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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Aug 07. 2020

직업병

상상, 오로지 상상

지난 1년간 일주일에 두어 번씩 필라테스를 했다. 그리고 내게 고질적인 직업병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학교 밖에서는 내 직업을 드러내거나 생각하려 하지 않는 편인데도 나도 모르게 여러 필라테스 선생님들의 수업 방법의 차이를 생각하고, 수업의 질을 가르는 결정적 요소에 대해 되짚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A 선생님과 함께하는 수업이 좋았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몸은 적당히 피로하면서도 개운했다. 흔히들 말하는 '운동하는 맛' 같은 게 났다. A 선생님은 수업 시작 전에 세세한 안내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준비 스트레칭을 할 때 나는 그날 내가 어떤 부분을 집중적으로 운동할지 알 수 있었다. 다리 스트레칭을 하면 '아 오늘은 다리 근력운동을 하는구나', 복부나 허리를 풀면 '오늘은 배가 좀 당기겠군'이라고 예상하는 식이다. A 선생님의 수업은 다양한 난이도의 동작이 적당한 강도로 이어진다. 선생님 고유의 수업 흐름이 적절한 변주 속에 일관성 있게 흐른다. 수강생들이 운동을 하다가 힘들어 동작을 멈추거나, 한숨과 신음소리를 내면 선생님은 차분하게 말했다. “힘내요, 거의 다 왔어요”, “이 동작이 끝나면 스트레칭에 들어갑니다." 힘들어하는 학생을 격려하되 계획한 큰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선생님의 안내, 동작을 유지할 때 들리는 숫자 세는 목소리에 쉽게 내 신체를 동기화할 수 있었다.


B 선생님의 수업은 개인적으로 나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고 몇 번 수업을 해 본 후 다시 예약하지 않았다. B선생님과 운동을 마치면 몸이 피곤했는데 왠지 산만하고 초점이 없는 피곤함이었다. 준비 스트레칭 과정에서 내가 그날 어떤 운동을 집중적으로 하게 될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날의 본 운동과 상관없이 늘 고개 돌리기 10번, 팔 돌리기 5번이란 식으로 동작이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B선생님이 동작을 설명하거나, 유지하며 수를 세는 소리는 어쩐지 내 몸에 스며들지 않았다. 늘 너무 길거나 짧았다. B선생님은 수강생들과 호흡을 맞추기보다, 머릿속 매뉴얼대로 숫자를 세는 것 같았다. 누군가 힘들어서 끙끙대거나 동작을 따라 하지 못하면 선생님은 겸연쩍게 말했다. “너무 힘들게 시켰다고 민원 들어오려나요..” 그리고 갑자기 터무니없이 쉬운 동작으로 흐름을 전환했고 나는 김이 샜다.        


나는 줄곧 두 선생님의 차이를 '상상력'의 유무라 보았다. A 선생님이 나와 동시에 같은 동작을 하고 있지 않아도, 물리적 거리가 떨어져 있어도, 나와 호흡을 맞춘다는 느낌이 든 건 분명 선생님의 상상력이 수업과 내 신체에 작용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상상력은 프로 운동 강사로서의 전문적인 지식, 여유롭고 끈기 있는 품성과 태도와 함께 작용했다. B 선생님이 입만 움직이는 기계 같단 느낌이 들었던 건, 선생님은 눈 앞의 수강생들과 교류하며 유연하게 수업을 이끌기보다, 머릿속의 매뉴얼에 맞춰 진행했기 때문이다. 분리되었다는 감각을 실증적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내 몸은 그렇게 느끼며 반응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신체 교육에는 직접적인 지시와 설명, 훈련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운동도 다른 모든 배움과 마찬가지로 관계와 소통 속에 이뤄진다. 어떤 훌륭한 선생님도 자신의 지식을 학생의 머릿속에 오롯이 구겨 넣어 전달할 수 없는 것처럼 운동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탁월한 선생님이라도 내 몸을 대신 움직여줄 수 없고, 통상의 교육 과정과 마찬가지로 신체 활동 교육 과정에서의 매개도 '상징'에 불과하다. 그 상징의 전달과 재구성은 배우는 자와 가르치는 자의 '상상력'을 매개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듀이가 말한 것처럼 말이다.

 

“상상력에 의해 비로소 상징이 직접적인 의미로 번역되고 좁은 활동과 통합되어서 그 활동의 의미가 확장되고 풍부해진다...(중략) 상상력이 직접적인 인식의 매체가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 것이야말로 기계적인 교육방법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다."  (민주주의와 교육, 교육과학사, p.357 )


1년 간의 운동 과정에서 내게 남은 키워드는 엉뚱하게도 '상상력'이란 단어였다. 물론 근력과 균형감각 등도 향상되었겠지만 그 이상으로 나를 자극한 건 따로 있었다. 배우는 자와 가르치는 자를 매개하는 끈,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발견하는 힘, 사적인 대화나 교류가 없어도 수업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주고받게 되는 능력과 성품의 기저에 상상력이 작용한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증명할 수 없으니 허무와 혼돈과 비현실적 환상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상상력이 작용하지 않는 현실을 상상하기도 어렵다. 보이지 않지만 모든 것을 추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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