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善), 선심(善心), 진선미(眞善美)의 조선민족, 장래의 등불
* 이 글은 "<개벽> 통권 제5호 (1920.11.1), 2-10쪽 (권두언)"에 실린 글입니다. <개벽강독회>에서 2020년 6월 22일 발제강독하였습니다. 그날의 발제를 참조하여, 역자가 현대어로 완역하여 게재합니다.
** 최근 코로나19 팬데믹에 즈음하여 "세계는 왜 한국에 주목하는가" 하는 것이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직접적으로는 투명하고 신속한 방역, 행정 체계와 이를 가능하게 하는 IT인프라 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한국인이 이러한 재난에 '일사불란'한 대응을 하는 경우는 우리에게 (일부 서구 칼럼니스트들이 지적하듯)'순응의 DNA가 있어서'가 아니라, 한국인이 기존의 틀 - 사회적 관성에 구애되지 않고 본능적으로 '진선미'의, 최선의 결과를 지향하는 심성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100년 전의 이 글은 바로 이 점을 예언적으로, 선언적으로, 그리고 창의적으로 이미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래서 <개벽>이라는 잡지의 명성이 허명이 아님을 다시 한번 알 수 있었고, <다시개벽>의 길이 보람차고 흥미진진, 아름답고 행복한 길이 되리라는 예감을 얻었습니다.
*** 한국인(조선인-조선민족) 고유의 심성이 '선(善)'이라는 지적은 제가 보건대, 너무도 탁월하고, 지구생명공동체 시대에 재발견, 재조명, 재창조해야 할 미래지향적인 인민(시민)의 심성입니다.
**** 오늘날 "저 사람 참 착하다"는 말이나 "저 사람은 착하게 생겼다"라는 말은 "저 사람은 참 무능하다"라는 말로 쓰이고, 또 "저 사람은 촌스럽거나, 못생겼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이 말은 '착하다'는 말에 대한 모독이고, 현대 '물질문명 사회'의 '병듦'을 여실히 보여주는 언어 상황입니다. 이제 "법 없이도 살 사람"이 특별히 여겨지지 않는 (좋은 뜻으로든, 나쁜 뜻으로든) '평범한 사회' '착한 것, 착한 사람'은 문자 그대로 착한 사람, 착한 것으로 대접-대응 받는 사회 - 그것이 곧 '사람 사는 세상'이며 '사람과 만물과 더불어 살며 사랑하는 세계'라고 믿습니다.
***** '현대어역'은 최소한으로 하였고, 꼭 밝혀야 할 원문(한자)는 [ ]에 표기하였습니다.
세계의 어떤 민족을 물론하고 이미[旣] 민족으로써 세계의 다른[他] 민족과 대립이 된 이상은 그에 따라 민족과 민족의 사이[間]에 대립할 만한 정신적 혹은 성질적 혹 물(物)이 고유(固有)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 풍속, 종교, 도덕, 습관 등 - 모든 것에 다 같이 특수(特殊: 각각 다름)의 차이가 나타날 뿐 아니라, 그 민족의 것으로서 민족 전체를 대표할 만한 즉 언어, 풍속, 종교, 도덕, 습관을 총 대표하여 그로써 융화되고 순화된, 어떤 종류의 특성이 그 민족의 가운데[間]에서 스스로 표현케 되는 것이라. 개인으로써 개인성(個人性)의 특질이 각각 다름[各殊]과 같이 민족도 또한 민족으로서의 특성이 각각 다르[各異]나니 그것을 일컬어 그 민족의 ‘민족성’이라 통칭하는 것이다. 각 민족은 각각 그 민족에 있는 특수의 민족성을 가졌음으로써 그 각 민족성에 기인[因]하여 나타나는 문화의 빛[光]도 또한 다소 특수한 색채를 발휘함은 실로 피치 못할 선천적(先天的) 약속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로다.
