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어의 한계 너머로
*영어교육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한국인들에게 영어는 중요한 존재다. 한국 사회에서 영어 능력은 한 개인의 총체적 지성, 사회경제적 지위와 연결되는 문화·상징 자본이다. 어떤 이들은 영어를 인생의 의미와 지향점에 연결 지어 영어를 인생에서 풀지 못한 숙제쯤으로 여기기도 한다. 영어가 입시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교육 정책, 영어 능력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관심과 열망, 국제 언어로서의 영어의 위상, 취업 시장에서의 높은 가치 평가 등을 통해서도 이를 알 수 있다.
한국인과 영어의 만남이 항상 순조롭거나 유익하지는 않다. 영어 공교육만으로 자유로운 의사소통능력을 기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명성 있는 학원과 강사, 교재 등을 이용해 공부하고 거액을 들여 어학연수까지 다녀오지만 기대했던 만큼의 변화가 생기지 않는 경우도 많다. 많은 학습자들은 스스로를 탓한다. 문제의 원인을 노력과 재능의 부족, 영어 학습을 시작한 나이, 학습 방법 등에서 찾는다. 영어 학습계의 패기 넘치는 광고 문구들 (너도 할 수 있어!, 나만 따라와!, 100일이면 완성!)의 이면에는 한국인들의 막연한 실망과 무능력감이 숨어 있다.
우리는 영어가 마치 특정한 구체적인 목적과 필요를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듯 분절하고 선을 긋는다. 한국에는 취업용 영어, 내신용 영어, 수능 영어, 실생활 영어의 형태와 공부방법이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구분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영어의 사회·정치적 맥락과 지위 등은 미지의 영역에, 소수 연구자들의 과제로 남겨둔다. 영어 교육에 관심이 많고(사교육비 지출 부분에서 영어는 부동의 1위이다), 영어 잘하는 사람을 칭송하고(연예인들의 영어 능력을 분석하는 유튜브 방송은 인기다), 영어가 국제화 시대의 필수적인 무기라고 강변하면서도 영어 교육의 가치와 존재 이유는 사회적 통념과 당위의 문제에 머물러 있다. 영어 교육의 가치는 극단적 실용주의 혹은 극단적 국수주의 사이 어딘가를 떠돌고, 초점 없는 논의는 영어 교육의 가치를 불분명하게 만든다.
사태의 뿌리는 개인에게 있지 않다. 문제는 주류 영어 교육계와 영어 산업이 영어를 가르치고, 팔고, 이용하는 방식이다. 영어 교육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지 등의 중요한 문제에 대해 대답은 회피하고 변죽을 울리며 몸집만 부풀려 왔다. 영어는 모든 교과목을 통틀어 가장 기만적이고 타락한 방향으로 발전해 온 교과이며 이는 공교육과 사교육 모두에 해당된다.
우리는 영어의 가치와 목적에 대해 더 깊고, 풍부한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 영어교육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영어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을 기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영어 교육은 시민교육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모두가 말하듯 영어가 ‘도구’라면 이는 어떤 종류의 어떤 가능성을 가진 도구이며, 우리에게 어떤 이익과 즐거움 혹은 해악을 줄 수 있을까?
*영어교육의 가치
1. 외국어는 모국어의 한계 너머로 우리의 시선을 확장시킨다
학교에서 영어교육을 담당하며 원어민 관리 업무를 하면서 본의 아니게 통역사 역할을 하게 되는 일이 잦았다. 나는 전문 통역 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니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듯 통역을 해왔는데 거듭할수록 흥미진진한 측면이 있었다. 한국어를 영어로 통역할 때인지 혹은 그 반대인지, 어떤 주제로 누구의 말을 통역하는지 등에 따라 내 어설픈 통역의 난이도, 완성도, 역동성, 깊이가 달라졌다. 일천한 경험이지만 나로서도 통역을 할 때는 경계 지점에 올라 외줄타기를 할 때와 같은 균형감각이 필요했고, 드러난 언어 이면의 뉘앙스를 잡는 감각도 요구됐다. 외줄을 타는 행위 자체가 내가 영어를 배우며 겪은 상황이나 감정과 흡사하기도 했고 말이다.
오래 전 일이다. 동료 교사가 퇴근 시간이 되자 내게 "수고하세요를 영어로 뭐라고 해요?" 라고 물었다. 그 선생님은 원어민에게 퇴근 인사를 하고 싶어 묻는 질문이었는데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곧이곧대로 번역해 'Work hard'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그냥 '굿바이'라고 하시는 게 어때요?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선생님도 '굿바이'라는 표현을 몰라서 묻는 건 아니었을 테니 서로 잠시 겸연쩍은 상황이 되었었지만 상황이 종료되고 혼자 생각하고 조사를 해봐도 실제로 영어에는 '수고하세요'에 상응하는 말이 존재하지 않았다. 영어권에서는 헤어질 때 오히려 반대로 "Take it easy" 즉 "Relax, 무리하지 마"라고 말한다. 물론 한국어의 '수고하세요'나 영어의 'Take it easy' 모두 구체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기보다는 단순한 인사말에 가깝다. 막 한국에 도착한 원어민 보조교사와 교장선생님이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나는 매번 한국어와 영어가 얼마나 다른지 절감하곤 했다. 교장선생님들은 환하게 웃으며 “김 선생, 원어민한테 우리 학교 학생들을 잘 부탁한다고 좀 해주게”라고 하셨지만 사실 영어에는 '잘 부탁한다'라는 표현 자체가 없다. 동일한 상황이라면 다음과 같은 표현이 가장 흔하고 형식적인 인사말이 될 것이다. “Welcome to our school. We hope you enjoy working here. Let me know if you have any problems”. 교장선생님들의 말을 영어로 직역하면 상당히 어색하고, 화자의 본래의 취지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통역이 되곤 했다. 초보인 나로서는 실질적인 정보를 교환하는 의사소통보다는 교감적 언어 사용(phatic communion), 즉 정보 교환이 아닌 원만한 사회적 관계를 수립하고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생하는 의사소통이 훨씬 어렵게 느껴졌었다.
중요한 건 내가 외국어인 영어를 익히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나의 모어인 한국어에 대해 좀 더 균형 잡힌 시선과 객관적인 태도를 갖추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외국어에 빗대어 한국어를 바라보지 않았다면 왜 한국어는 헤어질 때 상대에게 '애쓰라'라고 말하는지, 왜 한국어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잘 적응하길 바란다'는 표현보다 '부탁한다'라는 말을 쓰는지 등에 대해 한걸음 비껴 서서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은 그 자신의 모국어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다고 본 괴테(Goethe)의 격언은 사실이다.
외국어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국어의 한계 너머로 시선과 사유를 확장시키는 힘이 있다. 한국어, 영어, 줄루어 그 어떤 언어도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요소, 인류가 교류하기 위해 필요한 개념과 감성, 관점들을 모조리 담고 있지 못하다. 이질적인 외국어와 만나는 과정에서 우리는 갇혀 있는지도 몰랐던 틀을 인식하고, 새로운 경험을 향한 욕구, 내면의 자유로운 충동을 느끼며 이를 통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식을 확장할 수 있다. 바다에서 태어난 고래는 바다라는 존재를 인식하기 어렵다. 외국어는 인간의 모국어가 필연적으로 선사하는 갖가지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는 가장 유용하고 강력한 도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