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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un 02. 2020

해월신사 일상생활

-6월 2일 밤, 신사 추모담회회 석상에서 

* 편역자 주 : 이 글은 천도교회월보 통권165호[1924년 6월호(1924.6.15)]에 게재된 글을 현대어로 바꾼 것입니다. 해월신사 사모(師母)로서 이때까지 살아 계시던 분은 손씨 사모님(의암 손병희 선생의 여동생)입니다. 이때는 의암 손병희 선생의 가회동 저택 바로 위쪽에 기거하셨습니다. 

** 이 글은 해월 신사 사모이신 손씨 사모의 구술을 채록한 형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사(神師 - 해월 최시형)께서 평생에 검소(儉素)로 위주(爲主)하셨습니다. 그래서 옷은 반드시 토목(土木)으로써 안과 거죽이를 맞추어 입으시되, 항상 낡은 것으로써 거죽이를 만들고 새것으로써 ㅏㄴ을 만들어 입으시사, 말씀하시되 "너희들은 남의 눈을 위(爲)하지 말고 내 살을 위(爲)하라" 하셨습니다. 일찍이, 교인 가운데서 명주옷을 드리는 이가 있거늘, 신사께서 그 옷을 고쳐 거죽의 명주로써 안을 지어 입으셨습니다.


그리고 평생에 부지런하을 좋아 하사, 조금도 쉬지 않으셨습니다. 항상 말씀하시되, "한울도 쉬지 아니하는데 사람이 되어 한울이 주는 음식을 먹으면서 부지런하지 아니하면 이는 한울님으 뜻을 위반함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평생에 이사(移徙)를 자주 하셨습니다. 그러나 간 곳마다 영구(永久)히 살 것처럼 화목(火木)도 많이 장만하시며, 채전(菜田)도 친히 지음(김) 매시사, 조금도 게으르지 아니하시더니다. 그러다가 또 다른 곳으로 이사하게 되더라도 떠나기 전날까지 나무하기와 지음매기를 여전히 하셨습니다. 


혹 가인(家人)들이 이렇게 "내일 이사할 때에는 다 던지고 갈 터인데, 무엇하려고 그리 애쓰십니까?" 말한즉, 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여기 쌓아 놓은 나무와 심어 놓은 소채(蔬菜)는 우리가 비록 때지 않고 먹지 않을지라도 내 뒤에 오는 사람이 때고 먹을 것이오. 우리는 또 가는 곳에 반드시 땔 나무와 먹을 소채가 있을 것이니, 결국은 내가 때고 내가 먹는 것과 마찬가지니, 어찌 이사한다고 아무 일도 아니하고 거저 시일을 허비하리오. 사람의 일하는 것은 당연한 직분이라" 하셨습니다. 


일찍이, 어린 아해(兒孩)들이 가지고 놀던 돈(錢)을 내어 버림을 보시고 도리어 칭찬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아이 때[兒時]부터 돈을 알아서믄 못쓰는 것이니, 될 수 있는 대로 아해들께 돈 관념을 부쳐주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15세 시에 남의 집에 기식(寄食)하고 계시다가 그 집 주인이 '머슴애'라 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곧 그 집을 떠났습니다. 그 후부터 가인(家人)들로 하여금 용인(傭人)에게 대하여 차라리 일군이라 할지언정 머슴이라는 말은 입 밖에 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일찍이 열아홉 살 먹은 장자(東犧 兄)가 죽었을 때에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나는 것도 한울(의 일)이요 죽는 것도 한울(의 일)이니, 이제 나는 것을 기뻐하고 죽는 것을 슬퍼함은 한울을 원망함이라" 하시고 가인(家人)으로 하여금 울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동희(東犧) 나더 해에 강원도로부터 돌아오시다가 중로에서 비를 맞아 의복이 몹시 젖으시되, 마른 옷을 가라입지 아니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지금 서장옥(徐長玉)이 수인(囚人)으로 있는데, 내 어찌 집에 편한히 있으리오" 하시고 젖은 옷으로 그냥 밤을 새었습니다. 그리고 서장옥이 재감(在監) 시에는 꼭 이불[衾]을 덥지 아니하시고 주무셨습니다. 


여주 해월 최시형 선생 묘소(c.20200104. 박길수)

[이하는 봉암(浲菴) 나용환(羅龍煥) 선생의 증언록입니다]


신사께서 일찍이 경주 황오리(皇吾里) 풍헌(風憲 - 今 面長)이 되시사 면민이 내로(來訴)하는 일이 있으면 오직 그 말을 들을 뿐이요, 그 시비(是非)를 말하지 아니하시다가 양편(兩便)을 다 불러서 각기 의견을 들은 후에야 비로소 시비를 판정하시므로 면민들은 그 판결에 대하여 복종치 아니함이 없었습니다.


평생에 근면으로 위주하시사, 항상 휴지(休紙)를 연(撚-비틀 연 = 꼬다)하여 승(繩-노끈)을 결(結-꼬다)하시다가, 혹시 지연(紙撚)이 없어서 놀게 되는 때믄 그 이결(已結)하였던 승(繩-노끈)을 풀어서 도로 원지(原紙)를 만들어가지고 고쳐 연(撚)하여 승(繩)을 결하시사, 조금도 시간을 허송치 아니하셨습니다. 


항상 관후(寬厚)하시사, 교인 중에 서인주(徐仁周)가 도법(道法)을 어기는 행위가 많이 있으시되, 한번도 고약한 사람이란 말씀을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내가 서인주 있은 후로는 가학가사(可學可師)의 사(事)가 많다"고 하실 뿐이었습니다.


더욱이 상밀(詳密)하시사, 어디로 떠나실 때면 반드시 행리(行李-보따리)를 견고(堅固)하게 결속하시되, 혹 누락된 것이 있는가 하여, 몇 번씩 풀어본 후에 고쳐 결속하셨습니다.


일찍 전라도 교인이 와서 난법난도(亂法亂道)의 말을 함을 보시고 "고약한 사람이라"고 책망(責望)하셨더니, 그 사람이 가다가 중로에서 졸사(卒死)한지라, 신사께서 들으시고 크게 놀래사 그 후부터 어떠한 사람에게든지 '고약한 사람'이란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정유(丁酉 : 1897) 4월 5일 향아설위(向我設位) 법으로 기념 예식을 행하시고, 그 향수물(享需物)을 친히 일반 참례인에게 균일하게 나누어 주시며 말씀하시되, "금후부터의 이 평균분배(平均分配)는 후천오만년의 대법이라"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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