이에 갑을병(甲乙丙) 각 민족이 동일한 문명의 조류(潮流)를 받았을지라도 그 문명이 각각 그의 민족성에 의하여 조화(調和)되며 단련(鍛鍊)되며 융화(融化)되며 영화(靈化)되는 사이[間]에는 이에 방식(方式)과 조직(組織)과 색채(色彩)가 판이한 특종(特種)의 문화를 생성[生]하게 됨은, 비유[譬]컨대 동일한 비[雨], 동일의 빛[光]을 받은 각 식물이 각각 그 식물성(植物性)에 말미암아 복숭아나무에 복숭아를 맺으며[實] 살구나무에 살구를 맺으며[成], 은행나무에 은행[杏子]을 맺음[生]과 동일하나니, 그러므로 그 민족의 문화의 장래와 과거를 연구코저 하면 먼저 그 민족성의 여하를 고찰하는 것이 필요한 경로라 할 것이다.
동일한 그리스 로마의 문명 조류가 현대 서구 각 민족 사이에 유입하는 때에, 영국은 영국성(英國性) 문화, 프랑스는 불국성(佛國性), 독일은 독일성, 러시아는 노국성(露國性), 미국은 미국성(米國性) 각각 그의 특수한 문화적 색채를 띠게 하였고, 동일한 인도차이나의 고대 문명이 동양제국에 보급함에 이르러 일본은 일본성, 조선은 조선성, 중국은 중국식[支那式], 인도는 인도식 문화가 생성케 되었나니, 이것은 민족으로써 다소 특수한 민족성을 가졌음으로써이라.
일찍이 어떤 외국인이 동양 3국의 고대 예술(특히 佛像 조각)에 대해 일언(一言)하되 중국은 순후(純厚)에 선(善)하고, 일본은 색채에 능(能)하고, 조선의 예술은 이 양자를 겸전(兼全)한 관(觀)이 있다 하였나니, 이는 지리적으로 관찰할지라도 그럴듯한 고찰이라 할지라. 원래 조선은 중국의 예술을 받아들여 그것을 한층 더 미화(美化)한 후-에 일본에 전하였으므로 조선의 예술은 스스로 이 양자를 겸전하였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관찰이 능히 동양 예술관에 적중한지 여부는 별문제로 하고, 여하튼지 동일한 문명을 받은 3국의 예술이 스스로 그에 대한 다소의 차이가 생기게 되는 것은 사실이며, 그리하여 그 차이는 각각 그의 민족성에 따라 표현케 될 것도 의심할 바 없는 일이니, 그러면, 각 민족은 그 민족성이 있어야 처음으로 민족의 민족된 가치를 나타낼 것이요, 민족의 민족된 표장(表障)이 있다 할 것이 아니냐.
이와 같이 세계 각 민족은 각각 그 민족적 정신의 특수한 발휘가 있다 하면, 이제 그를 민족심리학(民族心理學) 상으로 관찰하여, 우리 조선민족에게는 무엇이 가장 조선민족을 총대표 할 만한 민족성이 될까. 다시 말하면 조선민족에게도 민족적으로 많은 미점(美點)과 악점(惡點)이 교차하여 있을지라도, 그중에 가장 어떠한 특성이 조선민족의 정신화(精神化)를 대표할만한 특성이 될까. 이를 한마디 하여 사회 비판을 구함도 또한 한가로운 사람의 한가로운 일이 아닐 것이며, 그리하여 그를 전체 민족의 활동상에 도약케 하여, 민족적 권선징악의 미덕을 발휘케 함도 필요하니, 그러한 후에야 가히 민족의 참 의의가 나타날 것이오. 또한 장래 문化의 참 가치가 표현될 것이로다.
