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달성, <오호! 지방 농촌의 쇠퇴!> 1921년 4월호에서
1.
오늘, 제30회차 개벽강독회로 개벽 제22호(1921년 4월호)를 진행하였습니다. 제가 박달성의 <오호! 지방 농촌의 쇠퇴!>를 강독하고, 그 밖에 <봄날의 雨露를 밟으면서>(김기전)과 <조선인의 생활문제 연구>(선우전)의 글을 함께 읽었습니다.
2.
박달성은 1895년생으로, 개벽사의 핵심 멤버중 한 사람이었고, 그도 역시 다른 개벽사의 기자들처럼 과로로 말미암아 얻은 병으로 1934년에 40세를 일기로 환원하였습니다. 방정환의 동경유학시절 '동지'이자 멘토 역할을 하기도 하였고, 특히 개벽사 내에서는 '에너자이저'로서 열정적인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3.
박달성은 개벽사의 회심의 역작인 '조선문화기본조사'에 '차상찬'과 함께 핵심 취재기자로 한번 취재를 나가면 한달에서 두 달 가까이까지 현지에 머물며 취재를 하였습니다. 그 전부터도 박달성의 글에는 '농촌취재기'가 많습니다. 더 넓게 보면 '기행문'류의 글이 많았고, 취재기와 소설 사이를 오가는 글쓰기 방식으로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하였습니다. 오늘 읽은 글도 그중 하나로서, 서울에서 불철주야 개벽사 업무와 천도교청년당 업무에 매진하느라, 고향땅을 좀처럼 밟지 못하던 그가 '부친의 부고'를 받고서야 고향땅을 밟게 된 소회를 밝히고, 아버님의 장례도 장례려니와 그 기회에 다시 한번 생생하게 목도하게 된 조선 농촌의 현실을, 바로 자기 자신의 고향의 형편을 통해 낱낱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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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인용하는 대목은, 보름여에 걸쳐 장례를 마치고, 5일여간에 걸쳐 이웃집 어른, 연전에 환원한 친구의 모친, 그리고 또다른 고향친구 등을 두루 방문하며 그 집안의 형편, 그 사람들의 사정을 목격한 그대로를 쓴 글 가운데 일부입니다. 그을은 한결같이[如出一口] 열악함에 열악함을 더한 현재의 형편이 '지방 탓'이라고 되뇌입니다. 박달성은 거듭하여 이를 '변명'하고 사람이 주체가 되어 이 현실을 타개해 나가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고향을 떠나오기 마지막 날에는 각 집에 1인씩을 자기 집으로 초빙하여 강연회를 펼치고, 장면을 바꾸어 개벽 독자들[주로 지식인 계층]에게 조선의 농촌 현실을 살피고 그들을 위하여 정성을 다하여 줄 것을 당부합니다.
5.
오늘로부터 101년 전 박달성이 목격한 조선 농촌의 현실을 누더기를 걸친 채 흙먼지가 폴폴 날리는 토담집 방안에서 새끼를 꼬는 호주와 버선을 깁는 아내, 강냉이떡을 먹는 코흘리개 아이, 12살에 20세 청년에게 팔려서 시집가는 새악시 등등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동안 <개벽>을 읽으며, 지식인의 눈으로 "개조"를 운운하던 그간의 기사 분위기에 젖어서, 당대의 농촌 현실 - 아마도 우리네 민중의 8, 90%를 점하고 있었을 사람들의 삶의 형편을 망각하고 있지 않았는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 다음에 기사 일부를 소개합니다.
6.
(전략)
그럭저럭 지내는 것이 10일이요, 또 5일이었고 이제 이향(離鄕) 전 5일을 기약[期]하고 향리의 실정을 살피게 되었습니다. 여러 사람[人人]을 두루 방문[歷訪]하며, 여러 집[家家]을 두루 방문[歷訪]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첫째로 나의 이웃집을 찾았습니다.
