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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Mar 01. 2022

팬데믹 3년,
학교를 본래 주인에게 돌려줄 때

교육잡지 '민들레' 140호 

* 이 글은 교육잡지 '민들레'140호에 '학교의 주인은 바이러스가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두려운 신체          


초등학교 6학년 수업 시간, 쓰기 활동이 시작됐는데 한 학생이 가만히 앉아만 있다. 내가 눈을 마주치자 연필이 없다고 속삭였다. 주위 학생들에게 물었다. “연필 좀 빌려줄 사람?” 교실에는 침묵만 흘렀다. 한 학생이 장난스레 “오-노! 코로나!”라고 말했고 몇몇 아이들이 작게 웃었다. 나는 교사용 책상 서랍을 뒤져서 연필을 찾아 건넸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전염병에 대한 공포가 강해 방역 수칙을 철저하게 지킨다. 교실에서 마스크를 벗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코로나 사태 이후 처음으로 등교가 시작된 날 학교는 살얼음판이었다. 수업 시간 교실은 물론 쉬는 시간 복도에도 정적이 감돌았다. 대화와 놀이는커녕 학생이 두 명 이상 모이는 행위 자체가 금기시되었다. 2년 차에 접어들어 분위기는 다소 완화되었지만 거리두기 상황은 그대로이다. 급식실에는 칸막이가 설치됐고, 학교 규칙상 급식실에서 인사는 목례로 대신한다. 아이들은 식사 도중 어떤 대화도 할 수 없다. 


이런 환경 속에서 아이들은 타인의 신체를 잠재적인 바이러스 전파 매개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예민한 몇몇 아이들은 집에 가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온몸을 씻고 싶어 한다. 개인차가 있지만, 어떤 형태로든 타인과의 신체 접촉을 피하려는 아이들이 보인다. 어차피 규정상 정해진 구역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학급 간 교류와 공용 물품 사용도 제한된다. 과학 실험은 아이들이 아주 좋아하는 활동이다. 하지만 실험 도구가 학교 공용 물품이다 보니 2년 간 수업에 상당한 제한이 있었다. 아이들은 ‘○반에 코로나 걸린 애’, ‘자가 격리된 애’, ‘백신 맞은 애’ 등으로 서로를 분류하다. 매일 발표되는 확진자 수를 언급하고 사람을 자연스레 숫자로 인식한다. 각자의 신체는 거리두기가 필요한 대상이고, 언제든지 감염을 전파할 수 있는 두려운 존재다. 인간적 만남을 매개하는 연결고리가 여러모로 위태롭다.      


장소의 실종


학교 공간은 방역 논리에 따라 구석구석 재편됐다. 원래 많은 초등학교의 교실 한쪽에는 바닥 매트 등을 이용한 놀이 공간이 있었다. 쉬는 시간에 아이들은 그곳에서 보드게임을 하거나, 책을 보곤 했었는데 그 공간이 자취를 감췄다. 학급 도서가 비치된 책장에도 ‘이용 금지’라는 팻말이 붙은 경우가 많다. 학교 도서관 역시 폐쇄와 개장을 반복했다. 아이들은 도서관에서 책만 보지 않는다. 숙제를 하고,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거나, 방과 후 수업을 기다리다가 얼떨결에 책과 가까워지기도 했던 공간이다. 많은 학교에서 각종 교과실(과학실, 영어실, 미술실, 음악실 등) 이용을 금지했다. 학생들의 동선, 다른 학급과의 접촉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이동 인원 관리를 위해 교문도 일부 폐쇄했다.      


활동 공간이 축소되고, 동선이 제한되고, 교류 시간의 총량이 줄었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적어도 초등학생들은) 학교에 오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변화된 학교 공간이 아이들 인식에는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을까? 얼마 전 수업 시간에 한 학생이 화장실에 가고 싶어 했다. 그 학생은 뒷문으로 나가더니 잠시 후 앞문을 벌컥 열고 돌아왔다. 그 바람에 활동 중이던 학생들의 주의가 잠시 흐트러졌다. 고학년 교실에서 거의 본 적이 없는 상황이라 잠시 의아했지만, 곧 이해했다. 재작년 등교 재개 후 우리 학교는 모든 학급의 통행 규칙을 동일하게 설정했다. 교실을 나갈 때는 뒷문, 들어올 때는 무조건 앞문을 이용해야 한다. 복도에 동선 유도용 발자국 스티커도 붙여 놓았다. 아이들은 자신이 행위하는 순간의 시간과 상황을 고려하기보다, 방역 수칙이 정한 동선을 따르고 있었다. 운동장, 놀이시설, 중정, 출입로 등 학내 모든 장소에 대한 통제가 강화됐지만, 이견을 제시하는 목소리는 없다. 특히 1~2학년 학생들은 학교 공간 내에서의 생활이란 본래 이런 형태라고 인식할 가능성이 크다.