우리가 유대인을 말할 때에는 스스로 그의 금욕성(禁慾性)을 연상케 되며, 인도인을 말할 때에는 스스로 그의 형이상학적(形以上的) 이상심(理想心)을 연창케 되며, 중국인을 말할 때에는 스스로 그의 근검심(勤儉心)을 연상케 되며, 일본인을 말할 때에 충심(忠心), 프랑스인을 말할 때에는 진취심(進取心), 영국인을 말할 때에 진실(眞實) 보수(保守)의 마음을 연상케 되나니 이와 같이 각 민족과 그 민족적 특성은 서로 연상적 표현이 된다 하면, 조선민족은 그 민족의 특성으로 어떠한 성질을 연상케 될까. 물론 조선은 역사가 장구(長久)한지라 스스로 언어(言語)가 다르며 풍속이 다르며 종교도덕(宗敎道德)이 다르므로, 그것으로 민족이 민족된 특점(特點)을 가졌다 할지라도 끝에 가서 마침내 그 언어, 풍속, 종교, 도덕을 대표할 만한 정신화적(精神化的) 특성이 없지 않을 수 없으니,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어떠한 것이라고 할까.
나는 일찍이 어떤 외국 잡지에서 동양인의 심리를 평한 가운데, “중국인은 직심(直心), 일본인은 충심(忠心), 조선인은 선심(善心)이라.”고 쓴 구절을 한 구절을 언뜻 본 일이 있었다. 나는 그로써 능히 동양 3민족의 심리를 대표한 관찰이라 추천하는 동시에 더욱이 조선인의 민족성을 적당히 고찰하였다 자인하노라.
과연 조선인의 민족성은 선(善)이니라. 선(善) 한 글자로 능히 조선인의 미덕(美德)을 발휘할 만 하니라. 조선인은 선으로 능히 동방군자(東方君子)의 나라가 되었던 것이요, 반도의례(半島禮儀)의 나라가 되었던 것이요, 의관문물(衣冠文物)의 찬연한 도덕적 민족이 됭ㅆ더니라. 그러므로 조선인을 논하면 반드시 선(善)을 연상치 아니치 못할 것이요, 선을 논하면 또한 반드시 조선인을 연창시 아니치 못할 것이니, 조선인의 미덕(美德)은 거의 이 선(善) 한 글자로써 능히 그 정신화(精神化)를 확연히 구분하였다 할 것이다.
또한 조선인의 민족성인 이 선심(善心)은 실로 역사적으로 심원(深遠)한 근거로부터 우러나온 것이니, 아니 유사 이전에서 조선인은 이 ‘선(善)’의 이상을 동경하던 민족이라 할 것이나, 그것은 단군신가(檀君神歌) 중에 선(善)의 이상을 찬미한 점으로 보아도 능히 이를 증명할 수 있나니…
어아어아 우리 한배금 높은 은덕(恩德)
배달국에 우리들이 백천만년 잊지 마세
어아어아 ‘선심(善心)은 활이 되고 악심(惡心)은 과녁[貫射]이라
우리 백천만인 활줄같이 바른 선심(善心) 활줄같이 일심(一心)이라.
열탕(熱湯) 같은 선심(善心) 중에 일점(一點) 설(雪)이 악심(惡心)이라
이는 단군신가(檀君神歌) 중 1절인데 이와 같이 조선인의 ‘선심(善心)’은 그 발원이 역사 이전에서 시작하여 단군 시대에는 이미 종교적으로 순화되었으며, 고구려 때에는 이미 군가(軍歌)로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인의 ‘선심주의(善心主義)’는 민족적 특성이 되어 사천년의 장구한 광음과 함께 순화되었으므로, 조선인 중에는 교화 중 모든 것에 속한 것이 선으로써 표방치 아니한 것이 없다. 사람을 찬양[贊]함에 선인(善人)이라 하며, 행실[行]을 찬양함에 선행(善行)이라 하며, 일을 찬양하며 선사(善事)라 하며, 말을 찬양함에 선언(善言)이라 하며, 말하기를 “적선(積善)의 가(家)에 반드시 여경(餘慶)이 있다” 하며, 말하기를 “복(福)은 선(善)에 말미암아[緣] 생긴다” 하며, 자손을 가르침[敎]에는 반드시 “선(善)하라” 하며 제자[徒弟]를 가르침[訓]에 반드시 “선(善)하라 하며”, 어린아이[幼少]를 지도[導]함에 반듯이 “선(善)하라” 하나니, 이것은 실로 조선인의 미덕(美德)이며 미풍(美風)이었다. 자랑거리며, 광채(光彩)이겠다. 우리가 지금 신문화(新文化)의 수입(輸入)을 주창(主唱)하며, 신도덕(新道德)의 건설을 절규하는 오늘날에 즈음[際]하여, 아무리 구도덕(舊道德)·구인습(舊因襲)이 여지없이 파괴를 당한다 할지라도 이 ‘선(善’ 한 글자는 영원히 보존하며, 영원히 향상케 하며, 영원히 미화(美化)케 하여, 우리의 찬란한 미풍을 보존하고, 그로써 신문화의 건설을 더욱 조장[益益助長]케 하며, 더욱 크게 성공[益益大成]케 하기를 간절히 바라노라.
