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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r 04. 2019

독립선언 반세기의 회고 (하)

-기미년의 회고 (5-2.끝)

사회 : 그러면 다음으로 평안도 지방의 독립 상황을 백세명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백세명 : 3·1 운동 즉 기미년 만세 때 나는 고향인 평북 의주에 있었습니다. 그때 내 나이가 스물한 살 때였지요. 청년 시절이라 왜놈들에 대한 적개심과 독립에 대한 간절한 소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답니다. 한데 기미년 1월경이라고 생각됩니다. 중앙총부의 지시로 49일 기도회를 열었는데 그 주제가 '이신환성(以身換性)'이었습니다. 이신환성이란 곧 몸으로써 성령을 바꾼다. 그 말씀인데 이것을 다시 풀이하면 몸을 돌보지 않고 정신을 살려야 한다는 희생정신으로써 우리는 어렴풋이나마 이 말에 무슨 뜻이 있지 않은가 생각을 하였었지. 그런데 내가 사는 이주 ‘월하면’에는 천도교 교리 강습소가 있는데 여기 강사로 법학도인 의산 최동오 씨가 계셨답니다.


대동청년회 조직


최동오 씨로 말하면 현재 우리 최덕신(崔德新) 교령님의 춘부장이 되시지만, 이때 최동오 선생은 대동청년회라는 항일단체를 비밀리에 조직하였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할 때 다 그러한 일들은 어떤 계획에 대한 사전 준비로 생각되는군요. 대동청년회 조직이 끝나고 또한 49일 기도가 끝나자 얼마 안 있어 구석구석에서 수군거리며 민심이 소요했었죠. 한때는 의암성사께서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하는 강화회의에 참석했다는 엉뚱한 소문까지 나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일날이었지. 나의 죽마고우로 최홍율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 집에 갔더니 그 사람은 없고 마침 그 사람의 아버님이 계시다가 말하기를 홍율은 의주에서 사람이 와서 독립만세를 부르러 읍내로 들어갔다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나도 그 길로 의주로 달려갔지만, 그때는 3월 1일(2일-인용편집자)이라 벌써 독립만세를 부르고 난 다음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천도교구에 들러 그 경로를 물어보니까 3월 1일 며칠 전부터 의주 동교회 목사인 유여대(劉如大, 33인 중의 한 사람) 씨가 우리 천도교구에 찾아와서 서울서 무슨 소식이 없었느냐고 묻기에 아무런 연락도 없다고 했더니 또 몇 시간 후에 찾아와선 또 무슨 연락이 없었느냐고 수삼 차에 걸쳐 묻고 가고는 또 묻고 가서 천도교구에서는 다 이상하게 여겼답니다.


그런데 마침 평안남북도의 연락을 맡으신 선천(宣川)에 김상열(설) 씨가(천도교인) 찾아와서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서울 소식을 전했답니다. 그리고 이어 천도교월보가 도착했는데 그 안에 3·1 운동에 대한 비밀지령이 있었지요. 그 비밀지령이란 다름 아닌 기독교와 제휴해서 거사하라는 말씀이었거든. 그래서 의주에서 각 면에 있는 전교실까지 밤길을 육십 리나 뛰어다니며 연락을 취하였답니다.


의주에서도 기독교와 제휴


사회 : 그러면 우리 천도교구와 기독교가 별도로 거사를 준비했습니까?

백세명 : 거사는 기독교와 공동보조를 맞추는데 서로 조직망이 다르니까 연락은 별도로 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리하여 우리는 3월 3일 고종황제 국장 추모식을 이용하여 양실학원에 천도교, 기독교인 수천 명이 모였는데 어느새 왜놈 헌병들이 눈치채고 찾아와선 양실학원 교장에게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이 모였느냐고 물으니까, 교장이 엉겁결에 말하기를 우리 학원 학생들이라고 말했더니 왜놈 헌병이 학생들이 이렇게 나이가 많으냐고 원장 뺨을 때린 다음에 우리 동포들에게 마구 폭행을 가했습니다.

이때 천도교인 백영락 씨가 의분을 금치 못해 조선 독립만세를 부르니까 다 모두 거기 따라서 조선 독립만세 소리가 구석구석에서 터져 나와 헌병들과 잠시 충돌이 있었는데 이때 잡혀간 사람이 수십 명 되었었지요.


