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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잡문

겨털과 페미니즘

by 김현희

돌이켜보면 나는 상대적으로 페미니즘에 우호적인 환경에서 자랐다. 내 기준에서 아빠는 꽤 보수적 인물이지만 이상하리만치 여성(최소한 딸에게는;)의 권리와 자아실현에 개방적인 편이었다. 나는 ‘여자가 이래야 한다, 예쁘다, 귀엽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누구든 자기 주관을 갖고 생활해야 한다는 말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14살 때 우연히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고 인생 책으로 꼽았던 걸 보면 내게 내재한 경향이란 것도 분명 있긴 한 거 같다. 그런데 몇 년 후 어떤 글을 읽고 약간 삑사리가 났었다. 잡지에 페미니스트 활동가가 썼던 글 같은데 '여자도 다리와 겨드랑이 털을 밀지 말아야 한다, 털을 밀면 수동적이고 나약한 노예다' 란 식으로 강하게 주장하는 글이었다(내가 오독했을 가능성도 있음). 10대 때 내가 그 글을 읽자마자 가장 처음 했던 생각은 이렇다. "내가 털을 밀든 말든 지가 무슨 상관이야". 여성이 느끼는 사회적 압력의 존재를 부정하는 건 아닌데 당시 나는 단정적인 명령조에 거부감을 느꼈다. 그후 나는 오랫동안 그 일을 내가 페미니즘과 삑사리가 났던 첫 순간으로 기억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꼭 그렇게 생각할 일도 아니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압력을 직시하고 해방을 이끌되, 세세한 결에서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과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이기 때문이다. 또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대항하지만 군림하지 않고, 인간을 구획하고 틀에 가둬 움츠러들게 하지 않고, 다중심적 사회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상을 목표로 한다. 그러니 마당에 앉아 잡지를 뒤적이다가 "털을 밀든 말든 지가 무슨 상관이야.."라고 읊조렸던 중학생의 단순 무식해 보이는 말이 영 반페미니즘적 판단은 아니었던 거다.


커버이미지 Bo Bartlett- Lobster 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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