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년의 회고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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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편집자주] 이 페이지는 3.1혁명 50주년이던 1969년에, 당시에는 생존해 계시던 3.1혁명의 직접 참가자들이 좌담회를 통해, 3.1혁명 당시 천도교의 준비 상황, 각 지역별 3.1운동 전개과정 등을 본인의 직접 경험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이다. 100주년을 맞이하며 새로운 자료들이 속속 발굴되고 있으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3.1혁명을 새로운 문명 세계를 전망하는 한민족의 지혜와 용기, 그리고 그것을 책임진 천도교의 다시 개벽운동으로서 자리매김하는 일이라고 본다. 이 글에서는 원문의 뜻을 살려 '3.1운동'을 그대로 쓴다.
등장인물 중
○주옥경은 의암 손병희 선생의 부인으로 3.1운동 당시 비서/연락/경계 등의 일을 담당하셨고, 의암 선생이 서대문감옥에 있을 때는 옥바라지를 직접 하셨던 분
○이병헌은 당시 천도교중앙총부 직원으로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이 회합할 때 서기 역할을 하시고, 후에 <3.1운동비사>를 쓰신 분
○박래원은 민족대표 48인이며 당시 천도교대도주이신 춘암 박인호 선생의 조카 / 3.1운동 이후 사회주의 계열 운동에 매진하였으며, 5.16혁명 당시 체포되어 2년여의 수감생활을 함
이하는 <<신인간>> 원문
기미(己未) 독립선언 50주년을 맞으면서 연로하신 원로 어른들을 모시고 그때의 실황을 되살려 보는 동시에 이제까지 공개되지 못한 비화(秘話)들을 수록하고자 담화를 가졌다. 그러나 이 좌담으로도 3·1 운동의 전모를 부각할 수 없는 일이기에 어느 때고 이들 고로(古老) 어른들을 개별적으로 접촉하면서 전국 각지의 운동 상황을 계속해서 수록하려고 한다. 이번에는 장병학, 주동림 두 분의 말씀을 이 좌담회 기사 끝에 수록했다. (편자)
참석자
주옥경(76세) 천도교부인회장, 이병헌(75세) 전 부교령, 백세명(71세) 상주선도사
이동락(80세) 전 종무원장, 이우영(67세) 감사원장, 이응진(62세) 종의원의장
김명진(62세) 종무원장, 박래원(68세) 천도교재단이사, 박용삼(66세) 전 교화관장
장병학(80세) 서대문교구장, 주동림(63세) 서울교구장
사회_ 이광순 본사주간, 기록_ 김정개 본사 편집부장, 일시_ 1969년 2월 16일 오후 1시
장소_ 중앙총부강당 2층 회의실
사회 : 예년에 볼 수 없던 늦추위에 폭설까지 겹친 불순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나오셔서 감사합니다.
이병헌 : 대단한 혹한입니다. 입춘 후에 영하 20도를 오르내린 추위란 처음 당해보는 일이지만 더군다나 이렇게 많은 눈이 와보기도 나로서는 처음 당해보는 일인데 3·1 운동 다음 해에 이와 비슷한 날씨였지만 올해보다는 못했지요.
사회 : 올해는 3·1 독립선언 50주년이 됩니다. 사회단체들과 언론기관 그리고 행정부에서도 삼일절 기념행사를 성대히 치른다고 서두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 3·1 독립선언을 주관한 종가(宗家)이면서도 실제로 종가다운 체통을 지닐 만큼 이 기념행사가 성대하지 못한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그러나 3·1 운동이 천도교의 주관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꼭 우리 교회의 전담물인 양하는 생각을 가진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원문 확인요) 그보다는 3·1 운동에 대한 자료 즉,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숨은 자료들을 발굴해서 이 사회에 제시하여 올바른 역사가 서술되도록 힘쓰는 일로서 50주년을 맞는 삼일절의 의의를 갖고자 합니다. 그래서 신인간사로서는 2, 3월 합병호로 기념특집을 꾸미면서 3·1 운동의 참모습을 널리 알리는 의미를 곁들인 자료의 수집을 꾀해 봤습니다. 특히 오늘 연로하신 선생님들을 모신 것은 실제로 3·1 운동에 참가하신 체험담, 보고 듣고 느끼신 그대로의 생생한 기록을 남기자는 뜻에서입니다.