사회 : 그러니까 의주의 3·1 운동은 기독교와 우리 천도교가 같이 보조를 맞추었었군요.

백세명 :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때 기독교 측에서는 유여대 씨와 그 참모로 법학도인 안석응 씨였고 우리 천도교 측에서는 최안국 씨와 역시 법학도인 의산 최동오 씨가 서로 교회의 조직망을 통해 민중을 동원했었거든요. 그런데 좀 웃기는 일로는 3월 1일에 우리가 독립만세를 부를 때 왜놈 헌병들이 우리 대표를 불러서는 왜 이렇게 갑작스레 독립 만세를 부르느냐고 물었습니다.


첫날엔 왜병도 독립을 축하


그러니까 우리 측 대표 한사람이 있다가 우리가 독립되어서 그렇다고 말했더니 그때만 해도 아직 통신 시설이 충분치 못한 관계로 왜놈 헌병들도 사실 독립이 되어서 그러는가 해서인지 차도 내놓으며 말하기를 독립은 축하하나 제발 좀 질서 있게 해 달라고 했는데 3월 2일부터는 아주 태도가 표변하였었지요. (일동 웃음)


사회 : 그러면 다음으로 이우영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선생님 고향이 함경도니까 그 지방 형편도 아울러 말씀해 주시오.

이우영 : 함경도 북청이 고향입니다. 그때 제 나이가 어리지만 제가 북청 천도교구 일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 실황을 눈으로 보고 같이 체험했었지요. 저는 기미년 전해에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하루는 북청 교구장 김태종 씨가 저의 가친을 찾아와서 무엇이라 한참 귓속말로 수군거리더니 저의 가친께서 저에게 내일부터 학교를 그만두고 천도교구 일을 보라고 지시하지 않겠어요.

그때부터 공기가 심상치 않았었지. 한데 기미년에 접어들자 곧 중앙총부 지시로 49일 기도가 전국적으로 시행되고 이 기도회가 끝나면 무언가 큰일이 벌어지리라고 귓속 공론이 분분했었죠. 아니나 다를까 중앙총부에서 교구장 김태종 씨에게 지급 상경하라는 전보가 계속 날라 왔지만, 워낙 교통이 불편한 데다가 왜놈들의 감시가 심하니까 김태종 씨는 결국 상경을 못 했단 말이요.


사회 : 그러면. 그때 북청까지 기차 편이 없었습니까?

이우영 : 그때만 해도 서울서 원산까지는 기찻길이 있었지만, 그 이북에는 없었지. 그러니까 원산까지 기차를 타고 와서 다음은 배편이 아니면 걸어올 수밖에 없는 교통형편이었거든. 그러니까 독립선언도 어쩔 수 없이 다른 지방보다 늦었었답니다.

사회 : 그렇다면 거사에 지장이 많았겠습니다. 미리 일본 헌병들이 조직적인 방해공작을 했을 테니까요. 


밤새워 독립선언서를 프린트해


이우영 : 그렇지 3월 10일경에 가서야 우리 천도교인인 한형 씨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왔었거든요. 그리고 그제야 서울 소식을 전해 들었었단 말이야. 이 소식을 듣자 교구장 김태종 씨의 지휘 아래 밤새워 독립선언서를 이승록 씨가 쓰고 내가 프린트한 다음 정기수 씨 댁에선 태극기를 만들고 ‘조선독립만세’라는 플래카드를 썼었지. 그런데 그만 왜놈 헌병들이 미리 눈치를 채고 우리 천도교의 중견간부들을 예비 검속한 다음 교통을 차단해 버렸습니다.



정말 독립이 된 줄 알고


사회 : 그러면 기독교 측과의 제휴는 없었습니까?

이우영 : 워낙 비밀리에 한 일이니까 기독교 측과는 연락도 할 사이 없었고 기독교 측에서는 그런 독립선언의 동향을 보이지 않았었지. 게다가 교회 중견간부들이 구속되었기 때문에 결국 천도교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남문과 북문 밖에서 조선 독립만세를 외치며 읍내로 몰려들어 왔습니다.

