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걸음 Jan 11. 2021

소 이야기[牛譜] (하)

출전, 청오 차상찬, [牛譜], [[개벽]] 제55호, 1925년 1월 1일 / 현대어 역-박길수 


[역자 주 : 청오 차상찬(1887-1946)은 개벽사의 4대 '편집국장(이돈화-김기전-방정환-차상찬)으로, '개벽사'의 시작부터 최후까지를 함께한 유이(唯二, with 이정호)한 인물이다. 그는 사화(史話)와 고전(古典)은 물론, 풍자와 해학, 인물평은 물론 민속(民俗) 부문에도 탁월한 필력을 자랑했다. 이 글은 그의 '민속, 풍물 부문'의 잡학사전적 지식을 보여주는 글 중의 하나이다.]


(상편)


(하편)


그다음에 또 중국인[漢人]의 경전, 역사, 제자백가서[經史諸子集傳]를 대강 찾아보면, 


[[설문(說文)]]에는 “강특(鋼特)은 아비숫소[牛父也]이고, 독(犢)은 새끼소이다[牛子也]. 순(犉) 누렁이에 입술이 검은 소이다[黃牛黑唇也], 온전한 희생물은 색우이다[牷犧色牛也]”라고 하였고, [[주역(周易)]] <대축(大畜)>에는 “송아지[童牛] 뿔에 가로목[牿]을 씌우면 매우 길하다(童牛之牿元吉)”고 하고, 또 같은 책 ‘기제(旣濟)’에는 “동쪽의 이웃이 소를 잡는 것[=相克]이 서쪽 이웃이 약제(禴祭)를 지내고 실제로 그 복을 받는 것만 못하다(東隣殺牛不如西隣之禴祭實受其福)” 하였다. [[예기(禮記)]]<내칙(內則)> 편에는 “천지의 제사에 쓰는 소는 뿔이 누에고치나 밤알만큼 돋은 송아지를 쓰며, 종묘의 제사에 쓰는 소는 뿔이 한 자쯤 되는 어린 소를 쓴ㄷ(祭天地之牛角, 繭栗, 宗廟之牛角握, 賓客之牛角, 尺)”고 하였다. 


또 <전례(典禮)> 편에는 “제후는 까닭 없이 소를 죽이지 않는다(諸侯無故不殺牛)”라 하고 다시 또[尙又] “희생으로 붉은 소를 쓰는 것은 적색을 숭상함이고, 송아지를 쓰는 것은 성각(誠慤-정성스럽고 순수한 마음-역자주)함을 귀히 여기는 것이다(郊牲用騂尙赤也, 用犢貴誠也)”라는 이야기[說]가 있다. 


“얼룩소의 새끼라도 색깔이 붉고 또 뿔이 바르게 났다면, 사람들은 비록 제사에 쓰지 않으려 하나 산천의 신이 버려 두겠는가?(犁牛之子 騂且角 雖欲勿用 山川其舍諸-공자의 제자 ‘중궁(염옹)’이 천한 아버지의 자식이지만, 그 재질이 뛰어나므로 세상이 결국 그를 重用하게 될 것이라는 공자의 평가-역자주)”라는 문구는 [[논어(論語)]] 읽은 이는 대개 짐작할 것이요, “얼음을 베어다 쓸 정도의 부(富)를 가진 집안은 소나 말을 키우는 일을 그 정도 규모의 일을 하는 집안[백성]이 하도록, 기르지 않는다[伐氷之家 不畜牛羊]”는 말도 [[대학(大學)]] 본 사람은 다 알 것이다. 


“닭 머리가 될지언정 소꼬리가 되지는 않겠다(寧爲鷄口無爲牛後, 작은 일이라도 앞서는 사람이 되겠다, 지도자가 되겠다)”는 [[사기(史記)]]에 있는 말이지만 초동목수(樵童牧叟-나무하는 아이, 소 기르는 늙은이)도 항상 다반(茶飯)으로 쓰는 문자(文字)요, “양으로 소를 대신하는 것은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以羊易牛 見牛未見羊, 제선왕이 희생으로 바쳐지는 소 대신에 양을 쓰도록 한 일을 두고 맹자가 한 말, 눈으로 본 것의 희생-죽음에 연민을 느끼는 마음을 賞讚한 것이다)”은 [[맹자(孟子)]] 권(卷)이나 읽은 촌학구(村學究)의 이야기거리다. 


