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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Dec 24. 2021

불평등한 해석노동

2021.12.24. 사면복권 소식


불평등한 사회 구조에서 약자는 강자의 입장을 상상한다. 하인은 주인의 입장을, 여성은 남성의 입장을, 빈자는 부자의 입장을, 피고용인은 고용인의 마음을 상상하고 헤아린다. 안타깝게도 반대 방향의 상상은 자주 발생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하인이 주인의 입장을 상상하는 만큼 주인이 하인의 입장을 헤아리지 않는다. 그들이 날 때부터 악독해서가 아니다. 구조적 불평등의 수혜자들은 반대 입장인 사람들의 처지에 대해 상상해야 할 현실적 필요가 적다. '도덕 감정론'을 쓴 애덤 스미스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밝혔듯, 상상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즉 누군가의 입장에 대해 끝없이 상상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자연스레 상대에게 연민을 느끼게 된다. 


파면된 전직 대통령의 사면복권 소식은 얼마간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일반 시민들까지 국민통합, 전직 대통령의 건강상태, 문 정권의 고충과 정치인들의 손익계산까지 열심히 헤아려주시는 모습에 나는 아연해졌다. 물론 천성이 착하신 건 알겠다. 또 확실히 상상 노동을 많이 하다 보니 연민의 감정도 깊어진 모양이다. 다만, 평범한 사람들이 고위층들의 견해와 입장을 상상하며 자발적으로 해석노동을 하는 만큼의 노력을 반대쪽에서도 하는지는 의문이다. 상상과 연민을 사회의 다른 계층에게 전했다면 한국 사회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졌을지도 궁금하다.     


이 상황을 개탄하며 환멸을 느끼는 사람들을 인간애가 메마른 자들로 치부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공감과 상상은 중요하지만 이성, 규범과 마찬가지로 만능 치트키가 아니다. 법과 원칙을 무시하면서까지, 그것도 한쪽 방향에서만 해.바.치.는 상상과 해석노동은 불평등한 구조를 유지 보존하고, 한국의 거지 같은 역사를 되풀이하는 강력한 기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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