찌그러진 마굿간[馬廊], 넘어져 가는 싸리문을 들어서 흙계단[土階]을 넘어 안방을(사랑은 물론 없음) 들어섰습니다. 호주되는 이는 새끼 꼬고 아내는 버선 깁고 더벅머리 두 아이는 강낭(玉薥)떡을 들고 코를 훌쩍훌쩍 합니다. ‘북초’는 방 안에 넙너부러- 하고 똥 묻은 걸레는 이 구석 저 구석에 그득한데 무슨 흐리터분하고 시시부러한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연목(椽木: 서까래) 가래가 비죽비죽 보이는 천정에는 거미줄(網)을 죽 늘였고 우툴두툴한 흙벽[土壁]에는 빈대 피로 매질을 한 듯합니다. 자리는 다 떨어져 먼지가 뭉클뭉클 이러나며 석유상자(石油箱子)만 한 의상(衣床) 위에는 누더기 야구(夜具)가 두어 개 놓였습니다.
생활은 여하튼지 인정이야 다르겠습니까. 서울 갔던 양반이 돌아온다고 일변 반갑고 일변 영광스럽고 일변 미안스럽고 일변 황공한 듯이 웃으며 반가워하면서도, 한숨을 겸한 어조로써 호주는 새끼 꼬던 것을 중지하고 비(箒)로 방 안을 휙휙 쓸면서 “사는 꼴이 이렇습네” 하고 앉으라고 권합니다. 아내 되는 이도 역시 “적은 샌님은 이런 자리에 처음 앉아 보겠소” 하며 바느질하던 것을 멈추며 치마고름을 다시 맵니다. 아이들은 눈이 멀뚱멀뚱 하여 나만 쳐다봅니다. 나는 앉기에 앞서 “어르신네는 어디 계시냐”고 묻고, 그의 대답에 의하여 곧 윗방으로 올라 앉아 주인 노인의 병을 위문합니다.
주인 영감은 나이 70의 노인이신데 지금 노환 중에 있습니다. 떨어지고 더럽고 산뜻한 찬 자리에 때가 덕지덕지 묻고 살이 비죽비죽 나오는 무명바지 저고리를 걸치고 병석에 누워서 목이 턱턱 메고 잇(齒)몸이 벗어질 만한 거친 강낭떡을 들근들근 씹고 누었습니다. 과연 불상한 늙은입니다. 약 한 첩, 의사 한 번 못 써 보며, 단 음식, 따뜻한 옷 한 벌을 못 입어 봅니다. 이러한 중에 신음합니다. 나는 억제할 수 없이 눈물이 좍 흐르더이다.
“제가 누구인지 아시겠습니까?” 하고 딱 바투 들어 앉아 물으니까 그는 몽롱한 중에도 얼풋이 알아보고 반가운 듯이 손을 허위며 “아- 서울 갔던 조카(姪)로구만…. 나는 이제는 죽겠네” 하며 그- 마르고 마르고 기맥(氣脈)이 없어 보이는 눈에 눈물이 엉킵니다. 나는 그 정경이 하도 딱하여 몇 마디로써 위안을 드리고 롣 아랫방으로 내려 앉아 젊은 주인과 담화를 열어 놓았습니다.
그의 말을 들을수록 가슴이 답답하여 무슨 위안의 방책[方]은 아니 생기고 그저 입맛만 쩝쩝 다실 뿐이었습니다.
“여보게 이 모양하고 살면 무엇하겠나.”
“왜, 어떻습니까?”
“어떻다니? 이 꼴악신이(꼬락서니)를 좀 보게. 사람 사는 것 같은가. 이 모양으로 살 바에야….”
“촌살림이 대개- 다 그렇지요. 무엇이 어떻습니까?”
“어떻타니? 속이 상해 못 살겠네. 명(命)이 붙어 있으니 사람이라고 하지….”
“그저 딴(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촌살림이 다-그렇지요.”