“睆彼牽牛不以服箱”*은 [[시경(詩)]] <소아(小雅)>에 있거니와, “誰謂爾無牛, 九十其犉爾, 牛來思其耳濕濕, 或 降于阿或飮于池”**는 주선왕(周宣王)의 고목(考牧-정치?)을 찬미한 시다. “약구우망이로(若九牛亡一毛-아홉마리 소 중의 터럭 한올: 많은 것 중의 극히 일부 대수롭지 않은 것)”는 사마천(司馬遷)의 책[書]에 있는데 한유(韓愈)가 인용하여 “구우망일모미재다소간(九牛亡一毛未在多少間)”이라는 시구(詩句)를 지었고, “우기동조(牛驥同皁)”는 추양[鄒陽]이가 옥중에서 양왕(梁王)에게 올린 글[書] 중에 있는데, 문천상(文天祥)이 <정기가(正氣歌)>에 또한 인용하여 “牛驥同一皁, 鷄栖鳳凰食”***이라 하였다. 

*{환한 저 견우성은 짐수레를 끌지 못하도다 …… 남쪽에는 기성이 있으나 키질을 하지 못하도다[睆彼牽牛 不以服箱 …… 維南有箕 不可以簸] - 실용적이지 못하고 이름만 있음을 이르는 말}

**{누가 너에게 양이 없다 하는가 (중략) 황우만도 구십 마리가 되는데 (중략) 소들도 돌아오는데 (만족하여) 그 귀들을 벌름거리며 새김질하며 오고, 혹은 언덕을 내려오고 혹은 못가에서 물을 마신다.}

***{소와 기린 한 마구에 서고 닭 봉황에 깃들여 같이 먹다가...}


신농씨(神農氏)의 인신수우(人身牛首)라는 역사 이야기[史說]도 기괴(奇怪)하거니와 소부(巢父)가 요(堯)의 양천하(讓天下)하는 것을 받지 않고 “君之牧天下亦獪余之牧孤犢”이라 하고 소를 몰고 떠나간[牽牛而去] 것은 그 얼마나 고결(高潔)하냐. 


주무왕(周武王)은 도림(桃林)의 들판에 소를 놓아 주고 노자(老子)는 청우(靑牛)를 타고 관문[關]에 나갔다. 공자는 승전위리(乘田委吏)가 되었을 때 “牛羊茁壯長而己矣”라 말하였고, 또 무성재(武城宰)의 아들[子] 유(遊)에게는 “割鷄焉用牛刀”라 말하였으며, 자로(子路)가 자기가 구해준 물에 빠진 사람[溺者] 소로써 사례[謝]하는 것을 바디 아니함을 듣고 “魯人必不拯溺矣”라 탄식[歎]하였다. 


영척(寗戚)은 제환공(齊桓公)의 수레 아래[車下]에서 우각(牛角)을 불며[叩] “南山粲粲, 白石爛爛中有鯉魚長尺有半, 生不遭堯與舜禪短布單衣絻至骭, 長夜漫漫何時早”이라는 우각가(牛角歌)를 불렀고, 백리해(百里奚)는 “爵祿不入於心 故飯牛而肥”라는 말이 있다. 


<장자(莊子)>에는 “표정이 19년 동안 천마리의 소를 해체했다(庖丁十九年解千牛)”고 하였고 <가의책(賈誼策)>에는 “소잡는 이 ‘탄’은 하루에 소 열두 마리를 잡았는데도 칼이 무뎌지지 않았다(屠牛坦一朝解十二牛)”고 하였다. 


