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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ul 04. 2020

다시개벽을 위하여

- <개벽신문> 종간호에 부쳐

* 이 글은 <개벽신문> 제95호(종간호), 2020년 6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심 규 한 | 성요셉상호문화고등학교 교사

천성산 전경 (출처: 경남도민신문)

월간 <개벽신문>이 6월호를 마지막으로 계간 <다시개벽>으로 발돋움한다고 한다. 이 글도 <개벽신문>에 싣는 나의 마지막 글이 되는 셈이다. <개벽신문> 1호부터 마지막 호까지 모시는 사람들의 호의로 지속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니 그 사이 내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경북 예천 내성천변으로, 다시 경남 양산 천성산 자락으로, 다시 전남 강진 바닷가로 거처를 옮기며 자연과 지역에서 새롭게 만나고 배우고 있다. 삶의 거처를 이렇게 옮기는 것도 역마살이라면 역마살이겠지만, 서울이라는 거대중심에서 벗어나 변방으로 와 보니 산이든 강이든 바다든 서울과는 전혀 다른 저마다의 환경과 그 안에 살아가는 이야기와 관점이 있었다. 


물론 현실에서는 중심 권력의 영향력이 막강하지만 지역마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발명하고 지속해야 비로소 나라도 문명도 건강하게 지속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차이를 대상화하는 권력의 위계 관점 대신 민주적으로 평등한 다양성 시각이 필요하고, 인간으로서의 공통의식과 나아가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교감할 수 있는 생명에 대한 공통의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방법론적으로 주체는 남 되기를 통해 관계적 나되기로 나아가고 전일적 나로 거듭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서 점점 강해지는 것이 우리 민족의 오랜 신앙인 ‘한’의 신앙과 의식이었다. 낱낱의 경험이 삶을 이루듯 다양한 살이들이 하나라는 의식은 인류세의 건강한 지속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라 하겠다. ‘나’의 세계의식인 ‘한’을 의식할 때 비로소 ‘한 나’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옛날에는 자식들이 많았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이들이 집안에서 복작복작 시끄럽게 떠들면, ‘나가 놀아라’는 말을 많이 했다. 집집의 아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놀았다. 저마다 유년의 골목은 다르지만 그렇게 우리는 길에서 또 다른 길을 만나고 한길의 뜨거운 체험도 가지게 되었다. 광장은 그런 길들이 모인 곳이다.

광화문 광장 촛불집회를 통해 우리는 무능하고 부패한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직접민주주의 힘을 체험했다. 낱낱의 개인이 거대한 민중으로 새 시대를 열어가는 살아 있는 힘이라는 것을 직접 체험하였다. 각자의 길은 달랐지만 우리는 그렇게 ‘한 우리’를 체험하였다.


내가 이리저리 삶터를 옮기며 체험하며 사는 길도 결국은 한길로 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저마다 종교도 많지만 진짜 으뜸 가르침은 우리 각자의 길들이 거대한 하나로 향하고 있다는 방향의 의식과 자각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나는 바다를 잊지 않는 물방울이고 싶다. 외롭고 쪼그라든 물방울에게는 바다를 기억하라고 속삭이고 싶다. 그리하여 도래할 한 아침을 위해 날마다 새 아침을 맞이하며 살고 싶다.


2020년 코로나19는 그러한 한길을 새롭게 자각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광화문 촛불집회의 염원을 싣고 탄생한 정부는 코로나19에 신속하고 투명하고 또 단호하게 대처함으로써 세계가 따라야 할 길을 제시했다. 우리의 대처방법이 곧 교과서라는 찬사를 받으며, 소위 선진국으로부터도 도움 요청을 받아 그에 응하고 있다. ‘이게 나라냐?’고 외치며 광화문을 가득 메웠던 시민들이 새삼 진정한 나라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다. 완전하진 않을지라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대유행의 시대에 한국은 분명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코로나19는 제3차 세계대전 이상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의 세계적 지위가 격상되고 우리의 자신감도 다지게 되었다. 군사적인 무력의 힘이 아니다. 자본의 경제적 힘도 아니다. 패권과 강제가 아니라 위기에 처한 나라들이 스스로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선한 영향력 덕분이다. 하지만 한류의 유행과 더불어 한국의 문화적 위상은 이미 엄청나게 격상되어 있었다. BTS로 대표되는 K-POP과 ‘킹덤’ 같은 K드라마, ‘기생충’ 같은 한국영화는 한국적인 것이 곧 세계적인 것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하였다. 우리는 더 이상 어떤 열등의식도 갖고 있지 않다. 민족혼이 비로소 온전해지고 있다. 우리의 길은 이제 한국에만 머물지 않고 세계로 뻗고 있다. 그것은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홍익인간 광제창생의 재현이며, 김구 선생이 꿈꾸었던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문화강국의 실현이다.