이때 일인 헌병 대장이 나이도 꽤 많은 사람인데 왜놈치곤 좀 도량이 있었던 가봐. 말을 타고 돌아다니며 여러분 독립이 다 되었으니 이 시위하지 말고 집에 돌아가 있으라고 타이르기에 정말 독립이 되는 줄 알고 교회에 다시 모였다가 뿔뿔이 집으로 돌아갔었지. 그런데 그 이튿날부터 주모자들을 하나둘 검속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저희 어머님도 함께 붙들려 들어가서 많은 고생을 했고. 물론 저도 유치장 신세를 졌습니다마는….


사회 : 여러 선생님의 회고 말씀을 들으니 참으로 감개가 무량하군요. 저도 저의 가친과 교역자들에게서 3·1 운동 때 상황을 여러 번 들은 바 있습니다. 제가 태어난 곳이 함경남도 단천에서 백 리나 떨어진 벽촌이었는데 기미년 3·1 운동 때 교회 두목들의 연락을 받고 저희 동리에서도 아버님을 비롯한 천도교인 10여 명이 만세를 부르러 가자고 해서 밤을 새워 단천 읍내까지 갔더니 이미 독립만세가 끝나고 해산된 후였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집에 돌아오니까 어느 사이에 그 정보를 면에 주둔하고 있던 왜놈 헌병들이 알고 모조리 붙들어다 혁대로 태장을 때렸는데 제 발로 걸어서 집에 돌아온 사람은 없고 거의 다 업히거나 아니면 기어서 돌아왔답니다. 그러자 지방 토호들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 천도교인들을 평소에 일진회(一進會) 여당으로 깔보던 태도가 돌변하여 어른들이 얼마나 수고했느냐고 우대하며 심지어 약까지 사다가 시중들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백세명 : 기미년 3·1 운동은 천도교에서 주관한 만큼 이 운동 이후에 천도교에 대한 탄압도컸지만, 인식도 새로워졌다고 하겠지요.


사회 : 다음 김명진 종무원장님께서 한 말씀….

김명진 : 워낙 내 나이가 그때 어렸으니까요. 사실상 그 운동에 가담하지는 못했습니다마는…. 우리 고향 남해 만세 사건을 눈으로 보긴 했었지요. 그때 내 나이가 열세 살 때였습니다. 읍내가 만세 소리로 들끓고 경찰과 충돌해서 붙들려가고 아수라장이었답니다.

이응진 : 종무원장님(김명진)보다는 내가 한 살 아래로군요. 나는 그때 열두 살이었으니까….

김명진 : 그때 우리 남해에서는 시장 주변을 중심으로 하여 만세 소동을 일으켰었지요. 그때 주모자로 우리 동덕들 가운데 하준천, 정재호 씨가 있으며, 지금 남해에 있는 남산에 올라가면 그때 당시를 추모하여 3·1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 3·1 정신은 우리 민족의 등대올시다. 33인의 순국 정신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일이죠. 만약 각자위심했다면 이 역사적 민족 의거가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이 3·1 정신이야말로 우리 조국의 민족정신이어야 합니다.


악대를 앞세우고 만세 행진


사회 : 다음은 이응진 선생님 3·1 운동 때 고향 말씀 좀….

이응진 : 아까도 말했습니다마는 그때 내 나이가 열두 살이었으니까요. 그저 구경했을 따름입니다. 그때 저의 고향 안주(安州)의 3·1 운동은 그야말로 왜놈 헌병들과 육박전을 벌이는 피비린내 나는 처절한 싸움이었답니다.아예 악대를 앞에 세우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는데 도중에 왜놈들의 저지선을 세 군데나 돌파했답니다. 결국, 왜놈들과 충돌이 생기니 마구 총질을 가하여 27명의 사상자를 냈지요. 이때 저의 외사촌도 한 분 순국하셨습니다마는….

그리고 3·1 운동실황은 아니지만, 꼭 명기해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동경에 유학했을 때입니다. 최린 선생이 외국 여행을 위해 동경에 오셨던 기회가 있습니다. 마침 그때 최린 선생님을 만나 뵈올 기회를 가졌었지요. 아까도 여러분이 말씀하셨습니다마는 이미 3·1 운동은 손의암 성사님에 의해 경술국치 직후인 십 년 전부터 계획돼 오던 일이라고 말씀하십디다.


