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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r 01. 2021

3.1운동 민족대표 의암 손병희 일대기

-3.1운동의 기획 연출자 의암 손병희 선생이 꿈꾼 문명사회는?

[편역자 주] 3.1운동을 실질적으로 기획하고 지도한 분은 천도교의 3세 교주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 1862-1922) 선생이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1862년 충북 청주의 아전 집안에서 서자로 태어나서, 22세가 될 때까지 건달 생활을 하였으나, 22세 때 동학에 입도한 이후에는 성심수련을 계속하여 갑오년 동학혁명 때는 북접통령으로서 전봉준과 함께 우금치에서 원평에 이르기까지 전투를 함께하였고, 1898년에는 해월 최시형으로부터 동학의 도통을 이어, 제3세 교주가 되었다. 의암은 1905년에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하며 교단의 체제를 일신하고, 동학의 교리와 사상을 새로운 지평으로 확장-심화하며 지구화 시대에 조응하고, 3.1운동을 비롯한 개벽운동을 전개하였다.


의암 선생은 3.1 운동 후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치명적인  폄증으로 사경을  헤메는 상태로 가출옥하여 투병하시다가 1922년 5월 19일 새벽 3시에 환원하셨다. 3.1운동 102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여 아래에, 의암 손병희 선생이 환원한 1922년에 5월에 '임시호'로 발행된 <천도교회월보>(142호)에 게재된, "의암 손병희 선생 일대기"를 소개한다. 이것은 의암 손병희 선생의 최초의 전기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본문의 한자는 가급적 한글로, 필요한 한자는 ( ) 안에, 표기법은 현대어로, 띄어쓰기는 현대 문법에 맞춰, 구식 용어는 현대어로 바꾸고, 문장이나 표현은 꼭 필요한 경우에만 '현대어로 번역'하고, 이 경우 원문은 '[ ]' 표시 안에 병기한다.]




의암 손병희 선생 일대기 (聖師 一代記)


감회 일사(一事)


성사(聖師, 의암 손병희 선생에 대한 존칭-역자) 영면하셨도다. 소낙비 우수수 내리고, 새날의 암흑(暗黑)이 오히려 동대문 밖 상춘원(常春園, 동대문 밖 오늘날 동묘 맞은편에 있던 의암 손병희의 別邸, 의암 손병희는 이곳에서, 서대문감옥 수감중에 얻은 치명적인 병을 치료하던 중에 1922년 5월 19일 새벽에 환원하였다.)을 포위한 5월 19일 오전 3시로써 성사는 영면하셨다 하도다. 상춘원의 신록(新綠)의 엽엽(葉葉)이 그대로 청신(淸新)하고, 새소리[鳥聲]의 곡곡(曲曲)이 그대로 화명(和鳴)하거늘, 다만 성사의 숨소리뿐이 호올로 고요하였으며, 성사의 눈동자뿐이 호올로 감겼[그물었]다 하도다.

"내가 죽을 줄 생각하는가. 죽어도 관계가 없겠는가...."

하던 그의 말끝 못 맺던 말씀이 이 글 쓰려는 기자의 귀에도 오히려 있거늘, 소리쳐 우노니[鳴呼!] 이것이 무슨 일인가. 머리를 동(東)으로 돌이킬 때에, 다만 운천(雲天)이 막막할 뿐이로다.

-

성사의 일생을 간기(簡記)해 볼까 하여, 이제 붓을 들었다. 그러나 붓을 내리기[=글을 써 나가기] 전에 먼저 감루[感淚]로다. 아아, 나의 마음이 이렇게 감상(感傷)되어서 어떻게 기록을 마칠까.

신유(辛酉, 1922) 5월 25일. 성사의 환원한 지 제6일 되는 날에 일기자(一記者)

일본 망명시절의 아암 손병희[앞줄 왼쪽부터 조희연, 권동진, 손병희, 오세창, 뒨줄 왼쪽 첫번째가 양한묵]

유년 시대의 성사의 호방(豪放) - 그는 청주 한 서리[賤吏]의 서자(庶子)


성사의 이름은 병희(秉熙)요, 부친은 의조(懿祖)요, 모친은 최씨요, 의암(義菴)은 해월신사로부터 받은 도호(道號)이니, 지금부터 61년 전 신유(辛酉, 1862) 4월 8일, 충북 청주군 대주리(大周里)에서 태어나셨다.


부친은 청주의 상민(常民)으로, 일찍이 이방의 말직에 재임하여, 분울불만(憤鬱不滿; 분하고 억울하여 불만에 가득찬)의 가운데서 일생을 마쳤으며, 모친 최씨에 관해서는 별로 전하는 바가 없으나, 손씨(孫氏) 집안의 서실(庶室)된 점으로써 추정[推察]하면 그 역시 일개 여자로의 다소 특이한 성격을 포지(抱持)하였으며, 수많은[幾多]의 복잡한 경우에 봉착된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성사의 그 특수한 천품도 그 양친에게서 전수함이 많은 것 같다.


성사는 다수의 사람이 실견(實見)한 바와 같이 그 모습[狀貌]가 웅걸(雄傑)하며 기상[氣宇]이 영매(英邁)하여, 어려서부터 기 빛나는[赫赫]는 안광(眼光)이 주위의 사람을 놀라게 하였으나, 가문[家係]이 변변치[顯赫] 못하고 그중에서 서출(庶出)이었으므로, 들어오면 가정에서부터 그를 천대(賤待)하고, 나가면 이웃사람, 동네 사람들[隣里]가 그를 용인(容認)치 아니하여 그 천성[天來]의 감정은 이로 인하여 더욱 사납게 날뛰게[=激越하게] 되었으며, 어렸을 때[幼時]에 잠시 한문을 수학하였으니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아서[=不屑하여] 이에 팽개쳐 버리고[=放棄하고] 점점[稍稍] 성장함에 따라 그 호방하여 구애되지 않는[豪放不羈]의 셩정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여 음주와 투전에 그 몸을 맡기고, 온갖 싸움질[是非鬪鬨]과 왈패질[歌吟笑呼]로 어언 20세의 나이[年光]을 지나[度過]게 되었다.


