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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Jun 11. 2016

다시 읽는 신인철학(41)

오래된 미래의 철학, 동학 다시 읽기 

2. 멸망하는 죽음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탄생에서 돌연적 변화를 맛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에서 또한 돌연적 변화를 맛볼 것은 사실이며 그리하여 우리는 탄생이라는 돌연적 변화가 멸망이 아닌 것과 같이 죽음이라는 돌연적 변화도 또한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죽음은 탄생보다도 한층 대아(大我)의 생활에 합치되는 자연의 대해탈(大解脫)인 것을 확신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결코 세상 사람이 말하는 의미의 멸망이 아니요 대우주 생활의 갱신의 도(道)이며, 대지기(大至氣) 대생명 생활의 부활의 도이다. 사람이 이 대우주 생활을 파지하면 죽음은 결코 없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거짓말이 되고 만다.

  

또한 수운 선생께서는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捨近取遠)하지 말라"고 하였다. 변하는 편으로 보면 천지도 한순간을 가만히 있지 않고, 변치 않는 편으로 보면 물(物)과 아(我)는 한가지로 무궁하다 함은 확실히 진리의 중추를 잡은 말이다.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삶도 변화이며 죽음도 변화이다. 일체가 다 변화이며 만유가 다 변화이다. 위로 대천성진(大天星辰)부터 아래로 극미분자(極微分子)에 이르기까지 변화를 받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그 변화 중에 가장 특색을 가진 자이다. 무상(無上)의 일물(一物)이다. 


그러나 진리는 결코 변하는 편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변하는 측면은 변하지 않는 측면을 지시(指示)하는 한 작용에 지나지 아니한 것이다. 변하는 쪽으로 보면 천지만물은 다 고립에 지나지 아니한다. 아무 연속 융화가 없는 낙락난합(落落難合)의 물(物)이 되고 만다. 삶도 고립이요, 죽음도 고립이다. 고립은 영멸하는 것이다. 사람은 인간으로부터 고립하고 자연으로부터 고립하고 대우주로부터 고립될 때에 인간은 자살(自殺)하는 것이다. 


사람은 육체적 내지 정신적 장벽을 가지고 대우주 자연의 무진장한 생명으로부터 고립될 때에 인간은 멸망의 길에 들어가는 것이다. 사람은 우주생활 중에서 자기를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꿀벌이 밀방(蜜房) 중에서 꿀을 제조하는 것과 같이 사람은 무한 중에서 대자연 중에서 사회의 전적 생활 중에서 인간격 생활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 까닭은 우주와 개인은 근본에서 차별을 둘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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