3·1 운동의 참모습을 남기고자
사회 : 그러면 먼저 주(朱) 사모님께서 그때 당시 즉 3·1 운동을 비밀리에 준비하시던 실황을 차근히 회상하시면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옥경 : 그야말로 세월이 유수 같군요. 벌써 기미년 만세 때가 50주년을 맞이했으니… 하긴 저야 그 운동에 직접 참가한 것도 아니고 다만 여러 어른이 모여서 의논할 때 문지기 역할밖에 한 것이 없으니까요.
사회 : 참으로 사모님 겸손한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 동덕과 <<신인간>> 애독자들을 위해 주저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주옥경 : 그때 3·1 운동의 기초적 준비는 꽤 오래전이라고 여겨집니다마는 본격적인 준비는 기미년 전해부터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그분은(의암성사) 밤낮으로 경찰의 미행 감시가 심해 마음대로 출입을 못 하고 주로 큰 윤곽만을 지시한 다음 바깥 일은 오세창, 권동진, 최린 세 분이 맡아 하셨지요.
사회 : 그럼 그때 사모님께서 그 내용을 알고는 있었겠군요.
주 : 가족 중에는 아무도 아는 사람 없이 나만 알고 있었지요. 밤낮으로 모여서 거사준비 의논을 했으니까요. 그럴 때 저는 문밖에 서서 혹시 누가 가까이 와 엿듣지 않는지 파수를 봤었지요. (일동 웃음)
보성사의 십 년 결손도 독립운동의 준비
사회 : 성사님께서 독립운동을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계셨다는데 그럼 보성사를 적자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처분 않고 두었다는 것은 역시 독립운동을 위해서였을까요?
박래원 : 물론일 테죠. 만약 보성사가 없었다면 독립선언문 인쇄를 못 했을 테니까.
주옥경 : 그렇답니다. 그때 보성사 책임자는 33인 중 이종일 씨가 맡았었는데 워낙 적자만 나고 인쇄물이라고는 얼마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었어요.
사회 :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서구식 인쇄시설이라는 게 별로 없었을 때가 아니었습니까?
주옥경 : 그렇지요. 하지만 그때만 해도 아직 문명이 별로 발전되지 못했을 때였으니까요. 인쇄물이라는 게 그저 신소설 정도가 간혹 있었을 뿐이었으니까요. 매달 적자가 이만저만 나지 않았었답니다. 그러니까 임명수 씨라는 이가 인쇄소 총무 격으로 있었는데 그분이 성사님께 와서는 제발 인쇄소를 팔아치우자고 말씀드려도 그 양반은 막무가내였으니까요. 그저 그 말만 나오면 “그대로 두어…” 하고는 아무리 적자가 나도 군말 없이 돈을 대주는 게 아니겠어요. 그러니깐 임명수 씨가 하도 안타까워서 하루는 그분 앞에서 애걸하다시피 보성사를 팔자고 졸랐었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벼락같이 호령하는 게 아니겠어요. “그 일이 싫으면 그만두어… 다른 사람들에게 맡길 테니…” 그러고는 다음 말씀이 "군사를 십 년 길러서 한 번 쓰는데… 나도 다 생각이 있어 그대로 두는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다음부터는 아예 인쇄소 팔자는 말은 다시 못 꺼냈지요.
사회 : 그러고 보면 성사님께서 광복 운동을 위한 준비는 원대하고도 주밀한 계획으로 진행한 셈이었군요. 30여 개의 대교구에 등사기 한 대씩 비치했고 대교구에서 사원 한 사람씩 선발해서 우의동 봉황각에서 특별연성한 것 등이 모두 독립운동 준비의 일환(一環)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병헌 : 물론이지요. 그 30여 명 사원은 자기 출신 교구의 연락원격으로 유사시에 대비한 특별 요원이었지요. 그러기에 이들의 역할이 3·1 운동에 매우 컸었습니다. 말하자면 자금 조달을 위한 특별성금 등 모금연락 또는 각종 교무행정의 중요 연락사무를 맡은 위에 예를 들면 서울에 와있으니 자연 견문이 넓어졌고 자기가 아는 새 지식으로 새로운 사조(思潮)를 전달해 주는 역할까지 겸했지요.