의돈(猗頓-노나라의 富豪)은 노(魯) 궁사(窮士)로서 도주공(陶朱公)에게 축우술(畜牛術)을 배워서 십년 사이[十年之間] 큰부자[大富]가 되었고(孔叢子), 진혜왕(奏惠王)은 오석우(五石牛)를 각성(刻成)하여, 그 뒤[後-꼬리 밑]에 금(金)을 두고 석우(石牛)가 능히 금(金)을 낳는다고 촉인(蜀人)을 기만하여 길을 통하게 한 후 촉(蜀)을 벌(伐)하고(蜀紀), 전단(田單)은 오색옷[五彩衣]를 소[牛]에 입히고 병기[兵刀]를 소뿔[牛角]에 묶은 후 그 꼬리에 불을 붙여 연나라 군대[燕軍]을 대파(大破)하였다. 


송나라 사람[宋人]이 흰송아지[白犢]로 상제(上帝)께 제사[祭]하였더니 아버지와 아들[父子] 다 맹인[盲目]이 되어 전화(戰禍)를 면하였다는 일는 [[열자(列子)]]에 기록[記載]되었고, 발해태수(渤海太守) 해모수[慕漱]가 인민(人民)으로 하여금 병기[刀釰]를 팔아 소[牛犢]를 사게 한 일은 [[한사(漢史)]]에 있다. 


병길우천(丙吉牛喘-前漢 宣帝 때 丙吉이라는 재상이 항상 민간에 나가 농사 짓는 소에 관한 것을 묻는 등 백성들의 형편을 살핀 일)을 묻고(漢書) 정강성(鄭康成)은 문학(文學)을 숭상[尙]하므로 집안의 소[家牛]까지 뿔[角]로 팔자(八字)를 만들었[觸成]다(白集注). 


도인(道人) 봉군달(封君達)은 푸른소[靑牛]를 항상 타고 다니므로 청우도사(靑牛道士)라 부르고 제갈량(諸葛亮)은 나무소[木牛]를 만들어서 군수품(軍需品)을 운반하였다. 장완(蔣琬)은 소머리[牛頭]에 피가 흐르는꿈을 꾸고 촉나라 재상[蜀相]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고, 관녕(管寧은) 이웃 집 소가 자기 집 벼[禾]를 먹는 것을 쫓아 버리지 않고 도리어 서늘한 곳으로 끌고 가서 배부르게 먹였다[飽飼]다는 일화가 있다. 이밀(李密)은 소뿔[牛角]에 한서(漢書)를 걸어 놓고 읽었으며, 대문(戴文)은 성질이 탐욕[貪]스러우므로 죽은 후에 소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變化記).


[[능엄경(楞嚴經)]]에는 우동병(牛哃病: 소가 크게 우는 병?)이라는 말이 있고(胃病), [[주례(周禮)]]에는 우인(牛人: 官名掌養國之公牛)과 우전(牛田)이 있고, [[좌전(左傳)]]에는 “위나라 사람[衛人]이 그 귀를 잡으라고 청했다(請執牛耳)”라는 말이 있다(牧牛之田古者盟用牛耳卑者執之尊者莅之). 또 “생쥐가 제사에 쓸 소의 뿔을 갉아먹었다. 점을 쳐서 소를 바꿨으나, 생쥐가 또 그 뿔을 갉아먹었다. 결국 소를 놓아주었다(鼷鼠食牛角改卜牛鼷鼠又食其角乃免牛-못된 사람이 윗사람을 속이는 것을 막기 어렵다-역자주)”라는 말도 있다. 


후한(後漢) 유분자(劉盆子)는 목우관(牧牛官)이 된 까닭으로, 부르기를 우리(牛吏)라 하고(劉盆子傳), 농민(農民)은 시월(十月) 삭일(朔日)에 쌀[米*]로 서로 먹이고[相饋] 큰[大*]를 소뿔[牛角]에 붙이고 말하기를 ‘소해[牛年]’라고 한다(廣東新*). [[북사(北史)]]에는 “학자는 소털과 같다(學者如牛毛-학문을 시작한 사람은 소털같이 많다. 成者如麟角: 공을 이룬 사람은 기린 뿔처럼 드물다)”라는 말이 있고 두보시에는 “진시왕 때 상앙의 법령은 소털처럼 촘촘하여 민중을 억압하네[奏時任商鞅法令如牛毛]”라는 구절이 있으니, 다 번잡하고 과한 것[繁多]을 뜻함이다. 