3·1 운동은 십 년 전부터 계획


박응삼 : 나는 들은 말인데 경술국치 직후 뜻있는 인사들이 의암성사님을 뵙고 시국을 통탄할때 의암성사님은 의분을 금치 못하여 주먹으로 방바닥을 두드리며 하는 말씀이 “독립은 내가 한다. 그리고 너희가 해야 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응진 : 그러니까 의암 선생님의 생각은 우리 범인들로서는 미처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요. 보성사 같은 일만 봐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그때 최린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3·1 운동은 성공하였다고 하시면서 이와 같은 성공은 첫째 한울님의 덕, 2천만의 애국심 그리고 총단결된 민족이 3·1 운동의 비밀을 잘 지켰다는 점을 드시더군요.


사회 : 그럼 다음으로 박응삼 선생님 3·1 운동 때 말씀을 좀 해 주실까요. 박 선생님은 독립운동에 직접 참가하셔서 교도소까지 갔다 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박응삼 : 저의 고향은 평북 태천이죠. 기미년 만세 때가 제 나이 열네 살 때였습니다. 저의 집은 바로 태천 읍내에서 불과 오리 안팎에 있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면에 전교사로 계셨는데 하루는 아버지와 할아버지 두 분께서 한참 무슨 공론을 하시더니 하룻밤은 아버지가 외박하고 들어오시는데 종이 뭉치를 들고 오셨어요.


후임 교역자까지 미리 선출해


그게 바로 태극기였습니다. 그 다음 날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 소식이 전해 왔었지요. 그때에는 양력 3월 1일에 만세를 부르지 못한 곳은 음력 3월 1일까지 부르라고들 했으니까. 그래서 우리 천도교에서는 간부들이 주동이 되어 우리가 만세를 부른 다음에는 필시 왜놈들에게 피체될 것이니 후임 교회간부도 아예 뽑아두자고 해서 교회 후임 간부까지도 뽑아 두었답니다.


사회 : 아주 계획이 치밀하였군요.

박응삼 : 치밀했었지요. 그리하여 태천 읍 장날에 사방에 흩어졌다가 일제히 만세를 부르면서 시내로 향해 행진했답니다. 서로 감격하여 얼싸안고 어떤 사람은 만세를 부르면서 울기까지했답니다. 첫날은 이렇게 잘 불렀습니다마는 그 이튿날부터 박천에서 순사와 헌병들이 몰려와 주모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했습니다마는 그 이튿날에도 또 불렀지요. 이때 제지하던 왜놈들과 충돌하여 김상호 씨를 비롯한 많은 부상자를 내었습니다.


사회 : 그럼 박 선생님께서 독립운동에 참가하신 건 언제였습니까? 

박응삼 : 그 이듬해 제 나이 열다섯 살 때였습니다. 이해에 학생 사건으로는 내가 참가한 태천과 경상도 진주, 평북에 철산 차령관 학생들의 만세 사건으로 항일 학생운동으로는 역사적으로 기록될 만한 일입니다.

저는 그때 강습소에 다녔었는데 강습소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24일 장날에 만세를 부르며 경찰서로 향했답니다. 그러니까 길가에서 구경하던 어른들이 덩달아 만세도 부르고 손뼉도 치고 여간 좋아하는 게 아니었어요.

그때 강습생 학생들 나이는 제일 많다는 게 열여섯이고 대개가 열다섯 살에서 그 아래였습니다. (일동 웃음) 그때 만세 부른 학생은 모두가 백 명이 넘는데 잡혀간 학생은 열다섯 살 이상으로 5, 6명이었죠. 그때 수갑은 오동 수갑이라고 했는데 하도 손이 작으니까 채우면 손이 빠져나오고 해서 할 수 없이 포승으로 묶었습니다.



사회 : 그럼 어느 교도소로 가셨습니까?

박응삼 : 신의주 교도소로 압송되었지요. 검사 구형은 5개월이었는데 판사가 1년 집행유예 판결을 하지 않겠어요. 나는 왜 검사 구형보다 판사선고가 더 형량이 많은가 이상하게 생각했었는데…. 그다음 곧 집으로 가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한동안 어리벙벙했습니다. (일동 웃음)


사회 : 집행유예가 무엇인지 모르셨군요.