평상시에 성사와 더불어 어울려 다니던[=追逐하던] 고향 친구[故舊]의 구전에 의하면 성사의 20세 전후의 생활은 그와 같이 방랑(放浪)하였으나, 방랑한 그중에서도 가히 범치 못할 무엇이 있는 듯하여 술을 마치면 술로 이기고, 잡기를 행하면 잡기로써 이기며, 몸싸움[肉戰]을 하면 여력(膂力, 통뼈의 힘-역자)과 기백으로 이겼으며, 뿐만 아니라 술자리에 있으면 술친구를 제압하고, 잡기장에 있으면 건달(乾達)을 제압하여 그 이기고 제압하는 두 가지 특징은 성사가 마주치는[=當하는] 크고 작은 경우를 통틀어 그때마다[=觸處에서] 볼 수 있었다 한다. 이제 그때 남겨 놓은 일화[逸事]의 몇 가지를 가려서 기록하여[選記] 당시의 성사의 심정과 행사(行事)의 윤곽을 보이고자 한다.


성사가 12세 되던 임신(壬申, 1872)에 그 가형(家兄)이 성사에게 엽전 40냥을 꺼내서 관청에 납부[納]케 하였더니, 성사가 도중에 사람이 얼어서[凍] 거의 사경에 이르렀음을 보고 곧 그를 스스로 들쳐메고[=携하고] 주막[酒店]에 이르러 따뜻한 방[溫室]에 눕게 하고 이어서[因] 소지하고 있는 돈[錢財]를 주어서 주인(主人)으로 하여금 치료케 한바, 집안 사람[家中]들이 그 의로운 구원[義救]의 마음이 강한 것에 놀랐다고 한다.


17세 되는 정축(丁丑, 1877)에 성사가 괴산군 삼가리(三街里)에 이르렀더니, 이때 수신사(修信使)가 이르렀는데, 말 뒤[馬後]에 역인(驛人)을 매달아[懸] 유혈이 흩뿌리[淋漓]거늘, 성사가 꾸짖어 말하길[叱]

"사람이 사람을 학대함이 어찌 이와 같은가!"

하고 곧 목봉(木捧)으로 말 부리던 종[馬僕]을 타격[擊]하여 그 줄[懸]을 풀게 하고, 수신사의 유서통(諭書桶: 공문서를 담은 통-역자)을 빼앗아 연못 속에 던져 버렸다 한다.


성사가 다시 이웃 고을[隣邑]을 지나갈 때, 동네 사람[洞人]이 빙둘러 앉아서 시끄럽게 떠들고[匝坐喧閙] 있거늘, 성사가 그 말을 들은즉 그 동네의 어떤 사람 집에 가족[家口] 5명이 있었던바, 전염병으로 인하여 온 식구[全口]가 몰사하여 5, 6일이 지났는데, 동네 사람이 두려워서 오히려 수습치 못하고 그 선후책을 논의하는지라, 성사가 개탄하되,

"사람이 사람의 죽음을 구하지 아니하면 누가 구하리오."
하고 직접 5, 6인의 사체를 염습(斂襲: 거두어 들여 수습)한 후 동네 사람과 같이 매장하였다 한다.

일본 망명 시절의 의암 선생 

심기일전의 성사의 새로운 삶[新生] - 22세에 처음으로 동학에 입도하다


20세 전후 당시는 성사의 일생에 있어서 매우 위험한 시기였다.


그가 한낱[一種]의 뜻[志]을 얻지 못한 일민(逸民: 학문과 덕행이 있으면서 민간에 파묻혀 지내는 사람-역자)이 되어 쾌락에 젖어[=酣嬉淋漓]서 사는 비참한 모습[悲態]로써 일생을 마칠 것인가, 그렇지 아니하면 등[背]에 만리경(萬里鏡)을 짊어지고 손에 불평도(不平刀-불평불만에 가득찬 무기-역자 주)를 들고 성(城)을 침략하고 부자[富]를 약탈하는 한무리[一黨]의 의적[豪賊]이 될 것인가, 그 그렇지도 아니마면 이것저것을 다 모르는 한탄 시골[村中] 왈패[悖子]가 되어 일생을 초목(草木)과 함께 썩어가는 사람이 될 것인가, 이와 같은 몇 가지의 억측은 당시의 어른[父老]가 당시의 성사를 평가[秤量]하던 바이었을 것이다.


과연 20세 전후 당시에는 성사로서도 기(氣)가 막혁을 것이다. 뜻[志]은 크지만 포덕(布德)할 도(道)가 없고, 용기[勇]는 건장[壯]하지만 발휘할 기회가 없었으며, 탐관오리의 횡포[橫行], 사회전통의 추악함은 보면 눈이 거슬리고, 생각하면 기운에 거슬리지만, 감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성사의 기(氣)는 막혔들[鬱] 것이며, 마음은 어지러웠[亂] 것이다. 그런데 이 줄기[一途] 새로운 삶[新生]의 서광은 성사에게로[身上] 향하였다.


22세 되던 때이다. 동학의 신자인 어떤 사람이 성사의 입도를 권유하였다. 삼재팔란을 면한다는 권유의 말[勸說] 같은 것은 성사의 의지를 설득[說]하기에는 너무 천박하였으나, 보국안민(保國安民), 광제창생(廣濟蒼生)의 실제 이치[實理]가 그 가운데 포용(包容)되어 있다는 설법(說法)은 매우 성사의 심정을 감동케 하였다. 이에 성사는 단호한 결심으로써 곧 입도(入道)하였다. 이로써 성사의 심기는 일전(一轉)하였으며, 성사의 생활은 일신(一新)하였다. 종래의 소방(疎放)한 생활은 자기의 심성(心性)을 과오(過誤)케 함이 다대(多大)한 것을 묵인(默認)하였으며, 대사(大事)의 성취는 먼저 그 일을 경영하는 주인공의 건전한 성격으로부터 산생(産生)되는 것을 심증(心證)하였다. 선생은 이에 문을 닫아 걸고[閉], 자리[席]에 꿇어앉아[跪] 동학의 수도절차에 의하여 수심정기(守心正氣)에 전력하였다. 이때의 선생이 그 심성을 수련하기에 얼마나 열심한 것은 당시의 전도인(傳道人)으로부터 동학 선생 최 해월이 근지(近地)에 온다는것[來]을 듣고[聞] 선생으로 하여금 배알(拜謁)의 예(禮)를 행하게 하고자 할 때에 "내[余] 소방(䜹放)한 마음[心]을 고친[改] 후가 아니면 선생을 배견(拜見)할 수 없다"고 한 한 가지의 사실로써 가히 추측할 수 있다.