우리는 선언하노니, 우리 조선민족에게는 민족성으로써 이 ‘선심(善心)’이 있음이 우리의 약점이 아니요, 그것이 있음으로써 조선인의 조선인 된 미점(美點)이 있다 하며, 우리는 어디까지든지 이 선(善)의 참 의의[眞意義]를 정당히 해석할 필요가 있지 아니하랴.
근대(近代) 우리 조선인은 선(善)을 너무도 소극적으로 해석하며, 퇴굴적(退屈的)·비열적(卑劣的)으로 해석한 점이 많이 있다. 무위도딕[徒食無爲]을 가리켜 선(善)이라 하며 퇴굴자약(退屈自弱)을 가리켜 선이라 하며, 천치적(天痴的) 무능을 가리켜 선이라 하며, 무주의(無主義) 무주장(無主張)을 가리켜 선이라 하였다. 이는 실로 이조말기 문약[李末文弱]의 교화가 선(善)을 오해[惡解]하야 이에 이르게 함에 급급하였다. 그러므로 조선민족은 당초 선(善)으로써 흥(興)하고 다시 선으로써 쇠(衰)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단군, 고구려의 전성시대는 선(善)으로써 흥하였나니 위에서 서술함과 같이 단군은 선(善)의 신가(神歌)로써 그 백성[民]을 발달하였고, 고구려는 선(善)의 군가로써 그 백성을 강성케 하였다. 그러나 이조말엽[李末]에 이르러서는 선(善)을 소극적 퇴굴적으로 오용(誤用)한 결과, 마침내 인민(人民)으로 하여금 퇴굴무위(退屈無爲)에 빠지게 하였다. 그러면 선(善)의 진정한 의의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이를 일언(一言)하여서, 우리 조선민족성의 미점(美點)을 열거하자 하노라.
원래 우주 진리는 진선미(眞善美)로써 표현되었으며 인심의 표현도 또한 진선미의 발휘임은 다시 쓸데없는 말[贅言]을 필요로 할 바가 아니다.
원래 사람의 마음[心]은 하나의 영체(靈體)이지만, 그 표현하는 방면과 활동하는 계급(階級)에 의하여 스스로 3개의 다른 결과를 생겨나게 하나니, 즉 마음이 과학적 방면으로 나타날 때는 이를 진(眞)이라 칭하며, 종교도덕적 방면으로 나타날 때는 이를 선(善)이라 칭하며, 예술적 방면으로 나타날 때는 이를 미라 칭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의 하에서 만일 선(善)을 종교도덕적 방면으로 보게 되면, 그중에 스스로 인(仁)이 있으며, 사랑[愛]ㅇ 있으며, 자비(慈悲)가 있으며, 인도(人道)가 있으며, 정의(正義)가 있으며, 평등(平等)이 있으며, 자유(自由)가 있게 될 것이다. 즉 선(善)이 종교적 방면에서 인(仁)·애(愛)·자비(慈悲) 등 성질을 가지고 나타나는 것이요, 도덕적 방면에서 인도(人道)·정의(正義)·평등(平等)·자유(自由)의 성질을 가지고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선(善)은 선 그것의 구체적 의미에서 인(仁)하여야 하며, 사랑[愛]하여야 하며, 자비하여야 하며, 인도정의를 실행하여야 하며, 평등자유를 주창(主唱)하여야 할 것이다. 이에 응(應)하는 것[者]은 곧 선(善)이 될 것이며 이에 반하는 것은 곧 악(惡)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선은 결코 소극이 아니며 퇴굴이 아니며 비열이 아니며 도식자약(徒食自弱)이 아니니 어디까지든지 정진자수(精進自修_치 아니할 수 없으며, 어디까지든지 도덕적으로 용왕매진(勇往邁進)치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의 성질적 방편상 아래의 몇 가지 조항을 첨부지 아니하면, 완전한 선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노라.
