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토, 2018. 8. 7
나는 걸인에게 돈이나 물건을 쉽게 건네지 못한다. 아까워서인 것도 있겠지만 그 행위 자체가 내게 남기는 감정이 여간 복잡하고 무거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몇 해 전 태국을 여행했다. 걸인들이 많았지만 애써 무시하며 걷곤 했는데 그 날 아침은 어쩐지 그럴 수가 없었다. 신발도 신지 않은 한 남루한 남자가 식당 앞 유리 앞에서 주인을 바라보며 손짓으로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입으로 뭔가를 떠 먹는 시늉을 보니 음식을 구걸하는 모양이었고 식당 주인이 고개를 흔들자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모두 꺼내며 그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막상 뒤에 서자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잠깐 망설이다가 어색하게 중얼거렸다. “어..어..아..익스큐즈미!” 두 번쯤 소리치자 그는 뒤를 바라보았다. 동전을 건네며 나도 모르게 말했었다. “미안해요. 이것 밖에 없어서.” 남자는 나를 보며 만면에 미소를 띄우더니 급기야 합장을 하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목례를 하고 뒤돌아 걷는데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왜 울었는지는...지금도 모르겠다. 동전 몇 개에 그의 얼굴이 햇살처럼 밝아졌기 때문이기도 했고. 어쩌면 호텔에 지갑을 두고 나온 게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순간 스쳤던게 부끄러웠기 때문인지도. 혹은 내가 그에게 무엇을 주든 결국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작지만 나름 선행이라면 선행인데, 왜 내게 남는 건 늘 고통 뿐인지. 나는 지금도 가끔 고민한다.
‘환대’에 관한 소설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는 김동*선생님의 추천으로 읽었다. 선생님은 전혀 모르시겠지만 나는 여행 전 아이패드에 이 책을 구겨 넣어와 이탈리아 시골의 작은 호텔방에서 낄낄 웃으며 읽기 시작했고. 방금 만신창이가 된 기분으로 읽기를 마쳤다. 등장 인물들의 고통보다 오히려 작가의 고통이 더 생생하게 느껴졌는데, 그 고통의 정체는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작가의 자책 어린 문장을 읽으며 깨달았다. 나의 글은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해서 쓰는 글이 아닌, 누군가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쓰는 글” (263쪽). / 그렇다.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하는 일은 고통이고 누군가의 고통을 바라보며 쓰는 글은 고통이라 말하기도 부끄러운 고통이며. 그 따위 걸 고통이라고 말하고 앉아있는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나의 자책도 고통이다. 작가의 말마따나, 정말이지 ‘윤리를 책으로, 소설로 배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