24세 되던 갑신년(甲申年, 1884)에 선생이 처음으로 동학의 제2세 교주 최 해월의 문하에 배알한 후 사제(師弟)의 의(義)를 중맹(重盟)하고 최 선생의 지도에 일종(一從)하여 덕업(德業)을 대성하기로 할때, 이로부터는 최 선생의 옆[側]을 떠나지 않고[不離] 휴척(休戚)을 함께[共] 하되, 출입할 때에는 선생의 가마[乘轎]를 매고[擔] 지숙(止宿)할 때는 선생의 문호(門戶)를 지켜[守], 시종이 여일하였으며,


30세 되던 경인년(庚寅, 1890)에는 선생이 진천군에 거(居)하며 수도의 절차[節]을 정하고, 21일을 일기(一期)로 하여 주문(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백만 독을 외울[誦] 때, 눕지 않고 잠자지 않고[不臥不寐] 흘공(訖工)하니 이 해에 이와 같이[如是] 하기를 모두[凡] 3차였으며, 매일 2쌍(雙)의 짚신[履]를 삼기[捆로써 일과를 삼아 한결같이 하니[一定不易] 당시 사람들[時人]이 칭송[稱]하여 손학자(孫學者)라고 하였다.


요컨대 선생이 22세에 동학에 입도[入]하여 34세 되는 계사(癸巳, 1893)에 이르기까지 범 13년의 기간[間]은 먼저 마음[心]을 양(養)하고 성(性)을 수(修)하여, 20세 전후의 방랑 생활로부터 유치(誘致)된 상처를 보완[補]하기에 노력하였으며, 나아가 자기의 소신을 주위의 많은 다중(多衆)에게 전하여 적지않은[不少] 도제(徒弟)를 얻[得]는 동시에 특히 선생의 천품의 탁월과 신심의 정독(精篤)은 그 스승[其師] 최 해월의 신임을 얻는[得] 바 되어 동학의 차세대[明日] 지도자가 될 기초가 그 사에 지어짐과 같은 것은 이때에 있어서 특기할 만한 일[事]이라 하겠다 이제 그 사이에 지나온 선생의 행적을 두어 가지의 일사(逸事)로써 대신[代言]하리라.

일본 망명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환영나온 도인들과 함께. 가운데 손병희, 그 왼쪽이 김연국. 양한묵, 권동진, 오세창 등의 인물이 함께 보인다.

29세 때[時]의 일이다. 이때에 동학에 대한 지목이 일심(日甚)하는 중, 동학의 두목으로 또 선생의 종질(從姪)되는 손천민(孫天民)이 또한 지목을 피하여 그 집[家]에 들어오지 않더니[不入] 교졸(校卒)이 그 아내[妻]를 체포[捕]하거늘, 이때 선생이 마침 옆에 있[在傍]다가 패연(悖然) 여성(厲聲) 왈, "그 처를 체포[捉]하는 것이 그 숙부[叔]를 체포[捕]하는 것과 (비교하여) 어떠한고. 나[余)는 천민의 숙부[叔]이로라" 한대, 교졸이 이에[仍] 선생의 체포하거늘, 선생이 청주군 주성점(酒城店)에 이르러서는 술[酒] 여덟 잔[八盃]를 연달아 마시고[連飮] 말하기를 내[余] 대취하여 걸어가지[步行] 못할지니, 너희[爾等]는 나[我]를 업고 가라[負去]" 하고 앉아서 움직이지 아니하니[坐而不動] 교졸이 할 수 없이 선생을 업고[負] 청주 진영(鎭營)에 가두어[捉致] 고초(拷招)할 때, 최 해월의 주소를 물은즉, 말하기를 "내(余) 스스로 잡혀서[自現] 생사[死生]을 결심[決]한 이상, 다시 선생의 소재를 토설할 리가 있으리오" 하고 정색하며 움직이지 아니한[不動]즉, 영장(營將)이 그 의풍(義風)에 감동[感]하여, 곧 석방하였다.


32세 때의 일이다. 서냉이 작객(作客) 중에 날[日]이 저물어[暮]하여 어떤 주막에 머무니[止] 주막 주인[店主]은 한 여자뿐이요, 그 남편[夫]는 출타하였더라. 야심에 주모[店女]가 술[酒]을 내[進]오거늘, 선생이 말하기를 "내[余]가 이미 술을 끊었노라[斷飮] 하였노라." 또 담배[烟草] 를 내[進]오거늘 "내[余]- 이미 담배를 끊었[斷吸]노라." 다시 미모[艶麗]로써 유혹[誘]하거늘 "내[余]- 이미[旣] 금욕[斷慾]하였노라" 한대. 주모[店女] 실망[失色]하여 말하기를 "어찌 이와같이[如斯]히 심(甚)하니이까." 선생이 말하기를 "내[余]가 평생의 경영(經營)이 있[有]어서 독심계지(篤心戒持)한 지 이미 오래[已久]되었니 술[酒]을 마치면[飮] 이에 해롭[是害]고 고기[肉]를 먹으면[啖] 이에 해롭고[是害] 담배[烟] 피우면[吸] 이에 해로우며[是害] 여인을 가까이[嬖] 하면 이에 해로운지라. 그러므로 이와 같이 하노라" 하였다 한다. 그 결심의 굳음[鞏固]이 대기 이와 같았다.


이때의 소위 양반 같은 부류[兩班者流]가 동학의 금지를 표방하고 도인의 재산을 강탈하기로 일삼[是事]을 때 도인(道人) 한영석(韓榮錫)이 돈 3천냥과 소 1마리[頭]를 권용철(權用哲)에게 약탈(掠奪)당한라, 선생이 곧 권(權)에게 육박[迫至]하여, 그 불의함을 꾸짖[叱]고 그 재산과 소를 돌려받아[還取] 한(韓)에게 주니 이와 같은 일은 자못 기 회수[其回]를 (헤아릴 수 없을-不許) 만큼 많[多]았다 한다.


갑오의 혁명과 선생의 분전(奮戰)


선생의 흉중에는 오직 민중을 위하는 열혈(熱血)밖에 없었다. 더욱이 당시의 폭정(暴政), 열등(劣等)의 제도(制度), 괴악(怪惡)의 습관(慣習)은 선생의 심정을 자극하였으며 계속[繼]해서 고부에서 봉기[起]한 민중의 봉기[一揆]는 선생의 의분을 폭발케 하였다.


