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독서-064] 이은선, "사유하는 집사람의 논어 읽기"
1.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 그 스스로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시절입니다. 필자(편집자)가 나이를 먹어서 그럴 수도 있고, 이 세상이 이미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 이상 다시 또 더 '무엇을 위한다'는 것의 괴로움, 어려움, 실없음 때문일 수도 있고, 좀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으로서 가장 원초적인 물음이라고 할, '나는 누구인가'를 새삼스럽게 다시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2.
그런가 하면, 참 말 많은 세상입니다. 비대면 시대라고 하지만, 말은 대면 시대에 비하여 결코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옛날부터 말은 많았지만, 절대다수의 말들은 발화되지조차 않았고, 발화된 많은 말들 가운데 대부분은 메아리를 얻지 못하여 발화되자마자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은 그 말들이 제각기 '나도 있소!' 하며 손을 들고 자기 존재를 주장하고 나서는 시대이고, 메아리가 없어도 스스로 자기 자리를 만들어 살아남을 수 있는 시절입니다.[SNS] 그런 저런 이유로 참 말이 많아진 시절입니다.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는 그야말로 옛말이고, 오늘날은 기어코 내 말로써, 상대방의 말을 짓누르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느끼는 시절입니다. 공황장애처럼, '발화억제장애' - 말을 하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은 공포에 휩싸이는 전염병이 떠도는 시절입니다.
3.
생각해보면, 서양의 철학의 원조격으로 일컬어지는 플라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들은 모두가 그들의 대화 속에서 형성되거나, 그것을 기반으로 저술되거나 전승되었습니다. 동아시아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동아시아 문화의 출발선상에, 다른 것들도 있겠으나, <논어>가 빠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논(論)이라는 글자 자체가 '말[言]'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말'은 인간을 떠날 수 없고, 인간 또한 '말'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의 '말 많음'은 유별난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저, 들려오는 말이 많아 '피로감이 더해졌을 뿐'일 테지요.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끄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4.
"사유하는 집사람의 논어 읽기"는 그 많은 말을 안에서 다시 삭여 내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독서'란 밖으로부터 들려오는 '말'들을 '안으로부터의 울림'으로 상쇄시켜서, 고요한 평정을 이루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태양"조차도 자기 존재를 소리높여 외치는 이 시절, 이 책의 리듬으로, 번잡한 세상의 소리들을 다스려보는 것은 어떨지요.
유교 가르침의 핵심은 인간과 여기 이 세상에 집중하면서도 그 안에 깊은 영적 가능성을 계속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 사이의 진실한 관계와 신뢰를 세상 만물의 출발점으로 삼고서 그 출발점을 잘 기르고 다듬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하면서도, 항상 다시 그 너머의 점을 지시하는 것이다. 즉 예를 들어 인간 자체를 존재와 창조의 근본 힘(仁者人也/仁也者人也)으로 보고, 좀 더 서구식으로 말해 보면, 인간(人) 안에 신적 씨앗(仁)이 들어 있다는 것이고, 아니 더 직선적으로 표현해서 인간(人)이 신적 씨앗(仁)이라는 것이다. 그 신적 씨앗은 관계(relatedness)이고, 동적 힘(易)이고, ‘온 천지의 만물을 낳고 기르는 우주적 마음(天地生物之心)’이기 때문에, 그 관계와 힘에 대한 믿음을 끊임없이 강조하기 때문이다.
유교 세계관에서 쓰는 ‘믿음(信)’이라는 단어만 살펴보더라도 믿음이란 ‘인간(人)’과 ‘말(言)’이라는 단어가 합해져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겠는데, 즉 믿음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밝혀지고 체득되는 것은 인간 간의 ‘관계(말)’를 통해서이고, 특히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통해서 지금 여기서 눈(감각)에 드러나지 않는 것을 보고 받아들이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언어라는 것은 바로 그 믿음의 행위가 쌓여서 이루어진 것이고, 아니 더 근본적으로는 존재는 ‘관계(언어/말)’이고, 그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존재의 창조자는 말이고, 사고와 생각, 상상과 믿음이라는 것이지만, 그러나 다시 그 언어와 말이 우리의 몸과 행위로, 사물과 사건의 창조로 현현되지 않고서는 ‘실재(reality)’가 되지 못한다는 의미 등이겠다.
그래서 유교 가르침은 자신의 또 다른 핵심 가르침을 ‘성(誠)’으로 들었고, 이 단어에도 (인간의) 언어(言)가 들어가면서 ‘말을 이루어내는 일(成)’이야말로 ‘하늘의 일(天之道)’과 ‘인간의 일(人之道)’이라고 본 것이다. 이렇게 유교 전통이 인간의 일과, 특히 그 언어와 말의 일을 바로 하늘의 일로 보았다는 점에서 신학(信學)과 신(信) 연구소가 유교와 대화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겠다. (본문-책을 내며, 10~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