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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Dec 30. 2020

양천주와 이심치심과 심화기화

[잠깐독서-0043] [동학을 배우다 마음을 살리다] 중에서 


[책속에서]
- 송봉구, [동학을 배우다 마음을 살리다] 
27-29쪽


(수운이 '시천주'를 가르쳤다면, 해월은 '양천주(養天主)'를 가르쳤는데) 내 안에 모셔진 한울님을 만나기 위해서(즉, 양천주를 위해) 해월이 제시한 (첫 번째) 공부 방법은 마음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이심치심(以心治心)’이다. 여기서 해월은 나에게 있는 두 가지 마음을 제시했다. 하나는 이심(以心)이고 또 하나는 치심(治心)이다. 해월은 ‘이심’을 ‘천심(天心)’이라 했고, ‘치심’을 ‘인심(人心)’이라 했다. 곧 천심을 회복해가지고 인심을 다스리는 방법이다. 


해월은 ‘천심은 마음이 이치에 합해서 조화로운 마음이 된 것’을 말하고, ‘인심은 마음이 감정에 흘러서 좁아진 상태’라고 했다.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은 항상 천심으로써 인심을 다스리기를 ‘말을 몰 때 고삐를 당겨 올바른 길로 이끄는 것처럼 하라’고 했다.


이 과정을 좀 더 깊이 이해하려면 먼저 마음을 알아야 한다. 위에서 천심은 바른 마음이고 인심은 버려야 할 마음, 고쳐야 할 마음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마음이 두 개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한 마음이다. 이 마음을 수련하지 않고 마음이 가는 대로 내버려 두면 욕심이 발동한다. 마치 논에 김을 매지 않으면 잡초가 무성해지는 것과 같다. 욕심이 내 마음을 점령해 버리면 타인의 삶을 돌아볼 여유가 없어진다. 내 욕심의 범위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오로지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다 보면 필연적으로 투쟁이 앞서게 마련이고, 결국은 비참한 삶을 살게 된다. 


내 욕심만 채우려고 한 결과로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하늘과 땅까지 적으로 만들고 만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일시적인 승리를 쟁취한 사람이라도, 언제 누구에게 그 성과를 다시 빼앗길지 모르기 때문에 계속해서 투쟁(과로)에 내몰린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속 깊은 두려움이 늘 온몸을 감싸고 돈다. 이런 삶을 사는 게 과연 행복한 것인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천심 즉 올바른 마음으로 바꿔야 한다. 어떻게 하는가?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닦는 수밖에 없다. 맹자에서 확인했듯이 ‘마음은 생각하는 권능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 있다. 이 과정을 해월은 ‘마음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라 했다. 


주문 21자를 잊지 말고 자나 깨나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밖에 없다. 항상 주문과 함께 사는 것이다. 그 주문을 외우고 생각하는 그 주체가 바로 마음이다. 주문 21자에 집중함으로써 항상 정신을 다른 곳으로 달아나지 않게 할 수 있다. 항상 있어야 하는 자리에 있으니 마음이 고요하고, 고요하니 맑아지고, 맑아지니 깨끗해진다. 마치 컵의 물을 오랫동안 한자리에 놓으면 물이 맑아지는 이치와 같다. 이것을 해월은 마음이 리(理)에 합하여 심화기화(心和氣和)가 된 상태라고 했다. 


[잠깐독서-043]


백신 접종이 가시권 내에 들어왔는데도, 마냥 환호작약하게 되지 않은 분위기이다.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오매불망 기다리던 백신의 접종이 시작됐는데도 불구하고, '이제 이 환란은 곧 종식되리라!'는 기대감이 크게 번지는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어쩌면 다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가 맞이할 현실의 실상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미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온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결코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뿐만 아니라 WHO는 (12월 30일 - 우리나라 언론보도 기준)에 "코로나19보다 더 센 놈이 올 것이다"라는 무시무시한(?) 경고를 날리고 있다. 코로나19 백신이나 치료제가 '충분히(?)' 보급-접종된다고 해도 '코로나19 종식'으로 이어지기보다는 '코로나19와 더불어 살기'가 될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말하자면, 매년 '감기-독감의 계절'을 맞이하는 것처럼, 이제 언제나 코로나19에 감염될 수 있다는 각오(?)를 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WHO(세계보건기구)의 경고가 아니라도, 이미 평범한 시민조차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사태이다. 


우리는 이 준(準) 전시(戰時) 상태로 언제까지 살아갈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눈에 보이지 않게 우리의 삶의 양식은 '준 전시 상태의 일상'을 일부는 받아들이며 적응해 나가고, 일부는 여전히 강력하게 저항하며(예컨대, 자영업자들의 '영업재개' 요구), 이 시대의 강을 건너고 있는 중이다. 


'전시상태'를 '휴전상태'로 나아가 '종전 및 평화협정' 상태로 변화시켜 가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다만, 무엇을 '휴전상태'로 볼 것인지, 또 '종전' 내지 '평화협정' 상태로 볼 것인지가 관건이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위드(with) 코로나"는 상수(常數)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해 나갈 '종전' 내지 '평화협정' 상태는 코로나19와 더불어 살아가되, 그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상태'[체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꿈꿀 수 있는 유토피아, 즉, 코로나19가 없는, 즉 체념을 넘어 초월하고, 완전(!) 종식되는 상태로 나아가는 길/세상은 전혀 없는 것일까? 


기후위기나, 전쟁 없는 세상, 갈등과 빈부격차, 차별과 인재(人災)가 없는 세상으로 가는 길/방법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첫째, 주체의 측면과 둘째, 객체의 측면으로 나누어 말할 수 있겠다. 먼저 '객체의 측면'을 이야기하자면, (1) 치료제와 백신의 상용화, 일상화 (2) 마스크의 일상화, 필수품화 (3) 상시적인 환경 개선 및 대면 접촉 문화의 변화['개선'이라고 말하면, 너무 슬프다] 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하고, 선행(先行)해야 하고, 더 최후까지 시행해야 할 '방법'은 첫째의 '주체 측면'에서의 방법론이다. (1) 우리의 삶 - 산다는 것의 의미, 생활의 방식, 생명의 범위 - 을 바꾸어야 한다. '생명의 범위(의 변화-확장)'란 나 개인이 개인으로 그치지 않고, 인간의 생명이 인간세계에 그치지 않고, 생태계가 이 지구 및 미생물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각성하고, 염념불망하는 것이다. (2) 우리의 마음 - 소박함과 홀로임과 절제함을 긍정하고 기꺼이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을 기르는 것이다. 이것이, 이번 '잠깐독서'에서 배워야 할 마음이 아닌가 한다. 


내 마음에는 욕심과 번민과 질투와 분노도 있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곳에, 빈마음, 용서하는 마음, 사랑하고 베푸는 마음, 감싸안고 치유하는 마음도 있다. 한해가 막 저물려 하는 지금, 그 마음을 불러오기 딱 알맞은 시간이다. 우주의 기운 - 한울님이 그 어느때보다 열심히, 더 강력하게 그 일을 도와 주시는 시간이다.  남은 24+@의 시간 무엇보다, 마음을 잘 갈무려서, 놓고 갈 것과, 가지고 갈 것을 갈음해야 할 시간이다. 마음의 시간이다. 


"한울님, 우리를 행복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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