34세 되던 갑오(1894) 10월이라. 선생은 동학의 제2세 교주 최해월의 동의를 얻어[得] 고부(古阜), 옥구(沃溝), 정읍(井邑), 태인(泰仁), 만경(萬頃), 김제(金堤), 김제(金溝), 고창(高敞), 무장(茂長), 무안(務安), 임실(任實), 남원(南原), 순창(淳昌), 무주(茂朱), 부안(扶安), 장흥(長興), 담양(潭陽), 창평(昌平), 익산(益山), 장성(長城), 능주(綾州), 광주(光州), 보성(寶城), 나주(羅州), 강진(康津), 해남(海南), 장수(長水), 영광(靈光), 여산(礪山), 고산(高山), 지난(珍山), 금산(錦山), 곡성(谷城), 전주(全州), 순천(順天), 광주(廣州), 청주(淸州), 충주(忠州), 안성(安城), 여주(驪州), 양근(楊根), 지평(砥平), 원주(原州), 횡성(橫城), 홍천(洪川), 서산(瑞山), 덕산(德山), 당진(唐津), 태안(泰安), 안면도(安眠島), 감포(藍浦), 진주(晋州), 곤양(昆陽), 하동(河東), 남해(南海), 단성(丹城), 사천(泗川), 해주(海州), 송화(松禾), 신천(信川), 재령(載寧), 풍천(豊川), 장연(長淵), 문화(文化), 안악(安岳) 등지의 손천민(孫天民), 김연국(金演局), 이용구(李容九), 박인호(朴寅浩), 김개남(金開南) 외 315두령의 기포로 이루어진 백만의 도중(徒衆)을 거느리[率]고 먼저 전봉준(全琫準으로 더블어 공주(公州)에 회집[會]하여 정계곽청(政界廓淸), 민권옹호(民權擁護)의 기치하[旗下]에서 혁명의 횃불[矩火]을 들었다.


이에 앞서 동학을 닦는[修] 수만의 도중(徒衆)은 선사(先師) 최수운(崔水雲)의 무죄취륙(無罪就戮: 죄 없이 사형을 당함)을 해원하기를 원(願)하며 탐관오리의 난법횡포(亂法橫暴)를 분개[憤]하여 정의(正義)의 깃발[火旗] 들[擧]려 하기 여러 차례였으나, 스승[師] 최해월(崔海月)께서 오히려 그 기운[機]이 성숙하지 아니하였음[未熟]을 염려[慮]하고 단결의 공고(不鞏)를 우려[憂]하여 때가 오고 바람이 불[時來風送] 날[明日]을 기다리[期]던 중 이에 이르러 처음[始]으로 때가 이르고 민중[衆]이 합(合)하여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민중운동(民衆運動)을 일으키니 선생은 당시의 전봉준과 상병(相幷)하야 이 일[此役]의 유일한 지도자였으며 단신(單身)으로 총포(銃砲)의 사이[間]에 선[立] 용장(勇壯)한 선봉이었다(甲午의 役에 關하야는 本誌의 第22號, 23號에 <甲午의 革新運動>이란 題下에서 그 梗槪가 略述한 것이 有함으로 이에 上述치 아니함).


이때의 농민군[民軍]은 분(憤)을 격(激)하였으나 조련(操鍊)이 없고 또 공주(公州)의 역(役)은 제1회의 대전(對戰)이었으므로 어떠한 경험을 부득(不得)하여 그만 관군(官軍)에게 이기지 못하고[不利] 논산으로 후퇴[退屯]하였다가 선생은 다시 익산(益山), 전주(全州), 금구(金溝), 태인(泰仁), 정읍(井邑), 고부(右阜), 장성(長城), 순창(淳昌), 임실(任實) 등지를 두루 지나[歷經] 무주(茂朱)에서 이응백(李應白)의 민보군을 대파하고 다시 영동군 용산시에 이르러 관군과 서로 만났[相遇]는데 이때에 짙은 안개[大霧] 가득[滿天]하고 관군이 이미 몇 겹으로 포위하여 그 형세[勢]가 위급[岌嶪]하더니 선생이 결사(結社)의 도중(道衆)을 지휘하여 역전격퇴(力戰擊退)하였으나 이 싸움[是役]에 유탄[流丸]이 선생의 두루마기[周衣]를 뚫어[破裂] 선생의 운명이 실로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았다.


선생은 이로부터 다시 그 동학군[其軍]을 청주(淸州), 충주(忠州) 등지로 옮기며 때로 싸우고[且戰] 때로 휴식[且休]하였으나 때[歲]가 을미(乙未, 1895)에 들어서며 당시의 정부는 병(兵)을 이미 일본에서 빌려[借] 대규모의 토벌(剿伐)을 행할 새, 군사(軍事)의 훈련[試鍊]이 없는 도인군(道人軍)이 이를 대적치 못하여 도처에서 붕괴[崩潰]하는 중 먼저 김개남(金開南)이 전주에서 피살되고, 전봉준이 경성으로 체포되며 대세가 이미 아닌[非]지라. 선생은 잔여의 도중(道衆)으로 더불어 후일의 권토중래(捲土重來)를 약속하고 강원도(江原道)를 거쳐 원산(元山)에 이르러 가지고 있던 안경 1개를 팔아서 양식[糧米]과 의복을 준비하고 산간(山間)의 행상(行商)을 가장(假粧)하여 그 몸을 중국지방(中國地方)에 피[暫避]하였다. (乙未 6月의 事).


그 후 병인년(丙申, 1896)에 들어와 관군의 출몰(出沒)이 그치고 남쪽길[南路] 소통되는[始通]지라 선생은 이에 스승인 최해월(崔海月)의 지도에 의하야 각지의 도인에 대한 수습에 전념[專務]할 새, 괴이[怪惡]한 지목(指目)과 험난한 포우(砲雨) 중에서 능히 성실(誠實)하며, 능히 분투하여 도처에 실적을 거둔[收] 바 그 스승 최해월이 특히 선생의 신의(信義)를 칭찬[贊]하여, "손모(孫某)의 신의(信義)는 천하(天下)에 무쌍(無雙)"이라 하고 내히 의암(義菴) 도호(道號)를 내렸[賜]으며 그 다음해[翌年] 정유(丁酉, 1898)에는 다시 해월 선생의 도통을 받아 동학의 제3세 교주가 되니 이때 선생의 년은 37세였다.