타락을 가장
사회 : 성사께서 타락을 가장해서 한강 선유(船遊)와 주색에 탐닉한 듯 인상을 끼쳤다는 시기는 3·1 운동의 준비가 무르익어져 간 때일까요? 그 내력을 좀 얘기해 주십시오.
주옥경 : 나로서는 이 일에 대해 굳이 말하고 싶지 않지만, 외부에 뜬소문과 신문 기사들과 반대되는 일이 거의 전부라고 해고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 어른은 외부에 나가서 쓰는 돈과 그 행장은 왕후장상이 부럽지 않았으나 집에 사생활은 극히 검소하고 절제 있는 살림이었어요. 일분(一分)의 낭비를 엄금했고 식사는 거의 혼식이었고 내복 등은 그 어른 자신도 새것만을 입지 않았어요. 철저한 시간 생활, 절제 있는 수도, 어느 한 가지도 규칙적이 아닌 것이 없었어요. 그러기에 외부의 소문을 좋지 않게 퍼뜨리기 위해서도 아마 매우 효과적으로 과장했던가 봐요.
나 역시 오늘까지 팔십 살 가까이 살면서도 쑥스러운 변명 같은 집안 얘기를 삼갔지요. 솔직한 표현이라면 그 어른은 나의 스승이요 성사(聖師)지요. 신도의 입장에서 경모하고 신앙하면서 오늘까지 살아온 것입니다. 큰일을 기획하시노라면 자연 일제의 눈을 가리기 위해서도 처변하시지 않고서야 할법한 일이겠어요. 3·1 운동이 가까워져 온 시에는 외부의 오해는 물론 교인들까지도 오해할 정도였지요.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던 날
사회 : 다음은 독립선언서를 보성사 인쇄소에서 찍어냈다고 하였는데 그때 인쇄하던 숨은 비화를 좀 말씀해 주시지요.
주옥경 : 그때 천도교에서 보성사 인쇄소와 보성소학교, 중학교와 보성전문학교를 다 경영했었습니다.
박래원 : 그 자리가 바로 수송동 지금 불교 총무원 자리였지요.
주옥경 : 그렇습니다. 그 운동장 맨 끝에 2층 건물로 된 보성사 인쇄소가 있었는데 인쇄시설은 지하실 같은 그 건물의 아래층에 있었어요. 이종일 씨라는 분이 인쇄를 맡아서 낮에는 다른 인쇄물을 취급하고 직공들을 일찍 돌려보낸 다음 밤에는 사방 문을 걸어 잠그고 불빛이 새나가지 않도록 창문을 가리고 인쇄하는데 공교롭게도 신철이라고 하는 유명한 한국인 악질 형사에게 들켰죠.
박래원 : 신철이라면 독립투사들을 잡는데 솜씨 있기로 유명한 형사지요…. 그래서 왜놈들에게 굉장한 신임을 받았었다는군요.
주옥경 : 바로 이 신철이가 우리 보성사 주위를 순찰하다 보니 밤중에 인쇄하는 소리가 달가닥거리는데 사방 문에 불빛이 보이지 않으며 다만 공기통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더라는군요. 그래서 문을 두드리니 이종일 씨는 그만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대요. 어디다 인쇄물을 감출 수도 없고 당장 악마 같은 그 형사는 문을 벗기라고 소리 소리고. 어이구 한울님 맙소사 이젠 만사가 다 글렀다고 할 수 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는군요.
그랬더니 그 신철이가 들어와서 한번 인쇄소 안을 훑어보니 모든 일이 탄로 나고 말았죠. 그래서 이종일 씨는 그만 그 신철의 발밑에 엎드려 제발 당신도 우리나라 백성이면 독립을 원하는 마음은 같을 게 아니냐고 하루만 기다리면 내일은 다 세상에 알려질 일이니 그저 오늘 하루만 못 본 것으로 해 달라고 애걸복걸했답니다. 그리고 여기 잠시만 기다리고 있으면 바로 의암 선생을 뵙고 오겠다고 하고는 달려오지 않았겠어요.