박응삼 : 그렇습니다. 그런데 고향에 돌아왔더니 일약 영웅이 되어버렸지요. 글쎄 집까지의 십 리 길을 군에 유지가 나오는가 하면 동리에서 엿과 떡을 사 들고 길에서 줄지어 기다리고 있더군요. (일동 웃음)


사회 : 그런 어린 나이에도 그렇게 독립을 갈구했으니 그때 당시 우리 민족이 얼마나 독립을 염원했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습니다. 그러면 다음으로 이 자리에서 제일 연세가 높으신 이동락 선생님께서 한 말씀 해 주십시오.

이동락 : 나는 그때 황해도 금천교구의 권선인으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미년 3월 1일 며칠 전에 대교구장님이 한밤중에 오셔서 문을 두드리는 거예요. 그리고 곧 서울로 올라가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서울에 와서 의암 성사님을 뵈었습니다.


사회 : 그때 의암성사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셨던가요?

이동락 : 의암성사님 말씀이 우리가 독립선언을 한다고 해서 독립이 곧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독립을 향한 문을 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독립만세는 누구든지 만세만 잘 부르면 되니까 그리 알고, 좀 일할 사람들은 뒤에 남아서 만세 뒤에 있을 여러 가지 일에 대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탑동공원에서 만세 부를 때 그 경과를 보고 있던 헌병에게 붙들려 심문을 받은 다음에 거주제한을 받았지요. 그렇지만 그때만 해도 우린 어떤 비밀 교인을 두었답니다.


사회 : 말하자면 정당의 비밀당원과 같군요.

이동락 : 그렇습니다. 마침 강창선이라고 하는 비밀 교인이 신심도 두텁고 해서 그 부인을 시켜 황해도 일대에 연락했습니다.


독립운동 자금의 조달


사회 : 그럼 다음으로 이 민족적인 운동에서 그 자금이란 막대한 액수일 것은 여러 가지 기록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인데 이 자금은 거의 다 우리 천도교에서 제공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막대한 자금을 어떻게 조달하였을까요?

주옥경 : 정말 그 자금 조달이 기가 막히게 어려웠어요. 3·1 운동 거사 자금뿐만 아니라 해외의 독립운동 자금도 주로 우리 천도교에서 나왔으니까요. 부인들 아랫배에 차고 오기도 하고, 허리띠에다 눕혀 오기도 하고 여하튼 부인들의 활약이 이만저만 아니었으니까요.

김명진 : 그때 내 나이가 어렸기에 잘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마는 얼마짜리 지폐가 있었습니까?

주옥경 : 아마 십 원짜리, 오 원짜리 지폐가 있었지요. 그렇게 많은 돈은 걷어서 독립자금으로는 물 쓰듯 했습니다마는 우린 한국 좁쌀도 먹지 못하고 호좁쌀을 먹었습니다. 감옥에 들어간 사람들의 차입 비용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지요. 여하튼 전부 천도교 돈에서 나왔으니까요.


중국, 만주에도 독립자금 조달


사회 : 하긴 해외밀사 파견 비용 같은 것을 비롯하여 중국, 만주 일대 독립투사들의 자금도 많이 우리 천도교에서 제공했다고 들었습니다마는 그 많은 돈을 어떻게 보관하셨습니까?

주옥경 : 그땐 안방 깊숙이 평양 반다지가 있었습니다. 그 반다지 안에다 간수하였습니다마는 왜놈들의 감시를 두려워해서 다른 곳에다 많이들 여러 곳으로 나누어서 보관했습니다.


사회 : 그럼 그 돈은 어떤 방법으로 거둬진 것인가요?

주옥경 : 그 방법은 정성이지요. 정말 나라를 찾기 위한 피눈물 나는 돈이었지요. 남자들은 집세기를 삼고 여자들은 삯바느질 품삯을 모으고 모은 돈이죠. 사실 말이지 기미년 독립운동은 천도교 돈이 아니었으면 되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3·1 운동이 터지자 왜놈들이 서랍 속에 돈까지 들추어 압수해 갔으니까요. 심지어는 장판 바닥까지 뜯어서는 혹시 돈을 감춘 곳이 없는가 조사했습니다.