34세 때로부터 41세에 이르기까지의 범 8년간의 선생은 갑오혁명(甲午革命)의 촉성(促成)과 이의 수습으로써 분주하였다. 일의 결국(結局) 실패는 이것이 시운[是運]이며 기세[勢]라 (달리) 말할 것이 없거니와 여하간 선생으로는 그 할 바를 다하였다[盡爲]. 이제 그 사에 나타난 일화[逸事] 몇 개 기록하여 기록(記錄)의 두찬(杜撰)을 보충하리라.


갑오의 역(役) 중, 공주로부터 논산에 후퇴[退屯]한 때의 일이다. 하루는 논산에 둔취[屯]한 여러 도인이 서로 시끄럽게 떠들며 말하기를[相鬧曰], "여러 두령(頭領은 조화(造化)도 없이 민중[衆人]으로 하여금 난(亂)에 빠지게[陷] 하니 이를 먼저 죽임[先殺]만 같지 못하다" 하야 그 기세[勢]가 창궐(猖獗)하거늘 선생이 문득 언덕[半月山]에 올라야 군중(軍衆)에게 고(告)하여 말하기를 "너희[爾等]가 만약 조화를 불신(不信)하거든 일제히 나에게 발사[射]하라" 하여 군중[衆人]이 모두 부복(俯伏)하였다 한다(註, 當時의 道衆의 多數는 頭目의 造化 뿐을 信하엿다).


을미년(1895)의 일이다. 선생이 해월(海月)을 모시[陪]고 인제군 최영서(崔永瑞) 가(家)에 있었는데 영서(永瑞)가 집이 가난[家貧]하여 여러[多數] 사람을 먹이기[供饋] 어려운지라 선생이 이에 그 동생 병흠(秉欽)으로 더불어 상인(商人)을 가장(假裝)하여 간성군(杆城郡) 압진리(鴨津里) 이 모(李某)의 객점(客店)에 이르렀는데, 주무니[囊中]에 1전의 (돈을) 가진 것[所持]이 없었다. 이때에 마침[適] 그 근처[該鄰]에 사는 윤규칠(尹圭七)이라는 사람이 선생의 의표(儀表)에 감동[感]하야 곧바로 천금(千金)으로써 시혜(施惠)하기를 자청(自請)하고 천냥[天兩]의 표(票)를 끊어[出] 원산 객주에서 이를 추심(推尋)케 하거늘, 선생이 고사한즉 윤씨가 역시 듣지 않고[不聽] 그대로 귀가(歸家)한지라. 이때에 병흠(秉欽)이 말하기를 "우릭[吾儕]가 윤군(尹君)과 평소의 친의(親誼)가 없거늘 그가 이와 같이 후애(厚愛)함은 이것이 실로 한울님 뜻[天意]에서 나온 것이라. 받아서 신사(神師=崔海月)에게 드리는 것[供]이 어떠할까" 한즉 선생이 불가하다고 하며 말하기를 "우리[吾輩]가 조선의 민중(民衆)을 수화(水火) 중에서 구하고자 하다가 도리어 수십만(數十萬)의 양민(良民)으로 하여금 포화(砲火)와 검두(劒頭)의 혼(魂)이 되게 하였으니 우리[吾輩]가 비록 풍찬노숙(風餐露宿)할지라도 가히써 구차히 안신(安身)하기를 도모치 못할지라. 내[余]가 어찌 이 돈을 받으리오" 하고 그 밤[是夜]에 글[書]을 써서[修] 전표(錢票)를 그 주인에게 보내고 단신으로 원산으로 향하였다 한다.  


이 또한 난중(亂中)의 일이다. 선생이 논산(論山)으로부터 청산(靑山)을 통과할 새 따르는 이[從者]가 고하기를 "선생의 가족이 이곳[此地]에 있으니 잠시 들어가 만나는 것[入見]이 어떠합니까" 한대 선생이 말하기를 "누가 가족에 대한 대정이 없으리오. 그러나 이제 여러 사람[衆人]의 가족이 난중(亂中)에 흩어져[散在] 생사를 알지 못하거니 내가 어찌 홀로[獨] 처자(妻子)를 만나[私見]리오" 하고 문앞을 지나치며 들어가지 않았다[過門不入]고 한다.

의암 선생의 가족사진 .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셋째 사위 방정환. 

계묘(癸卯, 1903)의 실패와 갑진(甲辰, 1904)의 경장(更張)


갑오(1894)의 운동에 실패를 본[見敗] 선생은 그 후에 곧 도중(道衆)의 수습에 전력하여 권토중래(捲土重來)의 내일[明日]을 기약[期]하였으나 그리할 딴 기회(機會)는 쉽게[容易] 오지 아니하였다. 뿐 아니라 한번 난을 지난[一自經亂] 이후의 지방 관청은 동학(東學)의 무리[徒]를 가일층 질시(嫉視) 또는 경시(輕視)하여 학대가 나날이 가혹[日苛]할 새, 동학의 2세 교주 최해월은 무술년(戊戌, 1898)의 여름에 경성에서 처고[處絞=교수형]되고, 그 여파로 동학에 대한 학살[餘虐]이 오히려 더 심[猶甚]하매, 선생은 당분간 국내에서 일할[有爲]수 없음을 알았을 뿐 아니라 구미(歐米)의 문명풍조(文明風潮)가 동방(東方)에 유입되며 동양의 국면(局面)이 장차 일신일변(一新一變)할 것을 통찰[察]하고 먼저 자기로부터 한번 천하를 유력(遊歷)하여 근대문명(近代文明)의 성질과 세계 대세의 여하(如何)를 직접으로 추찰(推察)한 연후에 다시 기회[機]를 타고[乘] 일[事]를 일으키리[擧]리라 하고 도중(道中)의 대소사(大小事)는 본국(本國)의 여러 두목(頭目)에게 일임한 후 이상헌(李祥憲)으로 변명(變名)하여 먼저 미국을 향하고저 일본의 나가사끼[長崎]로 향하니 때는 신축(辛丑, 1901) 3월이었다.