이 말을 들은 그 양반은 즉시로 서슴지 않고 오천(五千) 원 뭉치를 이종일 씨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신철이가 오천 원 먹고 눈을 감아 주었었죠.
오천 원 주고 신 형사를 무마
김명진 : 그때 돈 오천 원이면 거액(巨額)이지요 ?
이응진 : 지금 돈 오천만 원 정도는 될 거예요.
김명진 :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이었군요. 우리 민족의 그 찬란한 투쟁사가 까딱 잘못했으면 하루아침에 와해할 뻔했었군…. 그런데 그 신철이가 나중에 발각되었죠.
박래원 : 3·1 운동이 끝난 다음에 발각되었지. 신철이가 만주로 출장 갔다 돌아오는데 서울역에서 그만 왜놈 헌병에게 붙들렸거든. 유치장 안에서 극약을 먹고 자살해 죽었다고….
이응진 : 역시 한울님이 무심하진 않군요. 여하튼 이런 말은 여담이지만 그때 천도교의 독립 자금을 먹은 사람 치고 잘산 사람이 없다고….
주옥경 : 그건 틀림없습니다. 내가 겪어온 가운데서 그런 사람이 잘 되는 건 못 봤으니까요.
이병헌 : 그때만 해도 서울 장안에 그리 종이가 많지 않았던가 아니면 미처 준비를 못했던 까닭인지 여러 가지 종이를 썼었죠. 지금 말로 하면 갱지, 모조지 또는 화선지 등으로 몇천 장씩 찍은 것이 이만여 장을 찍었지요. 한데 보성사에서 다 독립선언문올 찍은 다음에 운반할 때가 문제였답니다.
인쇄된 독립선언서 운반에도 곡절이
박래원 : 이종일 씨 집에다 감춰두었었지…. 그때 이종일 씨는 여기 지금 교당 자리에 초가집을 쓰고 있었으니까….
이병헌 : 신숙(申肅) 씨, 인종익(印鍾益), 나, 세 사람이 노동복을 갈아입고 운반했는데 애초에는 이종일 씨 집에 보관하는 게 아니라 독립선언문을 인쇄하여 손수레에 실어서 안국동 네거리 옆에 있는 고춧가루 집이었죠. 즉 이 집은 미리 보성사 근처에 조용한 집을 교회 돈으로 사서 오지영 씨를 들어 있게 했던 건물로 여기에 맡겨 두기로 했는데 이 집에서 문을 열어 주지 않거든….
그래서 할 수 없이 이종일 씨 집으로 오는데 마침 정전이라 잘 되었다고 안도의 긴 숨을 내쉬면서 안국동 파출소 앞을 통과하는데 순사가 왜 불을 켜지 않고 가느냐? 하고 물었단 말이야.
그래서 그러잖아도 불을 켜려고 초를 사려 하는 중이니 이 앞에 가서 불을 켜겠다고 용케 빠져나왔었지. 한데 재동 파출소에서 또 걸렸단 말이야. 마침 왜놈 순사가 검문하기에 메주라고 했더니 민영호 씨 집에 가는 물건이냐고 묻지 않겠어요. 그렇다고 했더니 그대로 가라고 해서 무사히 빠져나왔지요. 정말 아슬아슬했었답니다.
박래원 :결국은 왜놈들이 우리 독립선언문을 인쇄했다고 해서 보성사를 방화했지. 물론 자연 발생 화재인 것처럼 하고 그때가 새벽녘인데 나도 가봤었지. 글쎄 소방대들은 오긴 왔어도 불끄는 시늉만 하다가 수돗물이 안 나온다고 돌아가고 말았거든….
보성사 인쇄소는 왜놈들의 방화(放火)로 소실(燒失)
이우영 : 그때 우리 보성사와 같이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명월관 지점 태화관도 왜놈들이 방화하여 전소시켰다지 않아요.
사회 : 3월 1일 독립 선언하던 첫날의 서울 시내 표정을 박래원 선생께서 말씀해 주셔요.