(1) 선은 생활상 모든 방편을 선(善)으로 활용케 함을 이른다
우리가 원래 주창하는 바는, 사람이 설정한바 모든 행위와 방편은 다 같이 사람의 생활을 최선(最善)으로 향상키 위하여 그것을 설정하였으며 또 그것을 활용하는 것이라 단정하는 것이므로, 선도 또한 생활상 방편을 선(善)히 향상케 함에서 그 의의가 특히 표현된다 함이니, 가령 이를 종교도덕학상 의미로부터 해석하면 우리는 아래와 같이 단언함을 마지 아니하노라.
어떤 이유로 이와 같은 조직을 가진 우주가 있는가. 또 어떤 이유로 이와 같은 성정(性情)을 가진 인간[人生]이 있는가 함은 이 문제는 만고철인(萬古哲人)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라. 우리는 감히 이를 관여치 못한다. 다만 우리가 이 사실로 알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 이와 같은 조직이 있는 우주 사이에 있어서, 밤낮을 이어서 경영[日夜營營]하는 생활의 지속과 만족의 획득을 도모함은 사실 중의 사실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때때로 사람은 우주의 근본[根底]을 탐구[求]코자 하며, 때로는 귀신의 뜻[意志] 엿보고자[窺] 하며, 또 때로는 만유(萬有)의 목적을 알고자 하지만, 마침내 이러한 것은 대개 저 고유한 성정을 기초로 하고 생활을 지속하며 만족을 획득코저 하는 방편에 불과한 것이라고 단언하여 두노라. 그것은 종교도 그러하고 도덕도 그러하고 또한 정치·법률·경제·과학 모든 것이 다 그러함을 단언하리라.
이와 같이 단언한 하에서, 선(善)이라 하는 것을 고찰하면 선은 사람이 고유한 성정을 기초로 하여 그의 생활을 지속하며 만족을 획득코자 하는 유일의 방편으로, 그것은 어디까지든지 생활의 향상적 근본의의를 떠나 결코 선의 진정한 의의가 없으리라 하며,
(2) 선(善)은 퇴굴(退屈)이 아니요 활동이다
이상에서 서술한 것과 같이 선(善)이 이미 사람의 생활을 지속하며 만족을 획득코자 하는 최고의 이상적 방편이라 하면, 선은 성질상 퇴굴이 아니요 활동 중의 활동이니, 잠자면서 복을 구하는 것이 선이 아니며, 안식(安息)하면서 행운을 바라는 것이 선이 아니며, 우유(優遊)하면서 생애를 도모하는 것이 선이 아니며, 퇴굴하여 무련(無聊)을 즐기는 것이 선이 아니니, 그러므로 선언 어디까지든지 크게 활동하며, 크게 취(取)하며, 크게 먹고, 크게 즐기는 데서 진정한 선의 의의가 나타날 것이라 하노라. 만일 ‘선(善)’을 근대 우리 조선인과 같이 활동 없는 퇴굴무위(退屈無爲), 안식우유(安息優遊)로써 스스로 판단[自斷]한다 하면 그것은 이미 멸망의 도(道)이니 무엇이 우리 생활의 향상적 방편이 되리오.