이응진 : 고(故) 김의동 선생은 그때 해의 독립운동자금으로 평북 선천 의주 일대에서만도 그때 돈 150만 원을 걷었다고 들었습니다.


사회 : 그때 추산한 천도교에서 갹출한 독립자금은 5백만 원이 넘는다고 보는데요. 어떻습니까?

이병헌 : 물론이죠. 5백만 원이 넘다 뿐이겠습니까?

주옥경 : 그때 임시정부 요인들 일부도 다 우리 천도교에서 제공한 자금으로 해외 망명을 했었지요. 한데 해방이 되자 다시 고국에 돌아와서 교회에 인사 온 분은 몇 분 안 되었어요.

김명진 : 그때 우리 천도교는 독립운동의 총본부라고 할 수 있지요. 국내 독립운동은 물론 우리 천도교에서 주동이었지만 해외 독립운동에까지 우리 천도교에서 많은 돈을 갹출했었으니까요. 의암성사님은 무조건 해외나 국내를 막론하고 독립운동하는 사람이라면 돈을 내주었다고 하더군요. 그분의 애국심과 큰 포부는 능히 후세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주옥경 : 그 어른은 워낙 기승한 분이었답니다.


박래원 : 그 돈이란 전부 교인들의 성금인데 지방 두목들 두 사람이 돈을 가져와서는 사태가 험악하고 총부는 왜놈 군대에 강점되었을 뿐 아니라 감시가 심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그때 우리 천도교인들의 단골 주막인 황찬운 씨 집에 맡기고 간 사실이 있는데, 이때 두목 두 사람이 맡긴 돈만도 2, 3만 원이니 수많은 두목이 가져온 돈이야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때 월급이 10, 20원이었으니 그때 돈 만 원이면 거액(巨額)이지요.

김명진 : 그 많은 돈이 전부 독립운동에 들어간 셈이로군요.

주옥경 : 심지어는 기독교 측의 형무소 차입비용까지 우리가 부담했으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3·1 운동을 앞두고 49일 기도회가 있었는데 그때 집세기를 하루 한 켤레씩 삼아서는 성금으로 바쳤습니다.

이병헌 : 49일이지만 결국 동덕 한 사람이 하루에 집세기 한 켤레씩을 삼아서 모아 팔았는데 집세기 50켤레씩을 삼아서 성금한 폭이죠.

이동락 : 그때 집세기 한 켤레가 이 전씩이니까 50켤레면 한사람이 일 원씩 성금한 폭입니다. 


맡긴 돈 말에 “독립운동 또 하려고?” 위협


이병헌 : 이외에도 특별 성금이 많았답니다. 아까도 객줏집 말이 나왔었지만 글쎄 평안도 지방 두목들은 주로 ‘한개찬’이라는 사람이 하는 객줏집에 주인을 정하고 돈도 맡겼는데 기미년 만세운동으로 미처 돈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가 만세가 끝난 후 돈을 달라고 했더니 “그래, 독립운동 또 하려고 돈을 달라 하느냐”라고 위협하는 통에 그 많은 돈을 다 잘라 먹혔지요.

그런데 안국동 모서리에 있던 함곰탕집이라는 객줏집이 있었는데 주로 강원도와 삼남 두목들이 많이 들었는데 기미년 만세 후에도 맡긴 돈을 그대로 내놓아서 우리 천도교 총부에서는 하도 고마워서 막대한 사례를 했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우리 천도교 돈을 떼어먹은 한개찬은 한때 자가용도 사고 거들먹거리다가 그만 폭삭 망해버렸지요. 한데 함곰탕집은 뒤에 객주업을 그만두고 시골 내려가 사는데 그렇게 돈 많이 벌고 잘산다는군요.


독립운동 자금은 오백만 원?


사회 : 그럼 대체로 3·1 운동 전후해서 우리 천도교에 거출된 독립운동자금은 오백만 원으로 추산하면 되겠군요.