박래원 : 나는 지금 예순여덟이니 기미년 만세 때가 열여덟 나던 해였지요. 내가 성장하고 공부하기를 박인호 대도주님 댁에서였으니까 나이가 어리지만, 어른들의 심상치 않은 동정으로 미루어 대략 어떤 절박한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눈치로 짐작은 했었답니다. 그리고 어렸지만 탑동공원(파고다공원)에 가서 만세도 부르고 시위운동도 앞장섰었습니다.
사회 : <파고다공원>에 모인다는 것은 어떻게 아셨던가요? 그리고 그때 상황을 좀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박래원 : 나는 3월 1일 아침에,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저의 형님 래홍(朴來弘)께서 탑동공원에 가 보라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대략 짐작은 하고 탑동공원에 아침 수저를 놓자마자 달려갔었지요. 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학생들이 공원 주위를 빙빙 방황하며 서로 눈치를 살피고 있더군요. 얼마 안 있어 점점 그 수효가 늘어나더니 오후 약 한 시경 넘어서는 서울 시내 각급 학교 학생 2, 3천 명이 팔각정을 중심으로 모였습니다.
수천 명 학생이 팔각정으로 모여
이윽고 누가 선창인지 모르겠지만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고 어떤 사람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었지요. 그다음은 세 갈래로 나누어서 조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으로 들어갔는데 나는 종로를 지나 서대문으로 해서 지금은 합정동인 프랑스 영사관으로 갔었습니다. 프랑스 영사관은 벌써 왜놈 헌병에 의해 경비되어 있었지만, 우리 대표 몇 사람은 프랑스 영사와 악수도 하고 또한 우리의 독립선언 의사도 전달했습니다.
사회 : 그러면 그때 일본 헌병이나 경찰은 시위운동을 제지하거나 방해하지 않았습니까.
처음엔 일경(日警)도 구경했고
박래원 : 우리는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지만 워낙 저들로서는 돌발 사태니까 처음에는 따라다니며 동태만 보고 무력을 행사하진 않았었지.
사회 : 그다음은 어디로 향해 시위 행진하셨던가요?
박래원 : 그다음은 다시 돌아와서 대한문(大漢門) 앞에 경성부청으로 몰려 왔었지만, 왜놈 헌병 약 4, 50명이 가로막는 바람에 다시 소공동 지금 조선호텔 앞으로 해서 진고개(충무로)를 돌아 총독부로 향해 행진했었지요. 그때 우리 인원수는 벌써 만여 명이 넘었거든. 물론 우리 행렬만 그랬으니까 서울 시내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 행진한 인원을 총합한다면 실로 수만 명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회 : 그럼 서울 시내 인구 전부가 들고 일어났다고 하겠군요.
박래원 : 그렇죠. 더구나 그때는 고종황제의 국장이 있고 해서 시골 사람들이 많이들 모였으니까. 더구나 고종황제가 왜놈에게 독살되었다고 해서 민심이 극도로 흥분 되어 있었습니다.
사회 : 그럼 시위행진은 어디서 끝났습니까?
박래원 : 총독부(지금의 남산 왜성대) 앞에서 왜놈 헌병과 충돌한 다음이었으니까요. 아마 여섯 시가 넘어서일 겁니다. 총독부 앞에선 왜놈 헌병이 칼을 빼 들고 함부로 난도질해서 만세꾼이 귀가 떨어지고 팔을 상하는 등 가진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정말 이제 와서 그때를 회상하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그때는 정말로 우리나라가 독립되는 줄 알았거든. 누가 만세를 부르라고 시키지 않아도 자진해서들 목청이 터지라고 독립 만세를 불렀지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야말로 한덩어리로 뭉쳤으니까. 아마 이것이 애국심이고 동포를 사랑하는 충심이 아니겠습니까.
사회 : 그때 우리 천도교 중앙총부 실정은 어떠했습니까? 교회의 최고 지도자들이 이미 15명이나 민족지도자로서 33인에 포함되어 구속되었고 지방두목들까지 어울려서 수백 수천의 핵심 인물들이 모조리 구속됐으니 그야말로 초상집 같은 형편이었겠는데….