진나라 때[晋時]에는 염통구이[牛心灸]를 귀중한 식품으로 알았으므로 왕희지(王羲之)가 12세 때에 주의(周顗)의 집[家]에서 여러 다른 손님[諸客]보다는 먼저 염통구이[牛心灸]를 잘라서 먹고[割啖] 명성이 일시(一時)에 떨쳤고, 한나라(漢) 때에는 말이 귀하여 천자(天子) 이하는 대개 소달구지[牛車]를 탔으므로 진나라(晋)도 그 풍속이 여전히 전재[尙存]하야 왕도(王導)는 작은 소 수레(短轅牛車)가 있고, 왕제(王濟)는 팔백흑교(八百黑駮)가 있었다. 


태사공(太史公-사마천: 역자주)은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에 우마주(牛馬走)라 부르고, 도간(陶侃)은 우면지(牛眠地: 소가 잠자는 땅)를 얻어 장례를 치른[歸葬] 고로 후세 사람[後人]이 장지(葬地)를 정하매 길지[吉壤]를 우면지(牛眼地)이라 부르며(晋書), 이안의(李安義)는 부자[富人] 정생(鄭生)에게 면회사절을 당하고 문(門)에 오(午) 자(字)를 크게 써 두었으니 즉(卽) 우불출두(牛不出頭)라고 조롱[嘲辱]한 것이다. 


[[사기(史記)]]에 상나라(商) 주(紂)가 “술로 된 연못에 배를 타며 음식을 먹었고, 한번 북을 치면 엎드려 술을 마시는 자가 삼천 명이었다(以酒爲池回船糟邱而牛飮者三千餘人)”고 말한 고로, 후세에 술을 잘 마시는 자를 우음(牛飮)이라 칭하고, 당나라(唐)의 우승유(牛僧孺) 이길보(李吉甫)가 명당(朋黨)을 결성하여 40여 년간을 서로 알력 하였기에, 우이명당(牛李朋黨)이라 손가락질했다(新唐書). 


사마상여(司馬相如-중국 전한시대 문인)는 쇠코잠방이[犢鼻揮-여름에 농부가 일할 때 입는 장방이]을 입고 왕장(王章, 한나라 때)은 우의(牛衣, 덕석) 속에서 울었다[泣](牛衣編亂麻爲之者). 한유(韓愈) 글[文]에는  소의 오줌·말의 똥·못쓰게 된 북 가죽(牛溲馬渤敗鼓之皮-못 쓰게 된 것도 다 병을 고치는 데에 쓸모가 있다)란 구절이 있고, 두보(杜牧) 글에는 소귀신-뱀귀신(牛鬼蛇神-온갖 못된 것)이란 말[語]이 있고, [[후한서(後漢書)]]에는 우정팽계(牛鼎烹鷄- 소를 삶을 수 있는 큰 가마솥에 닭을 삶는다는 뜻으로, 큰 재목(材木)을 알맞은 곳에 쓰지 못하고 소소한 일에 부림을 의미)의 이야기가 있으며(喩大材不宜小用), [[전등록(傳燈錄)]]에는 석가는 우두옥졸(釋迦是牛頭獄卒-지옥의 간수)이라 하고, [[당서(唐書)]] <노암전(路巖傳)>에는 소의 머리와 사람의 얼굴(牛頭阿旁-지옥의 鬼卒. 陰險한 사람을 이름)이란 용어[稱語]가 있다(小人用事如鬼陰惡可畏之稱).


씨와 성[氏姓]으로 말하면 송나라 미자(微子-중국 상나라 紂왕의 형)인 후사관우부(後司冠牛父)의 자손이 이에 우씨(牛氏)가 되었다 하고, 수나라(隋)의 우홍(牛弘)은 본래 성이 요(寮)로 위나라(魏) 때에 우(牛)로 사성(賜姓-임금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음)하엿다 하며, 당나라(唐)의 우승유(牛僧孺)는 리우홍(犁牛弘)의 후예라 하고, 송나라(宋)의 우고(牛臯)는 악비(岳飛)의 부장(部將)으로서 금나라(金)을 격파하여, 큰 공이 있는 명장(名將)이다. 