이병헌 : 암 그렇다뿐이겠어요. 내가 알기에도 중국 상해방면으로 흘러간 독립자금도 수십만 원이었으니까요. 만주와 국내에 뿌려진 돈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김명진 : 그렇습니다. 더구나 독립운동 자금은 극비에 수교된 것이니만큼 여러 사람이 모르는 돈은 또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이병헌 선생 편찬으로 된 <독립운동비사>에도 5백만 원으로 나왔습니다마는 그 금액은 대개 숫자의 근거를 표시할 수 있습니다. 백만 교도가 집세기 50켤레 값을 각각 성금 했다고 치더라도 거기 따른 가족 수에 의한 숫자가 나올 것인데 그 밖에도 특별 성금으로 부녀자들의 패물을 바쳤고 가축을 팔고 논밭을 팔아 바친 금액은 또 얼마겠습니까. 그러기에 동학을 하면 집안이 망한다고 한 것입니다.


사회 : 우이동 봉황각에서 특별수련으로 지방의 각 지도자를 양성한 것도 독립운동의 준비기로 여러 기록에 나와 있는데 여기 대해서 말씀해주실까요?

박응삼 : 그때 봉황각 낙성을 전후해서 지방 대두목 5백여 명을 수련시키는데 수련 제목으로 의암성사님께서 “조선정신을 가져봐라”라고 걸어내라고 넣으셨던가요?

주옥경 :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경술국치 직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박응삼 : 제가 들은 말인데 3·1 운동 전날 밤에 매국노 이완용의 조카 이회구라는 자가 있었는데 성사님께서 이 자(者)와 장기를 뛰시다가 하신 말씀인데 “내일은 독립만세를 부를 테니 너의 삼촌보고 말해라.”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병헌 : 나도 그런 말은 들었습니다마는….

이응진 : 워낙 대담하신 성품이시지만 역적들에 대한 하나의 교훈적인 도전이라고 할 수 있었지요.


수도 잘하라 최후 부탁


사회 : 그럼 다음으로 사모님! 3·1 운동 전야에 의암성사님의 동태는 어떠했습니까? 말하자며 단두대에 오르는 최후의 비장한 각오 같은 모습을….

주옥경 : 평소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날 아침에도 청수를 모시고 나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어디로 가는데 너희는 남아서 수도만 잘하거라.”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사회 : 그럼 이상으로 3·1 운동 회고 좌담회를 끝마치겠습니다. 오늘 사모님을 모시고 여러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3·1 운동은 벌써 경술국치 직후인 십 년 전부터 계획되어 오던 것이고, 이 3·1 운동을 위해 우이동 봉황각에 각 지방 두목들을 교대로 소집해 민족정신을 함양시켜 다시 단결시키었고 전국에 30여 개소의 대교구제를 만들어 등사기 등을 비치케 하여 유사시를 대비했으며 보성사를 십 년 결손을 보면서도 한 번 쓰기 위해 그대로 경영하는 한편 독립운동자금은 전국 교인들의 특별성금으로 모아서 대사(大事)를 치렀다고 보겠습니다.


<평남 영원군>


장병학 서대문 교구장 일시 : 2월 16일, 장소 : 신인간사


이광순 : 장병학 선생님께서 평남 영원(寧遠)이 고향이시죠? 그곳 3·1 운동 상황을 말씀해 주십시오.

장병학 : 네, 영원군이 고향입니다.


이광순 : 영원의 3·1 운동 때는 수많은 우리 천도교인이 학살당했다고 들었습니다마는….

장병학 : 지금 생각해도 정말 처절한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었어요. 그때 우리 천도교구장 서달제 씨 중심으로 먼저 3월 8일 독립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에는 우리 천도교인  105명이 남강령 밑에서 밤을 새우며 의논하기를 결사적으로 우리가 앞장서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결심하고 105인 대표로 저의 가친인 장주성(張周星) 씨가 선출되어 그 남강령 밑에서 밤을 새운 그 이튿날 아침 만세를 부르며 읍내로 향해 행진했지요. 그런데 읍내 15리 앞에서 왜놈 헌병대장이 가로막지 않겠어요. 그 헌병대장 뒤에는 왜놈 헌병 27명이 우리를 향해 총을 겨냥하고 있더군요. 하지만 누구도 총칼 앞에서 물러설 졸장부는 없었지요. 다들 애국심에 불탔으니까요. 우리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그대로 앞으로 나가니까 왜놈들이 공포를 쏘더군요. 그래도 막무가내였지요. 그러자 일제 사격을 퍼붓고 마구 칼질을 했지요. 그때 우리 동포 27명이 현장에서 살해당했습니다.