이즈음 김구 선생의 해방 정국에 남기신 ‘나의 소원’을 떠올리는 일은 가슴 뜨거운 일이다. 그 글에서 선생은 우리가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강한 나라가 되어 세계를 지배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선생이 꿈꾸는 것은 오직 아름다운 나라다. 그것은 문화적 깊이와 풍성함으로 세계를 돕고 세계평화에 이바지하는 나라다. 얼마나 아름다운 소원인가? 마르틴 루터 킹이 외쳤던 ‘나에게는 소원이 있습니다’와 같이, 우리 민족이 또 인류가 나아가야 할 길을 가슴 벅차게 제시한 글이었다. 동학과 유학, 불교, 기독교를 편력하며 일관되게 독립운동에 투신했

던 선생이 문화와 교육을 통해 아름다운 나라를 이루고자 했던 그 지향이 곧 한의 지향이었다고 생각한다.


천성산에 있을 때 나는 적멸굴과 화엄벌에서 수운 선생과 원효 스님의 거대한 열망을 생각하며 가슴이 벅차곤 하였다. 우리 민족의 가장 위대한 성인 두 분이 시차를 두고 적멸굴에서 수행을 했다는 사실이 우연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한’이라는 거대한 민족혼이 두 분 성인을 부른 것이 아닐까? 적멸굴의 원래 이름이 적미굴인데, 그 뜻이 붉은 눈썹 같다는 뜻이다. 실제로 적멸굴이 있는 능선 일대는 철분이 많아 붉은 색의 암맥이 드러나 있다. 그곳에 서면 멀리 천성산 정상과 화엄벌을 바라보게 된다. 화엄벌은 원효스님이 제자들에게 화엄경을 강설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천성산 정상부의 초원이다.

원효 스님과 수운 선생 

두 분은 모두 억압과 분열을 통합 해소 하며 일체를 아우르는 한의 길을 제시했다. 대승보살 원효 스님의 일심사상과 무애행은 물론 대승불교 일체의 분파를 통합하는 화쟁 사상 자체가 한의 구현이었다. 수운 선생은 사람마다 모시고 있는 하느님을 다시 발견하면서 동양의 유불선 삼교와 서양의 기독교까지 아우를 수 있었다. 실로 위기에 처한 민족사에 ‘한’이 다시 불꽃같이 재생한 일대 사건이었다. ‘한’ 자체가 소멸하지 않는 생명의 혼과 같다. 그래서 가장 한국적이면서 곧 세계적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해방 정국의 혼란기에 김구 선생을 통해 진정한 독립국의 염원으로 다시 표현되었다고 생각한다.


김구 선생이 동학, 유교, 불교, 기독교에 제한을 받지 않고 종교를 넘나들며 혁명을 하고 독립 운동을 하고 교육 운동을 하였던 것은 알 것이다. 이처럼 진정한 종교란 곧 각기 다르지만 하나의 큰 길을 가는 함의 길이 아닐까? 천도교에서 "동학은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동학이 단순히 믿음의 종교가 아니라 실천의 종교이기 때문에 가능한 말이다. 참 종교란 이처럼 도그마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궁극의 한에 도달하기 위해 멈추지 않는 함의 길이다.


이제 월간 <개벽신문>이 막을 내리고, 계간 <다시개벽>으로 다시 시작하는 마당에, 나는 우리 민족이 걸었던 한의 길이 온 세계에 더 명확히 드러나고 세계인을 공명케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는 코로나19를 겪으면 변해야만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개벽을 외치는지 모르겠다. 변해야 한다면 바르게더 근본적으로 ‘한’의 각성을 통해 변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원효(元曉)스님의 법명을 상기시키고 싶다. 스님은 자신의 책 <<기신론별기>>에서 자신의 법명을 새부(塞部)라고 적었다. 당시 신라어 새밝(새벽)을 음차한 소리였다. 실제로 당대 사람들은 원효를 새벽 스님이라 불렀다고 한다. 나는 원효스님이 자신의 법명을 바로 천성산에서 지었다고 생각하는데, 천성산의 지역명이 새박등이(새벽산)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천성산은 통도사와 가깝고 원효 스님이 통도사 인근 산에서 치열하게 토굴수행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정상부에는 원효와 의상이 수행했다는 원효암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나는 그곳에서 원효스님이 민족의 새로운 개벽을 각성하고 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저 먼 조선(朝鮮) 아사달(아침땅)로부터 이어온 민족혼의 재각성이라고 생각한다. 수운 선생의 '다시개벽'이 이와 무관할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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