대교구장, 의주교구장, 대안동 교당건축위원, 예비도훈, 의주부교구제1강습소 교리전문과 수업, 의주교구장, 도선사-제2회 연성수련, 의주군교구장, 의주군교구 금융원, 의주대교구장 및 의주교구장, 경도사, 의주교구 종무사 및 종법사, 의주교구 경도사, 제54구-종법사, 경리과 주임종리사, 경성부 대신사백년기념회원, 순성포 주간포덕사, 신도관 관정, 부대령, 誠源布-주간도정, 법정, 대령, 고문, 현법사, 화동85 거주, 1938년 9월 1일 오전 5시 의주군 월하면 마룡리 고향 집에서 환원하였다.


○이인숙(李仁淑)-상암桑菴, 아호는 小山, 본관은 陽城, 1875년(乙亥) 6월 3일 정평군 춘류면 선덕리 출신으로 1900년 경자년에 입도(연원-韓泰然), 1903년 도일하여 경도 부립제2중학에 입학하였으나 병으로 1년 만에 퇴교, 중앙총부공선관 서계원, 공선관 서계원, 대종사 서계원, 교훈, 도훈, 영흥대교구장, 도사, 도사, 전제관장, 삼일운동으로 피검, 경리과주임, 교인대회 대표위원, 서무과 주임종리사, 順敬布 주간포덕사, 성도관정, 종법사장, 상무도정, 신원포 주간도정, 법정, 고문실 고문, 현기실 현법사, 천도교본부도령. 경성부 화동 87-1거주, 총부고문, 도훈 및 선도사, 연성사 등을 역임하다.장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 등에 선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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