또 역사상 유명한 산으로는 강소성(江蘇省) 강녕현(江寧縣) 남쪽에 송나라(宋) 악비(岳飛)가 금나라(金) 올출(兀朮)을 대파(大破)하던 우두산(牛頭山)과, 안휘성(安徽省) 당도현(當塗縣)에 손책(孫策)이 유나라(劉)를 공략[攻]하고 수나라(隋)의 한금호(韓擒虎)가 진나라(陳)를 멸망[滅]시키고 송나라(宋) 조빈(曹彬)이 강남(江南)을 공략[攻]하고, 명나라(明) 상우춘(常遇春)이 원나라(元) 군대[兵] 격파하던 우도산(牛渚山)과, 감숙성(甘肅省) 서녕현(西寧縣) 서남쪽에 당나라(唐) 이청(李淸)이 토곡혼(吐谷渾)을 패퇴(退敗)시키던 우심퇴(牛心堆)와(一名 牛心山) 몽골(蒙古) 조조특기과(鳥嘲特旗果)에 당나라(唐) 장인우(張仁愚)의 1,800여 곳의 황수대(烽燧臺)를 건축[築]하고 돌궐(突厥)을 방어[防]하던 우두조나(牛頭朝那, 蒙古 名 鷄籃拕羅海)산이 있고, 


지명(地名)으로는, 하남(河南) 통허현(通許縣)에 춘추시대[春秋時] 진나라(晋) 탁공(悼公)이 정나라(鄭) 군대[師]를 정벌[伐]하던 우수성(牛首城)과 봉천(奉天)의 우장우가둔(牛莊牛家屯)이 저명(著名)하고 물이름[水名]으로는 운남(雲南)의 우란하(牛欄河)가 또한 저명하다. 


또 소[牛]의 별명은 반특처사(斑特處士: 반점이 특별한 처사)요(廣記) 혹은 검은 모란[黑牧丹]이다. 오나라(吳) 땅은 두려운[慹] 고로 소가 해를 보고도 기침[喘]하며, 촉나라(蜀) 소 중에 큰 것을 犩(위)라고 한다. 입춘일(立春日)에 흙소[土牛]를 만들어 추위[塞氣]를 쫒는 옛날 풍속[古俗]도 있고, 소가 코로 듣는다[鼻聽]는 말도 있다. 


제경공(齊景公)은 우산낙조(牛山落照)를 보고 슬피 울었으며, 한나라(漢) 태조(太祖)는 노나라(魯)를 지나타가 큰소[太牢]로 공자(孔子)에 제사[祀]하였다. 


소에 관한 사부경전(詞賦經傳)으로 말하면 소의 성자(聖者)라 말할 수 있는 제녕(齊寗)의 <상우경(相牛經)>과 유우석(劉禹錫)의 <탄우사(嘆牛詞)>와 한유(韓愈)의 <하비후혁전(下邳侯革傳)>과, 유종원(柳宗元)의 <우부(牛賦)>와 주자(朱子)의 <당인모우목단도발(唐人暮雨牧丹圖跋)>과 진나라(陳)의 소타기[騎牛]에 저명한자의 노래가 있으나, 이에 생략하고 끝[最終]으로 옛사람[古人]의 명시(名詩), 몇 수를 들[擧]고 붓을 놓는다[擱筆].


승평사(昇平詞) _ 王元之(송나라 때 시인)

細草煙深暮雨收, 牧童歸去倒騎牛. 笛中一曲昇平樂, 算得生來未解愁. 


소를 사다[買牛] _ 陸放翁 

老子傾囊得萬錢, 石帆山下買鳥犍. 牧童避雨歸來晩, 一笛春風草滿川. 


託牛(後主詩) _ 李家明

曾遭寗戚鞭敲角, 又被田單火燎身. 閑背斜陽嚼枯草, 近來問喘更無人.


매거진의 이전글 소 이야기[牛譜] (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