그러므로 선을 위(爲)하는 것에는 옛사람[古人]이 말한 이른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대활동으로 자아(自我)를 위(爲)하며 가정을 위하며 사회를 위하며 국가를 위하여 최선(最善)히 노력하고 최선히 활동하는 자가 되지 아니함이 불가하나니, 이러한 의미에서 현대 노동 문제와 같은 것은 선의 의의를 사실로 표현하는 것이라 하리니. 왜 그런가. 노동 문제는 활동을 본위로 하여 도식무위(徒食無爲)의 사회적 불한당을 배척함으로써라. 그러므로 우리는 독선자존(獨善自存)하는 도학선생(道學先生)과 자고독락(自孤獨樂)하는 선인도객(仙人道客)은 결코 선을 위(爲)하는 자라 칭하기 어렵고, 차라리 낮과 밤을 이어서 경영[日夜營營]하는 노동 생활, 애써서 근면[孜孜勤勉]하는 지사(志士)의 행위,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선(善)’을 계속한다 할지로다.
(3) 선은 허약[弱]이 아니요 자강(自强)이다
독일의 열광적(熱狂的) 철학자[哲人] 니체는 일찍이 선악(善惡)을 판단하여, ‘강한 것이 곧 선이고 약한 것이 곧 악이다[强則善, 弱則惡]’라고 하였다. 이는 물론 과격한 말이라 우리가 이로써 선악의 표준을 삼을 바는 아니지만, 그러나 그 속에는 일종의 신성(神聖)한 교훈이 숨어 있음은 잊지 말지어다.
대개 선 속에 철두철미, 무조건의 강(强)을 의미하였다 함은 아니나 약(弱)의 중에도 또한 아주 많은[幾多] 죄악의 분자가 없지 아니함으로써 보면, 선(善)은 어떤 의미에서 순수약(純粹弱)의 분자를 모두 제거[摠除]한 자강(自强)의 정신을 가졌다 할 것이니, 다시 말하면 선(善)은 우(優)로 볼 수 있으나 열(劣)로 볼 수 없음과 같이 강(强)으로 볼 수 있으나 약(弱)으로 볼 수 없나니, 이 점에서 강즉선(强則善) 약즉악(弱則惡)의 교훈도 해석상 적당한 진리가 포함되었다 할 것이다.
이상에서 서술함과 같이 선은 철두철미 사람의 생활 방침의 향상 방편을 말한 것이며, 그 향상 방편은 철두철미 활동을 본위로 하여 나온 것이라 하면, 선(善)의 의미에는 스스로 자강의 의미가 갖추어졌다 할 것이니 그러므로 자강(自强)하었는지라 능히 생활을 향상케 하고 자강하였는지라 능히 최선의 활동을 계속할 것이 아니겠느냐.
자강이라 함은 물론 자기의 인격을 완성하였다 하는 의미니, 아니 자기의 인격을 완성키 위하여 스스로 용진불식(勇進不息)함을 말하는 것일지라. 옛사람의 이른바 ‘학명이기자자위선(鶴鳴而起 孶孶爲善: 학이 울면 일어나서 부지런히 선을 행함)’이라 함은 이 자강을 말한 것이며, ‘천류불식(川流不息: 냇물이 쉬지 않고 흐름)’이라 함은 이 자강을 말한 것이며, ‘정진불퇴(精進不退: 부지런히 나아가며 물러서지 아니함)’라 함은 이 자강을 말한 것이니, 사람으로서 자강이 없고서야 어찌 다른 사람을 교화[化]하며, 또 다른 사람을 사랑[愛]하며, 다른 사람을 구제[濟]하리오. 그러므로 우리는 자강하기 위하여 지(知)를 구하지 않지 못할 것이며, 덕을 닦지 않지 못할 것이며, 체(體)를 수양[養]치 아니치 못할 것이니, 지(知)를 구하며 덕을 닦으며, 체(體)를 수양[養]함은 이것이 곧 자강인데, 우리는 지(知)를 구하기 위하여 부모처자를 떠나고, 만리이역(萬里異域)에 기려생활(羈旅生活)을 하는 것도 할 수 있으며, 덕을 닦기 이하여 범정범욕(汎情汎欲)을 끊고 극기반성(克己反省)을 애써서 행[强爲]함도 할 수 있으며, 체(體)를 양(養)키 위하여 안식퇴굴(安息退屈)을 배제[排]하고 들판을 달리며 산도 달리는 것도 할 수 있으니, 어찌 꾸히 불원유(不遠遊)의 고규(古揆)들 고규(古揆)하며 또 어찌 구구히 두족정중(頭足正重)의 인습에 스스로 갇힐[自囚]쏘냐. 그리하여, 그의 배운 바와 얻는 바를 가지고 세상을 구제함에 급급(汲汲)하며, 사람을 가르침에 부지런하고 또 부지런하면, 이 자강의 본의(本意)에 도달[達]한 것이니 선(善)의 도(道)가 이에 이르러 거의 드러났다[其庶幾] 할진저.
