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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May 09. 2021

오늘은 너를 실컷 보았다

흔히 '여자는 엄마의 인생을 따라간다', '30년 뒤 자기 모습을 알고 싶다면 엄마의 얼굴을 보면 된다'라고 말한다. 나로서는 묘한 말이다. 나는 엄마와 매우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엄마는 내가 10대 후반까지 맞벌이를 하는 직장 여성이었지만 아이를 셋이나 길렀다. 늘 바빴고 한 동네에 시가족들이 모여 살 때 오는 온갖 압박 속에 살았다. 체구가 작고, 강하게 자기주장을 펼치지 않고, 유순해서 남과 충돌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얼핏 보면 내 사회적인 캐릭터는 아빠에 가까운 것 같다. 나는 엄마의 인생 궤적을 따르지 않고 있고 그래야 한다는 의무감도 그러고 싶다는 바람도 없다. 하지만 엄마가 준 것들이 내 피 속에, 세포에 스며들어 있지 않나 싶을 때는 있다.


어버이날인 어제 가족들이 모여 식사를 하는데 엄마가 수술을 앞두고 간병인을 고용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누군가 24시간 자신의 곁에 붙어있는 게 싫고 불편하다는 이유였다. 방역 지침 때문에 가족들이 병원에 드나들기 쉽지 않고, 요즘 엄마 귀가 너무 안 좋아져서 병원 생활이 곤란해질까 봐 온 가족이 달라붙어 설득했다. 나도 설득한 사람 중 하나였지만 양장피를 씹으면서 혼자 이런 말은 삼켰다. "... 근데 엄마가 왜 그러는지는 알아".


엄마는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지시를 내려야 하는 수직적 관계를 견디지 못한다. 환자와 간병인의 관계를 수직적 관계라 보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엄마의 성격상 편하게 느끼는 사회적 관계나 상황이 아니다. 엄마는 차라리 반대의 상황, 즉 누군가의 시중을 드는 상황을 편히 여기는 듯 보인다. 하지만 내가 40년 가까이 지켜본 결과 그건 시대와 사회의 압력, 부모 성역할 기대 등으로 본래 성정이 어그러진 채 작동했기 때문이지 엄마가 수동적 역할을 편하게 느껴서는 결코 아니다. 엄마는 나만큼 교육을 받지도, 책을 많이 읽지도 않았으니 수평적 관계, 역할 기대 따위의 말들을 나만큼 잘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안다. 비합리적이고 고집불통처럼 보이는 엄마 목소리 아래서 어떤 모습의 강이 흐르는지 적어도 조금은 안다.  


나는 나를 일방적으로 가르치려 드는 선배들을 유독 못 견뎌한다. 그래서 크게 부딪쳤던 기억들도 있고 지금도 그런 방식으로 다가오는 사람들과 거리를 둔다. 우리 집은 전형적인 엄부자모 유형이었고 내 강한 면모는 얼핏 아빠 영향처럼 보이겠지만 나는 엄마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내 똥기저귀를 갈아주며 온갖 지저분하고 나약한 상태를 돌봐준 사람이 나를 동등한 인격으로 대해주는 경험을 한 인간은 집 밖에 나와서도 나를 깔아뭉개고, 대상화하고, 어쭙잖게 가르치려 드는 행위를 견디지 못한다. 그 과정에서 나는 싸가지 없다는 소리도 들었고 '혹시 정말 이게 내 한계인가?' 싶어 자책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도 심지어 엄마도 모르지만, 만약 내게 누구도 해할 수 없는 강하고 순수한 면모가 있다면 그건 얼핏 비합리적일 정도로 약하게만 보이는 엄마 덕분이다.


어제 점심때쯤 만나 저녁까지 시간을 보내고 집 앞에 내려드리는데 엄마가 차 문을 닫으면서 아이처럼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너를 실컷 봤네!”


나는 피식 웃었다. 엄마는 어버이날마저도 자식들 냉장고에 반찬 채워줄 생각만 한다. 요즘 귀가 안 좋아져서 보청기를 꼈는데도 제대로 대화가 안된다. 그런데도 밥 먹고 얼굴 좀 봤다고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이 애틋하다해야 하나, 귀엽다고 해야 하나, 모르겠다. 모르겠는데 자꾸만 생각이 난다.     



커버 그림  Sargent - Girl fishing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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