그러나 여비의 부족으로 이를 이루지 못[不果]하고 잠시 일본에 체류할 때, 조정에서 칙령(勅令)으로 소치(召致)할 형편이 있는지라 다시 몸을 상해로 피은[隱]하니 조선의 국사범 박영호(朴泳孝), 권동진(權東鎭), 조희연(趙羲淵), 이진호(李軫鎬) 등과 그 글[其文]을 통하기는 모두 ㅇ때[此時, 滯日時]의 일이다.


선구자(先驅者)의 자리[席]가 어찌 따뜻[暖]할 수 있으며, 풍운아(風雲兒)의 방바닥[突]이 어찌 따뜻[黔-검어짐]할 수 있으리오. 가지가지로 하야 좌불안석(坐不安席)의 선생은 이해[是歲] 10월에 다시 원산항으로 환국(還國)하였다가 이듬해[越明年] 임인(壬寅, 1902)에 서생(書生) 24인과 동반(同伴)하여 일본에 이르러 그들을 각각 취학(就學)케 한 후 은은(隱隱)히 동양의 풍운(風雲)을 감찰(鑑察)하며 본국(本國)의 교도(敎徒)를 단속(團束)하였다.


때는 계사년(癸卯, 1903) 여름(明治 36年)이라. 당시의 조선 정부는 수구편(守舊便)이요 또 친러당(親露黨)인 이윤용(李允用) 일파가 용사(用事)하여 국정(國政)이 나날이 나빠지고[日非] 일본(日本) 상하(上下)에서는 러시아[露國]의 극동(極東) 침략을 걱정하고 분개[是憂是憤]하여 대러시아 전쟁[對露國宣戰]을 준비함과 같은바 실로 동아시아[東亞多事]의 가을[秋]이라. 선생이 스스로 생각[自思]하되 일본과 러시아[日露]의 충돌은 대세로서 면할 수 없는 일[所不免]이요, 충돌한다면 동아시아의 장래를 위하여 일본이 그 승리를 얻지 않으면 안 될[不得不可] 것이라. 그러나 일본이 승리[得勝]한다 하여 반드시 조선 자체의 이익이 될 것이 아닌즉 이 기회[此際]에 그 계기[其機]를 먼저[先制]하되 먼저 일본과 협력하여 러시아를 배제하고 일본과 협동[約同] 등의 일[餘威]로써 조선의 모든 것[萬般]을 새롭게[維新] 하고 나아가 동서(東西)의 국면(局面)을 정하리라 하고 선생은 이를 권동진(權東鎭), 조희연(趙羲淵)과 의논[議]하였으며 권(權), (趙) 두사람[兩人]은 이 뜻을 당시 일본의 참모총장(參謀總長) 다무라[田村怡與助]에게 통(通)하였으며 아무라[田村]은 곧 관계당국의 승인[內認]을 얻어 선생과 상회(相會)하야 전후(前後)의 대계(大計)를 암정(暗定)하니 그 계책의 요지는 대개 아래와 같다.


즉 먼저 일본병사(日本兵士)로 하여금 상인(商人)으로 변장하여 비밀리에 불통상항(不通商港)에 들어갔다가 동학의 도중(道衆)과 더불어 일제히 봉기[齊聲並起]하야 곧장 서울[京城]을 점령[衝擊]하야 당시 정부의 친러당[露黨]을 제거[除]하고 제거한 후에는 한편으로 내정(內政)을 혁신하고 한편으로 대군(大軍)을 출병[出]하야 일본과 함께 러시아를 격퇴하자 하는 것이다. 이때에 일본 측으로부터도 만일 이와 같이 조선과 그 힘을 합하여 러시아를 제거하면 전후의 이공(利功)이 자기에게 돌아오지[偏歸] 못할 것을 염려치 아니함도 아니었을 것이나 당시의 정형(情形)은 일본에서 러시아의 부강(富强)을 심히 두려워[畏懼]한 동시에 전승(戰勝)을 확신[必期]치 못하였으며, 더욱 이 사이에 조선 전국의 일본에 대한 향배(向背)의 여하는 자기의 최종[結局] 운명을 결정[決]하는 최후(最後)가 되므로 그들은 전후(戰後)의 이익을 전유(專有)치 못할 것을 각오(覺悟)하엿음에 불구하고 조선의 사람과 더불어 손을 잡[握]코자 하였다.


이와 같이 큰 계획[大謀]을 확정한 선생은 동생 병흠(秉欽)을 본국에 보내[委遣] 여차여차하게 할 계책[策]을 주[授]고 전국의 도인[道儒]에게 그 뜻을 전하여 일거에 분응(奮應)할 준비를 선행(先行)하게 하였다.



오호라. 조선의 복이 없음[無福]인가. 아니면[抑] 선생이 복이 없음[無福]인가. 이 해[是歲] 8월 3일에 이상 모의[右謀]의 주모자이며 또 실행자인 손병흠(孫秉欽)이 급질(急疾)로 부산에서 사망[沒]하고 8월 5일에는 다무라[田村]가 또 사망[沒]하여 조전(吊電)이 일시에 함께 당도[並至]하니 선생이 방성통곡(放聲慟哭)하고 3일을 식음전폐[不食]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이로 절망[沮喪]치 아니하고 단지 말하기를 "일이 바르고 이치에 따르면[事正理順] 반드시 이룰 날이 있을 것이요, 비록 이루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는 최후까지 노력할 뿐이라." 하고 다시 뜻을 새롭게 하여 계속[厲志續行]할 때, 


그 이듬해(1904) 갑진(甲辰)에 이인숙(李仁淑)으로 하여금 글을 본국의 여러 두목(頭目)에 전(傳)하여, 그윽히 민회(民會)를 조직케 하며 한편으로 긴 글[長書]을 당시의 정부 대신 이용헌(李容憲)에게 보내 비정(秕政}을 탄핵(彈劾)하고 그해 4월에 문도(門徒) 박인호(朴寅浩), 홍병기(洪秉箕)를 일본으로 오게[請]하여 다시 대의(大意)를 들[擧] 준비로써 먼저 지방 도인이 일제히 단발(斷髮)할 뜻[旨]을 명(命)하고 다시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조희연(趙羲淵) 등으로 더불어 도인회집(道人會集)의 계획[計]을 의논[議定]할 새, 회명(會名)을 진보회(進步會 = 一國의 민으로 하야 步步齊進하야 文明의 域에 共躋하자는 意]라 하고 그의 취지와 강령(綱領)과 규칙(規則)을 제정[製]하여 이용구(李容九), 박인호(朴寅浩), 홍병기(洪秉箕), 나용환(羅龍煥), 이종훈(李鍾勳), 박형채(朴衡采), 국길현(鞠吉賢) 등으로 하여금 그 일을 주관[主]케 하고, 그해 가을 9월에 전국을 통하여 개회(開會)하니 이에 앞서서 지방도인으로 일제히 그 머리카락을 잘라, 죽음으로 맹세[自誓]한 자기 실로 16만명 다수에 이르렀으며, 그때 혹 지방의 형편 여하에 의해서는 포화(砲火)의 위협(威脅)한 바가 되었으나, 조금[少毫]도 굽히지 않고[不屈] 다- 무난(無難)히 그 목적을 이루었[達]더라.