박래원 : 그때 중앙총부는 주인 없는 집과 다름없었지요. 의암 성사께서는 벌써 이 운동을 계획하실 때 왜놈들로부터 교회에 대한 탄압을 회피하려고 대도주 박춘암 상사(박인호)에게 유시문까지 하달하여 두었지만, 기독교 측에 제공한 3·1 운동 거사 자금 때문에 문제가 복잡해졌습니다. 금융관장 노헌용 씨가 춘암상사의 지시로 5천 원을 기독교에 전달한 근거가 발각되어 결국은 3월 10일 현 기관장 오상준 씨를 비롯한 여럿이 검거되었습니다.
왜군 1개 대대가 천도교총부를 강점
그리고 용산서 왜군 일개 대대가 진주하여 와서 아예 우리 중앙총부를 강점하였었죠. 그래서 한동안 사무도 못 보다가 십여 일이 지난 다음부터 비로소 총부 사무실 문을 열었었지요.
사회 : 그러니까 한때는 우리 교회 운영이 마비되었다고 하겠군요.
박래원 : 말하자면 그렇지요. 천도교가 3·1 운동을 주동했다고 해서 왜놈들이 우리 천도교인이나 교회에 대한 보복은 가혹했었으니까요.
사회 : 그리고 일경(日赞)은 독립운동자금이라고 해서 교회와 교인들로부터 많은 자금을 약탈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이병헌 : 많은 액수지요. 지방 두목들이 가지고 온 돈을 미처 총부에 내기 전에 3·1 운동이 터지고 나니 어디다 맡길 데가 없어 우왕좌왕하다가 압수당한 일도 있고 총부에서 맡겨놓은 은행예금이 동결된 것 또는 여기저기 분산 보관했던 돈들도 마치 주인 잃은 재산같이 허실 되고 약탈당하고 해서 명분 없이 탕진됐지요.
사회 : 그때 서대문 형무소 상황을 좀 말씀해 주십시오.
박래원 : 그때 사모님은 아예 형무소 문 앞에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 방 한 칸을 얻어서 조석으로 성사님의 식사 시중을 하셨지요.
주옥경 : 그때는 그 어른 식사 시중뿐이 아니었습니다. 기독교는 물론 만세 부르다 곤장을 맞고 형무소에서 나오는 사람들은 다 우리 천도교에서 뒤치다꺼리했으니까요. 여하튼 서대문 형무소가 전부 만세 부른 사람들로 메어지라 찼었으니까요.
형무소 앞에 총부직원 파견
박래원 : 그렇습니다. 다른 잡범들은 없다시피 됐었으니까요. 우리 천도교 중앙총부에서는 직접 직원을 파견하여 고문당하고 풀려 나오는 우리 동포들을 구호하고 그들의 치료는 물론 노자까지 주어 보냈으니까요. 그런데 특히 기억에 새로운 것은 우리 교인으로서 33인 민족대표의 한 사람이었던 양한묵 씨가 뇌내출혈로 옥사하자 그분의 영구를 재동 자택으로 호송하는데 그 아드님 되시는 분이 인력거 위에 앉아 오며 마구 조선독립 만세를 외쳤어도 무슨 까닭인지 왜놈들이 수수방관만 하더군. 아마 미리 연락을 받은 거라고 생각됩니다만….
사회 : 3월 1일이 지난 다음에 서울의 실정은 어떠했습니까? 박 선생님이 서울에 계셨으니까 다시 좀 말씀해 주실까요.
매일같이 게릴라식으로 만세 불러
박래원 : 소요스러웠지요. 저는 서대문 감옥 앞에서 우리 강의규 의사가 재등 총독을 살해할 목적으로 던진 폭탄 소리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봄 몇 달을 계속해서 매일 밤이 되면 남대문, 동대문 그리고 동아일보사 부근에서 우리 학생들이 방황하다가는 삐라를 뿌리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가는 일경이 오면 흩어지는 등 계속하였지요. 요즈음 말로 하면 게릴라식 전법으로 왜놈들에게 골탕을 먹였다고 할까.