금후의 세계는 반드시 도덕 승리(道德 勝利)의 世界가 되리라. 도덕(道德)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세계가 되리라. 그런데 이에 도덕(道德)이라 하면 세상사람이 문득[動輒] 인습진부(因襲陣腐)의 관념[觀]을 가지고 이를 대할 수 있으나, 그러나 본래 도덕이라 말하는 말[語]은 옛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고정적(固定的) 편협(偏狹)한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므로, 어디까지든지 시세(時勢)와 동반[伴]하며, 진보와 병행하는 인간[人生]의 일상행위를 지칭하여 말한 것임을 잊지 말지어다.
우리는 항상 인간[人生]의 일상행위(日常行爲)라 하면 그것을 보통 비근용이(卑近容易)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일상이라 하여 결코 비근용이함이 아니니, 즉 우리의 일상행위는 아직도 오나전히 ‘선(善)’ 그것대로 표현치 못한 것은 사실이라. 그런데 이 도덕이 지금 문득 유력한 현상으로 나타났다 함은 어떠한 이유로 말미암은 것이냐 하면, 그것은 근래 정치.경제.법률.가정.사회의 모든 문제가 이 경향으로 나타나옴을 보았음으로써니, 이른바 ‘국제연맹(國際聯盟)’이라 하며, ‘노동문제(勞動問題)’라 하며, ‘부인문제(婦人問題)’, ‘인종문제(人種問題)’라 함은 다같이 도덕을 표상(表象)하고 일어난 것이며, 이른바 ‘데모크라시’라 하며 ‘인도정의(人道正義)’라 하며, ‘자유평등(自由平等)’이라 함은 다같이 도덕(道德)을 방편으로 하고 나타난 것이라. 다시 말하면 장래의 모든 현상은 선(善)을 표상(表象)으로 하며, 선을 방편으로 하고 나타날 것이니, 철인(哲人)이 이른바 “천지우주(天地宇宙)는 나날이 선(善)을 향하여 진화(進化)한다” 함은 대개 이러한 소식을 누설[漏]한 것이라 하리라.