 

이 때에 진보회가 다시 4강령(綱領)으로 세상에 포명(佈明)하며 한층 그 활동을 왕성[盛]히 하며 그해 11월에 진보회가 다시 일진회(一進會 = 是에 先하야 宋秉畯, 尹始炳 一派의 政客으로 成한 者)와 합세하니 그 세가 더욱 확장[益張]하였다.


보충[補記] : 당시 진보회의 4강령이라 함은 1. 독립(獨立)의 기초를 공고코 함이오 2. 정부(政府)를 개선(改繕)함이오 3. 생명, 재산을 보호케 함이요, 4. 군정(軍政) 재정(財政)을 정리함이다.


슬프다 한낱의 사업을 성취하기가 어찌면 그렇게 힘이 들며, 몇 명의 사람을 신임하기가 어찌면 그렇게도 어려울까. 그 행사(行事)의 시비선악(是非善惡)을 고사물론(姑舍勿論)하고 일진회(一進會)의 당시 간부 이용구 이외 몇 사람은 멀리 일본에서 지도의 채칙[鞭]을 잡은 선생의 본의(本意)를 위배(違背)하고 자기 마음대로[自由] 행동을 취(就)하여 대세대사(大勢大事)는 이미 글러버렸[已非]다.


선생은 부득이 최후의 정리책(整理策)으로 그 디음해 을사(乙巳, 1905) 겨울에 천도교(天道敎)의 명(命, 名?)으로써 교회[敎會 = 천도敎와 일진會]의 분리[分析]를 천하에 포고(布告)하며 그 이듬해 1906년에 일본ㅇ로부터 귀국하여 천도교 대도주(大道主)의 직무(職務)를 친장(親掌)하며 교회(敎會)의 면목과 내용을 일신(一新)케 할 새, 교회의 헌칙(憲則 = 天道敎大憲)을 제정(制定)하여 경성에는 중앙총부(中央總部), 지방에는 교구(敎區)를 설치[置]하여 시일(侍日 = 基督敎의 禮拜日에 當함), 성미(誠米 = 敎會의 根本的 經濟策으로서 敎人이 依名數하야 每食에 米 1匙式을 貯供케 하는 것)의 제도[制]를 실행케 하며, 다시 일진회(一進會의) 두령(頭領) 이용구(李容九), 송병준(宋秉畯) 등 62인을 출교(黜敎)하고 교무(敎務)의 학장(擴張)에 전력하였다.


多感한 先生의 晩年, 其業이 未半하야 其身이 先死


국면(局面)은 급전(急轉)하였다[-일제의 강제 병합을 이르는 듯-역자주]. 경술(庚戌, 1910) 이후의 선생은 안으로 자신(自身)의 수련(修煉)과 교도(敎徒)의 단속(團束)과 밖으로 문화 사업의 진작에 전력을 기울였다.  갑오 이후의 선생, 특히 계묘(癸卯, 1903)년 이후의 선생은 극도로 낙심(落心)도 하였으며 흥본도 되었었다. 음풍(淫風)의 아침에 흙비[朝霾雨]를 맞으며, 저녁에 상심의 눈물을 뿌리기[揮]도 여러 차례였으며, 격분(激忿)의 정(情)을 금(禁)치 못한 적도 여러 번[幾回]이었을 것이다. 만일 그의 평소의 수양(修養)과 시련(試煉)과 또 천품(天稟)이 아니었더라면 도저히 그러한 경우에 견뎌내[堪支]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생각건대 선생은  먼저 자기의 심신에 대한 수양(修養)의 필요(必要)를 느낀 것[感] 같으며 다시 일반 교도(敎徒)의 수양(修養)의 필요를 절감(切感)한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곧 대도주(大道主)의 직(職)을 현 교주(敎主) 박인호(朴寅浩)에게 전장(前章)케 하고 주로 정신적 방면의 건설에 전무(全無-務?)할 새, 무신(戊申, 1909) 10월에는 양산(梁山) 통도사(通度寺)의 내원암(內院菴)에 들어가[專往]서 49일의 기도를 행하고 <무체법경(無軆法經)>과 <후경(後經)>을 친제(親制)하여 교도(敎徒)의 영량(靈粮)을 준비하며, 신유(辛酉, 1911)에는 현 교주 박인호 이하 여러 총부 직원[部員]과 함께 경주의 성지(聖地)에 가서[專往] 천도교 제1세 교조(天道敎 第1歲 敎祖) 최수운(崔水雲)과 제2세 교주 최해월(第2歲 敎主 崔海月)의 구지(舊址)를 배관(拜觀)하고 그후 을묘(乙卯, 1915)에는 105일의 기도를 또 행하여 전후 10년의 사이에 선생의 덕업(德業)이 대성(大成)하고 심기(心氣)가 온화함을 갖추[俱和]었으니 이제 이 사리에 지은[成] 시(詩) 몇 구[數句]와 이적[異事]의 하나를 기록하여 덕업의 대성(大成)을 증(証)하리라.


양산 통도사의 공부를 흘(訖)한 후에 읊은[吟] 시(詩)에 왈,


道過三天心自昏, 風動細波空作喧. 白雲以上白雲下, 上以也聽下以論.


又曰

遍踏法界故家歸, 五色花葉簷外飛. 淸虛月色澹泊味, 空使主翁自足肥.