이광순 : 너무도 처절한 운동이었군요. 그때 우리는 반항하지 않았습니까?

장병학 : 왜요? 우리는 총에 맞아 쓰러지면서도 왜놈들과 난투를 벌여 왜놈 헌병 대장이 맞아 죽었지요.

이광순 : 통쾌한 일입니다. 다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장병학 : 우리는 동지들의 시체를 뒤에 두고 살아남은 동지들만 읍내 경찰서로 달려갔단 말입니다.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지요. 거기서 최태선이라는 분이 우리 동지들의 죽음에 울분을 금치 못하여 가슴을 헤치며 너희가 그렇게 피에 굶주렸으면 어서 내 가슴에 총을 쏘라고 앞으로 나섰지요.

그랬더니 또 일제 사격을 가하지 않겠어요? 그 자리에서 또 우리 동지들 10여 명이 살해당했습니다. 105인 대표로 앞장섰던 저의 가친은 첫 번째 충돌 때 머리에 총상을 입었습니다마는 그 총상이 아물지 않아 2, 3년 뒤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동지들은 모두 평양 교도소에서 2, 3년씩 형을 받았습니다.

이광순 : 정말 천인공노할 일제의 탄압이었군요.

장병학 : 그래도 105인 선열들의 투지는 기가 막혔습니다. 총에 맞아 쓰러지면서도 조선 독립만세를 불렀고 숨이 거의 다 끊어지면서도 조선 독립만세를 불렀었습니다.

이광순 : 민족과 국가 앞에 죽음을 초월한 선열들에게 정말 머리가 수그러집니다.


<장백현〉


주동림 서울교구장 일시 : 2월 16일, 장소 : 신인간사


이광순 : 주동림 선생님께서는 소문 듣기에 한때 만주 일대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했다고 들었습니다마는….

주동림 : 3·1 운동 때 제 나이 열여섯이었으니까요, 별로 큰일은 못했습니다마는 제가 살던 곳이 바로 혜산진 대안에 있는 장백현입니다. 저는 장명(長明)학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는데 3월 28일 거기 천도교구장 박기운 씨 지휘 아래 천도교인과 우리 한국인들 수백 명이 극비리에 집결하여 압록강을 건너 혜산진으로 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했습니다.

그런데 압록강을 바로 앞에 두고 복병하고 있던 왜놈 헌병과 충돌하게 됐지요. 거기서 수십 명이 부상당하고 박기운 씨를 비롯한 장명학원 학생 십여 명이 왜놈들에게 붙들려 많은 고초를 당했습니다. 박기운 씨는 서대문 형무소까지 가서 3년 동안 복역했습니다.


이광순 : 장백현이라면 만주 땅이면서 백두산 부근이 아닙니까?

주동림 : 그렇지요. 더구나 내가 살던 곳은 바로 백두산 아래랍니다. 압록강 상류죠. 이 지대가 말하자면 독립군의 집결지고 만주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는 독립군의 통로였지요.


이광순 : 그러면 여담 같습니다마는 독립군에 대해 좀 말씀해 주실까요?

주동림 : 그 3·1 운동 이후 애국열은 아주 대단해졌습니다. 저희 학생들도 비밀리에 소년단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벌였으니까요. 그때 왜놈들의 보복행위는 천인공노할 만행이었지요. 한 사람의 독립군을 잡으면 그 가족까지 묶어 압록강 물속에 집어넣고 총으로 쏘아 죽였습니다.

더구나 억울한 일로는 독립군을 마적으로 누명 씌워 그 목을 잘라 전선주에다 매달아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독립군 목이 전선주에 매달리기 무섭게 밤중에 가서 그 목을 떼어다가 부인들의 광주리에 담아서는 이 동리에서 저 동리로 가까운 동리에 연줄로 운반해 그 시체가 있는 데까지 가져다 놓고 같이 묻었습니다.

정말 이름 없이 원통하게 죽은 우리 독립군이나 동포가 얼마나 많은지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죠. 저도 한때 울분에 못 이겨 독립군 군비단에 가입하여 장백산과 무송 일대를 활동 무대로 삼았습니다마는 나이가 어리니까 별로 큰일은 못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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