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몇 개월 째 손에 잡히는 곳에 두고 닥치는 대로 조금씩 읽는 하루키 잡문집을 펼쳤는데 펼쳐진 첫 번째 페이지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점은 소설의 시점이 절대 ‘땅바닥’ 높이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없다. 무엇을 보든 무엇을 생각하든 일단은 맨 밑바닥까지 가서 지면의 확고함을 두 손으로 직접 확인하고, 그로부터 조금씩 시선을 위로 올린다....”(p.322)
잠이 덜 깨서인지 순간 '하루키가 우리 대화를 엿들었나?'라는 생각을 했다. 어제 친구와 대화 도중 나도 ‘바닥을 경유하지 않은 목소리’에 관한 말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두 발이 지면에 닿아있지 않은 사람들, 바닥을 치고 중력을 거슬러 올라오지 않았기에 무게가 실리지 않는 어떤 생각들을 마주친다. 자신과 세상의 바닥은 보지 않고 교육이 어떻고, 운동이 어떻고, 글쓰기가 어떻고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허공에 들려있다. 나는 그렇게 어딘가 허황되고 들뜬 목소리를 위한 처방을 사랑과 뜨거운 연애라고 말하는 편이다. 사랑만큼 처절하게 자신의 바닥을 바라보게 하고, 자의식을 깨고 더 나은 자아를 갖고자 하는 의지를 생성하는 활동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편, 타인의 바닥을 보는 쉬운 도구 중 하나는 SNS다. 예전에 나는 어떤 칼럼니스트의 글을 읽고 굉장히 좋은 느낌을 받아 페북에서 이름을 검색해 찾아 들어갔다. 정갈한 느낌의 칼럼과는 달리 SNS에서 보는 그분은 상스러운 표현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쓰고, 남의 글의 일부만을 이용해 모함에 가까운 비판을 하는 등 질투가 많은 분이었다. 그분의 칼럼은 여전히 정갈하다. 하지만 그가 쓰는 글의 권위와 호감은 (내게) 속수무책으로 낮아지고 말았다.
사실 누구나 조금의 관심과 노력, 그리고 전시된 삶의 뒤에서 작동하는 심리기제를 이해하는 통찰만 있으면 타인의 바닥을 직시하기에 이만큼 좋은 장소도 없다. 다만 타인의 바닥을 응시하는 행위가 자신의 바닥을 더듬어 보는 것만큼 귀중한 경험인지에 대한 확신은 없다. 얄팍하게나마 타산지석의 계기는 될 수 있을 테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