又曰

世法百年苦, 聖法萬年愁


그리고 갑인(甲寅, 1914) 11월 7일(時年 54)에는 선생이 밥상[食床]을 받는데, 그때 마침 문을 개방하였더니 참새[野雀] 100여 마리가 날아들어와[飛入] 선생을 둘러싸[環坐]는지라 선생이 밥[飯]을 나누어 주[分飼]니 새 무리[群雀] 혹은 무릎[膝]에 앉고 혹은 손에 올[登]라 밥[飯]을 받아먹[受食]었으며, 그 다음날[翌日] 아침 일찍[早朝]에는 산꿩[山雉] 10여 마리가 뜰안[內庭]에 날아들어와[飛入]하야 2시간경을 놀다가 돌아간[游弋而歸] 바 선생의 화기(和氣)가 새[禽鳥]에게도 미친 것과 같았다.


다시 교도에 대한 수양(修養)으로는 21일, 49일, 105일 기도 등을 때때[時時]로 봉행케 하였으며 특히 지방의 주요 두목(頭目)을 회동(會同)하여 한적(閒寂)한 곳[處] 택하여 여러 차례[數回]의 특별기도(特別祈禱)를 행케 하였으며, 그리고 매년[每歲]에 1차씩은 지방교도(地方敎徒)의 다수(多數)를 집합하여 이신환성설(以身換性說), 대신사(大神師(崔水雲)性靈出世說), 인문개벽설(人文開闢說), 신앙통일(信仰統一), 규모일치(規模一致) 등 여러[幾多] 법설(法說)을 강연[演述]하며, 때로는 특히 지방교도(地方敎徒)를 순방(巡訪)하여 일반교인의 자립적(自立的) 신앙을 확립하며, 사회적 단결을 일이키기[是作]에 분주한 등 암암(暗暗)히 다음날[明日]의 호라동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문화사업(文化事業)으로는 교회경제(敎會經濟)가 허락[許]하는 극한(極限)까지 학교(學校)의 경영(經營)을 행(行)하야 하등[下等]의 교회적(敎會的) 색채(色彩)를 더하지 아니[不添]하고, 순전[順延]히 사회적 교육을 시행(施行)케 하였으며, 교회 내로 여러[幾多] 강습소(講習所)를 설치[設]하여 응급적(應急的)으로 교회 자제의 사회적 교육을 시행하게 하였나니, 물론 이로 만족한 바는 아니나, 선생으로서 할 바는 다하였다.  


지금부터[距今] 3년 전 기미(己未, 1919) 3월 1일에 선생이 조선민족대표(朝鮮民族代表) 32인과 함께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이에[仍] 영어(囹圄)의 몸이 된 것은 일반이 다 아는[共知] 바라 다시 말할[更言] 것이 없고, 선생은 옥중(獄中)에서 뇌연화(腦軟化) 겸 동맥경화증(動脉硬化症)을 얻어서, 재작년 경신(庚申, 1920) 10월에 병(病)의 위독(危篤)으로 보석(保釋)되어, 동대문(東大門) 밖 별저(別邸=賞春園)에서 치료 중이던바 약석(藥石)이 무효(無效)하여, 지난 5월 19일 오전 3시로써 기세(棄世)하니 향년(享年)이 62이었다.


이 기록의 불완전한 점을 보충하는 뜻으로 천도교주(天道敎主) 박인호(朴寅浩) 씨가 찬(撰)한 바 선생의 묘지명(墓誌銘)을 병기(幷記)한다.


天道敎 3世敎主 義菴 聖師 秘室記


聖師諱秉熙字應九姓孫氏貫密陽父諱懿祖  辛酉[1862]四月八日誕生于淸州大周里實布德第二年也  壬午[1882]聞道於第二世敎祖海月神師乃大悟爲高足甲午承師命率道衆力扶民權累起而累失績  丙申[1896]神師賜道號曰義菴  丁酉[1897]乃承道統爲第三世敎主  辛丑[1902]東渡觀天下大勢非蓄材相機不可乃養成靑年  癸卯[1903]日露戰役起聖師以東洋平和此其時矣遂贊謀日廷當局而亦無成  甲辰[1904]痛韓政日非移書議政大臣尹容善而顧不能用於是命敎徒斷髮使李容九等設會于韓京革虐政以張民權  乙巳[1905]遵第一世敎祖水雲大神師遺旨命敎名曰天道布告天下  丙午[1906]歸國定大憲先是李容九不用命而大誤時事聖師發宗令黜其黨與五十九人而敎與會廓乎其分離矣  戊申[1908]授大道主職于朴寅浩作无體法經自是道益高而德益邵亦不自睱逸眷眷誨人使信仰而統一規模井井尤用心於啓發文化而立機關焉  庚戌[1910]日韓遂合倂矣後十年己未三月一日聖師與民族代表三十二人宣言朝鮮獨立被拘監獄翌年十月疾劇保釋竟以  壬戌[1922]五月十九日還元春秋六十二葬于高陽郡崇仁面牛耳洞盖杖屨盤施之所也

夫人郭氏洪氏五女適李寬泳鄭廣朝方定煥餘未行外孫男女七人  鳴呼我聖師應天而降早入宗門以一身自任乎宇宙之大而其苦衷竟未就則命也  若夫名聲洋溢乎六洲而其道之顯互乎五萬斯年者特盛德之光輝耳小子何敢形容其萬一哉  謹書大槪如此納之幽室以徵夫無窮云

布德六十三年五月 日 門人 朴寅浩 謹撰


덧붙이는 말[附言]


기자(記者)는 지금 선생의 법체(法體)가 오히려 식지 아니한 금일(今日)에 있어 삼가 선생의 일생을 말하노라 하였다. 기자는 불행히 그동안[先時] 선생을 자주 대하지 못하여 선생의 진면(眞面)을 말할 자격이 없으며 선생과 자못 시종(始終)을 같이한 많은[幾多] 노숙(老宿)이 없는 바는 아니나 바야흐로 선생의 상중(喪中)에 있어 그의 경위(經緯)를 문의(問議)할 수도 없으으로 아직 이렇게 기술하여 후일의 정정(訂正) 완성을 기약[期]하며, 더욱이 선생의 일생을 논평하는 점에 이르러서는 기자가 감히 할[敢爲] 바 못 되므로, 이 점에는 일필(一筆)을 불염(不染)하고 우선 그 역사(歷事)를 간략기 기록[略記]한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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