사회 : 선생님들께서 좋은 말씀 많이 해주셨습니다. 그러면 다음으로 이 3·1 운동의 의의와 이 운동을 주관한 우리 천도교의 그때 실정을 좀 더 상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먼저 이우영 선생님.
이우영 :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3·1 운동 계획은 갑진혁신운동(1904)이 실패로 돌아간 직후부터 손의암 성사님의 깊은 맘속에서 이미 착착 준비되었다고 보는 게 옳겠지요. 일부에서는 삼일운동의 전체적 흐름이 미국 대통령 월슨의 민족 자결주의에 힘입었다고들 하지만 우리 천도교에선 벌써 그 전에 독립선언의 준비를 서둘렀다고 나는 보겠습니다.
우리 천도교에서는 아까도 그런 말씀이 나왔습니다마는 중앙에 보성사를 경영하면서 교구마다 등사기 시설을 완비시킨 일이나 49일 기도회를 열고 이신환성(以身換性)이라는 주제로써 교인들의 희생정신을 고취한 점 등을 들어서도 알 수 있으니까. 또한,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운동을 거족적으로 일원화시켰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학생층, 종교의 이동(異同)은 말할 것도 없이 전 국민이 총망라하여 체계화시키고 또한, 단결시켰다는 점이 위대했었지요.
이신환성(以身換性)의 희생정신 고취
백세명 : 그렇지요. 종교 간이라는 것은 서로 견원지간과 다름없는데 민족 대업을 위해 총 단결하였고 우리의 민족대표 33인은 모두가 왜경에게 잡혀가 단두대에 이슬이 될 각오 하에 계획한 것입니다.
사회 : 요즈음 젊은 역사 학도들이 우리의 33인 민족대표들이 왜놈들에게 자수했다느니 하는 말들이 있는데 여기에 대해 좀 말씀해 주십시오.
백세명 : 그런 학자들의 말을 들을 땐 정말 한심스러운 일이라고 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순국선열들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만약 그 당시 3·1 운동을 폭력적으로 이끌었다면 우리의 수많은 동포가 얼마나 많이 왜놈들에게 학살당했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무슨 시빗거리를 잡고 늘어지려는 왜놈들에게 좋은 탄압의 구실이 되었겠지요. 무저항 비폭력을 표방하고 나선 3·1 운동이었지만 우리 동포는 왜놈들의 총칼 앞에 수많은 희생자를 내지 않았습니까.
손의암 성사를 비롯한 33인들은 떳떳이 왜놈들에게 독립을 선포하고 피신함이 없이 그들에 게 우리 민족의 뜻을 전달하고 일제의 반성을 촉구한 것입니다. 얼마나 민족대표다운 행동입니까.
민족대표다운 의연한 자세
사회 : 원래 3·1 운동은 의암 성사의 10년 준비의 장기계획이 용케 실패 없이 실현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애초에 성사께서는 갑오(甲午)혁명에 참전해서 북접통령으로 수만 명의 동학군을 거느리고 직접 일군(日軍)과 싸운 결과 참담한 패전을 맛 보았고 갑신혁신 때에는 외국에 망명하여 나가 계시면서 국내 도인(道人)들을 지휘해서 이십만 동학신도들은 일제히 단발흑의로 개화운동의 선봉에 내세워 구국운동을 꾀했으나 이때에도 외세의 간섭과 얕은 민도로 말미암아 혁신운동의 기반을 구축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일진회가 정치적 오류를 범하게 돼서 또다시 실패의 쓴잔을 맛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두 번 실패를 겪는 동안 나라는 아예 망했고 민족은 산지사방(散之四方) 흩어지고 거지 때로 와해하여 남북만주에 유리될 때 청로(淸露)의 노대(老大)강국을 물리친 일제(日帝)의 무단(武斷) 폭정을 어떻게 막아 낼 것인가? 여기에 10년 계획의 치밀한 설계도가 준비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두 번 실패한 갑오, 갑신(甲午甲辰)의 생생한 경험으로 세 번째의 마지막 운동에는 자기 희생 곧 독립선언의 제단에 자신을 바쳐서 구국의 길을 연 것입니다.