‘호르토’ 박사는 ‘전후(戰後)의 세계(世界)’라는 제목의 논문(論文) 중에, 유럽문명[歐洲文明]은 자살적(自殺的) 문명이라 스스로 단정[自斷]하여 말하기를, “만일 이와 같은 자살적 문명이 계속하여 금도(今度)의 전쟁과 같은 참독(慘毒)이 2, 3회 계속 잇따르면[繰返] 유럽의 천지는 머지않아 이와 같은 자살적 문명을 가지지 않은 황색(黃色) 혹은 흑색(黑色) 인종에게 점령되기에 이르리라” 하엿음은 확실한 사자후(獅子吼)라 할 수 있다. 즉 박사는 유럽에 있는 물질적 문명이 과거와 같이 계속하면 유럽 천지는 물질적 문명을 가지지 않은 다른 인종에게 점령되리라 함이니, 이와 같은 감상(感想)은 유독 호르토 박사뿐이 아니요, 다른 인도정의를 주장하는 모든 식자(識者)와 일반 인민은 다 같이 이 정신의 지배를 받는 것인즉, 만일 이와 같은 관념이 날이 지남에 따라 팽창하면 금후의 세계는 실로 물질문명(物質文明)의 세계가 아니요 확실히 도덕승리(道德勝利)의 세계가 될 것이 아니랴. 그러한 후에야 선(善)의 진정한 승리가 각 방면의 활동에 의하여 사실로 나타날 것이니, 오호라, 지상의 천국도 거의 허탄(虛誕)이 아니라고 추측할 수 있을[可推]지로다.
조선인은 과거 세계 현상으로 보아 확실히 열패자(劣敗者)의 하나였다. 특히 물질문명의 패자(敗者)였다. 물질로써 보면 빈혈자(貧血者)였다. 그러므로 조선인의 금후 행로는 먼저 물질문명에 착수(着手)치 아니할 수 없다. 물질을 연구하고 발달하여 다른 사람과 같이[共] 향상하며, 다른 사람과 함께[共] 발전하지 아니할 수 없나니라. 과학(科學)에 전념하며 인공(人工)에 전문(專門)하며 기계(機械)를 만들며, 공예(工藝)를 연구치 아니할 수 없나니라. 그러한 후에야 조선인의 조선인 된 생존권을 얻으리라.
그러나 조선인이 금후로부터 아무리 물질문명에 전념한다 할지라도 그로써 세계의 열강에 웅비하여 ‘물질문명의 조선’이라 하는 휘호(徽號)로 세계픠 패명(覇名)을 얻기는 불가능하리라. 다만 물질문명은 직접 생활의 방침을 향상키 위하여 다른 사람과 함께 견진병행(肩進倂行: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아감)하기는 할 수 있다고 하려니와 그로써 다른사람의 선각자(先覺者)가 되며 선진자(先進者)가 되기는 어느덧 시세(時勢) 허락하지 못하는 바니, 즉 조선인이 지금부터 경천읍귀(驚天泣鬼: 하늘이 놀라고 귀신이 울고갈)의 재주로 물질문명의 세계를 능가(凌駕)한다 할지라도 그로써 세계인의 자랑거리가 되지 못할지라. 왜그런가. 금후의 세계는 물질문명의 세계가 아닐 것임으로써라. 그렇다고 하여 나는 결코 물질문명을 배척하는 자는 아니니, 세계인이 대개 물질문명을 배척할지라도 오직 조선인 하나는 물질문명을 숙배(熱拜)치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조선인이 조선인의 생활과 다른 사람과 함께 향상하기 위함이며, 다른 사람과 함께 병행(並行)키 위함에 불과한 것이요, 특히 조선인으로써 장래 세계에 문화적 방명(芳名: 아름다운 이름)을 후세에 전[遺]할 큰 원인은 조선인의 민족적 특성 되는 선심(善心)을 잘[善] 해석하고 잘[善] 활용하여 선심주의(善心主義)로써 세계의 비인도(非人道) 부정의(不正義)를 정복함만 같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장래 조선의 자랑거리도 선심(善心)이며, 장래 조선문화가 세계에 웅비할 큰 원인도 또한 선심이니, 조선인이여! 고유한 선심의 미덕을 발휘하여, 오로지 자강불식(自彊不息)하라. 조선인이여, 신(神)의 영광(靈光)이 선심(善心) 위에 항상 비추고 있음을 잊지 말지어다.
본 주제[本題]는 우리의 가장 중대한 문제와 동시에 중대히 연구할 필요가 있으므로 본호(本號)에는 단지 사회 여론을 환기하기 위하여 그 문제만 나타냄에 불과하온 바, 기회를 보아서 다시 구체적 연구를 거듭하고자 하나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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