“다- 그렇다니? 이렇게 사는 사람이 어디 또 있겠나. 보는 바와 같이 아버님께서 병으로 계셔도 약 한 첩, 쌀밥 한 그릇을 못해 드렸네. 이러고야 살아 무엇 하겠나?”
그의 말은 떨리기 시작하며 눈물이 핑그레- 돕니다. 나도 먹먹하여 그저 한숨만 지을 뿐입니다. 나는 그 말의 계속인 듯 하면서도 조금 다를까 하여 이렇게 묻습니다.
“그래 농량(農糧)은 어떻습니까? 과히 부족치는 않겠지요. 서속(黍粟) 간에….”
“이 사람이 말을 들으면서도 그러는구만. 농량이 부족치 않으면 왜 병 나신 아버님께 약 한 첩을 못 지어들이겠나. 량식 떨어진 지가 벌서 두 달 째일세. 짚신짝이나 삼아서 근행근행(艱幸艱幸)히 연명은 해 가나, 앞으로 어떻게 살지 망연하여, 누가 빚을 주나, 누가 쌀을 통용(通用)해 주나…. 아- 참!”
“농사 하신 것은 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무리 흉년이기로 반절양식(半節糧食)도 아니 되어요?”
“가난한 놈에게는 흉풍(凶豊)도 없다네. 그까짓 산경(山耕=火田) 날가리나 며칠 갈아 부치면 무슨 수가 있겠나. 그나마 남의 것…. 아- 말 말게. 어쨌든 이놈의 곳은 땅이 바르고 인심이 끝에 올라서 가난한 사람은 못 살 곳일세. 부득이 다른 곳으로 이사할 밖에 없네….”
“다른 곳은 나을 줄 아오. 그곳도 이곳이지요. 별 다른 곳 있답디까?”
“그래도 북간도, 서간도는 좀 낫다는데…. 여하간 이만 못한 곳이야 어대 있겠나.”
“그저 사람 사는 곳은 다- 그렇답니다. 이곳이 나을까 저곳이 나을까 해도 당하고 보면 다- 마찬가지지요.”
“어쨌든 이곳은 지방이 나빠 떠나야 되어….”
나는 이 말에 다시 무어라고 대답이 아니 나오고 다만 가슴만 쓰렸습니다. 모든 허물이 단단연(斷斷然) 지방 탓이라 합니다. 가난해도 지방 탓, 못살아도 지방 탓. 그 밖에 무엇 무엇이 다- 지방 탓이라 합니다. 나는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뚝 막히어 무어라고 다시 말하지 않고 무슨 볼 일이 있다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하략)
7.
이 글을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터입니다. 참고로 이 글이 실린 22호 다음 호인 개벽 제23호부터 춘원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소개됩니다. 또 같은 22호의 소춘 김기전의 글도 우리 나라의 '학생계'의 퇴폐를 고발하고, 분발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게 인상적인 독후감은 "자기가 발붙이고 있는 지금-여기의 현실"을 극복해 내지 못하고서는 어떠한 이상향도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박달성은 당시의 고향 사람이나 친구들이 "지방 탓"을 하며, 하루 빨리 여기를 떠나야겠다고만 말하는 현실에 절망감을 토로합니다. 그리고 지식인들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가 귀기울여야 할 대목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됩니다. 다른 한편, 이 시기는 3.1운동 직후의 신문화운동이 폭발적으로 전개되던 국면으로서, 한편으로 사회 전체적으로 활기가 넘친다는 기사가 바로 몇 호 전의 <개벽>지에 게재되기도 하였습니다. 그와 비교해 보면, 지금 박달성이 목격하는 농촌의 현실은 - 이곳이 궁벽한 산촌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 참으로 목불인견입니다.
지금으로서는, 섭부를 결론보다는 박달성의 글, 그리고 당대의 다른 기자들의 글들을 좀 더 따라가며 읽어 보아야 할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