민족대표 33인으로 서명한 그분들은 선두에선 의암 성사를 따라 독립선언의 순국 제단에 희생으로 나섰던 분들입니다.
삼십삼 인은 독립선언의 제단에 희생으로
이우영 : 그렇지요. 우리 민족 대표 33인이 그대로 자기 몸의 안전을 위해 피신했다면 그것은 졸렬한 행동이지요. 더구나 33인은 모두가 종교 지도자들이었으니까요. 비열한 행동을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백세명 : 그때 당시 공판기록을 봐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일이 없이 자기가 한 일은 했다고 떳떳이 진술하였으며 추후도 비열한 점이 없었으니까요. 정말 민족대표 33인의 행동은 떳떳하였습니다. 전쟁터에서 지휘관이 앞장서서 싸워야 그 부하들이 따를 게 아닙니까. 33인은 이런 경우와 같다고 하겠지요.
그리고 우리나라 통일정신도 3·1 정신에 의해야 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거족적 단결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3·1 운동 때뿐이었으니까요. 이러한 민족적 단결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위대한 조국을 건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 : 그런데 우스운 이야기로는 모(某) 씨니 어느 선생이니 하는 분들이 의암 성사를 협박해서 독립운동을 하도록 충동했다느니 혹은 갑신(甲辰)혁신운동의 잘못을 씻기 위해서 3·1운동을 했다느니 하는 말도 없지 않으니 자수설인들 한 번쯤은 나와봄 직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웃음) 그리고 독립선언서의 원칙도 물론 의암성사께서 최린 선생에게 지시해서 된 일인데 이것도 모 씨가 뒤에 삽입했다는 말도 있으니 글 쓰는 사람들은 자료의 섭렵에 게으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병헌 : 물론이지. 사람의 이름이 틀리는가 하면 사건 자체를 엉뚱하게 만들어 놓는 예도 없지 않거든. 차라리 자료를 제대로 못 봤다면 다행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고의적인 장난 같아서 불쾌할 정도란 말이야.
사회 : 올해에는 여러 곳에서 3·1 운동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를 본격적으로 시도하는 듯한데 어떻습니까? 우리 천도교의 입장에서 간단히 정의를 내린다면….
3·1 정신은 주체성의 대종(大宗)
백세명 : 주체의식의 대종으로 삼아야지요. 3·1 운동이 없었던들 한국은 없는 거나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이 운동이 없었던들 일제(日帝)의 교만을 무엇으로 막았겠습니까? 민족의 긍지는 또 어디서 우러나올 것입니까.
이 운동으로 인해서 야인(野人)부족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소련연방의 잡색 인종이나 동남아아(東南亞阿)의 넓은 지역에 퍼져 있는 소수(小數) 부족들의 수준(水準)을 벗어난 것입니다. 이 말은 곧 공산주의의 침투를 막아낼 수 있는 자주의식(自主意識)을 뜻하는 것입니다.
민족을 대표한 건국(建國)의 사표(師表)
사회 : 그리고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것이 33인의 행동에 대한 평가입니다. 정말 무력하게 자수하다시피 쉽사리 자진 체포됐느냐? 그렇지 않으면 독립선언서의 내용 정신과 같이 정정당당(正正當當)하게 독립을 선언하고 힘으로 인지되었을 뿐 추후도 굴함이 없었으니 그야말로 민족을 대표한 건국(建國)의 사표(師表)였느냐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물론 오늘의 민족운동과 반세기(半世紀) 전(前)의 민족운동은 근본적으로 그 양상이 다르다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소위 자본주의 열강들이 근대화 운동이라는 것이 약한 나라들을 무력으로 병탄해서 자기의 부강을 꾀한 것인데 화승총 몇 자루나 가지고 지금의 월남식 항쟁을 못했다고 보면서 자수운운(自首云云)한다면 시대(時代)착오도 이만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그때 사회의 모든 상황을 분석 비판해 본다면 비폭력 원칙 이외의 수단으로는 도저히 3·1 운동의 효과를 거두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 다음 호에서는 좌담회 참석자들이 각 지역별로 자신의 견문과 경험담을 증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