학생 탓도, 교사 탓도, 학교 탓도 아니다. 하지만 학교 공간에 대한 학생들의 주권과 주인의식은 약해졌다. 당연한 일이다. 학교 진입과 동시에 신체는 측정 대상이 된다. 코로나 사태 이후 유무형의 교육과정, 학교의 모든 공간이 방역 논리와 수칙에 따라 재편되었다. 학생과 교사가 자체의 논리와 필요에 따라 규칙을 정하고 조율할 여지가 줄었다. 구성원들의 상상력, 창의력, 배려심 등이 발현될 가능성이 방역 논리 앞에 힘을 쓰지 못한다. 모든 교육적 시도와 상상이 ‘그러다 감염이 발생하면 누가 책임질 건가?’라는 한마디에 무력화된 지 3년째다.      


장소와 민주주의               


교실이라는 장소는 본래 연필이 없는 친구를 위해 나의 필통을 열고, 친구의 물건이 바닥에 떨어지면 대신 주워주기도 하던 장소였다. 책상과 의자로 앞뒤가 막혀 있지만 쉬는 시간에는 종횡무진 삼삼오오 활보할 수 있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수업 중 소규모 그룹 활동이 대폭 축소되었다. 노래하기, 신체 활동도 마찬가지다. 국가교육회의 조사 결과 학부모 85.7%, 교사 86.7%가 학생의 사회성 저하를 우려한다. 거리두기가 장려되고 어울림을 백안시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당연한 결과다. 나는 쉬는 시간에도 우두커니 앉아있거나 정처 없이, 불안한 듯 서성이는 아이들을 본다. ‘공간’은 그대로이지만 학교라는 ‘장소’가 그대로인지는 의문이다. 


인문지리학은 ‘공간’과 ‘장소’를 구분한다. 공간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면 장소가 된다. 즉 공간이 인간화, 사회화되어 경험이 축적된 곳이 장소이다. 코로나 19 사태 이후 물리적으로 사라진 공간은 없다. 작정하고 철거하지 않은 이상 공간은 그대로다. 하지만 ‘장소’로서의 학교, 놀이터, 운동장, 도서관 등은 달라졌다. 동네 곳곳의 미술관, 체육시설, 지역아동센터, 대학 부설교육원, 교육복지문화기관도 활동 자취를 감추거나 대폭 축소했다. 아이들은 그 장소들에서 정서와 감수성을 고양하고, 신체를 단련했다. 뿌리를 내리고 정체성을 형성했다. 지역민들 역시 정보를 나누고, 네트워크를 맺고, 지역의 개성 있는 서사와 연대를 꾸려갔다. 


시인 이문재는 민주주의는 ‘장소’의 문제라고 말한 바 있다. 장소를 회복해야 참여 민주주의, 풀뿌리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학교 민주주의를 고민해왔고, 유례없는 전염병 사태로 장소 실종을 경험하며 나는 부쩍 ‘민주주의는 장소’라는 말의 의미를 절감한다. 팬데믹 이후 우리 학교는 전체 교원 회의를 한 번도 열지 못했다. 2020년 이후 전입한 교사들은 같은 학년 소속이 아닌 이상 얼굴도 잘 모른다. 중요한 회의를 줌이나 채팅으로 열었다. 특히 채팅으로 여는 회의는 비민주적이고 엉뚱한 결론으로 흐르기 쉬웠다. 절차와 형식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소통 ‘장소’가 확보되지 않자 정보 교류가 불투명했고 회의는 일방적으로 흘렀다. 어떤 회의이든 위원들의 대의성이 담보되려면 회의 전 구성원들 간 사전 교류가 필수이다. 하지만 이제 만남은 위험을 무릅쓰고 하는 활동이다. 비대면이 사회의 디폴트 값이 되었다. 또 각자 맡은 일의 분주함, 자신과 직접 관련되지 않은 사안에 대한 무관심, 침묵, 민주주의에 대한 무지 등이 얽혀 코로나 19는 학교 민주주의까지 위기로 내몰고 있다. 


과거 어떤 교장은 교사들이 협의실에 모이는 걸 유독 싫어했다. 협의실 유리창에 붙어있는 가림막을 모두 제거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그때 나는 '저분은 교사들이 잠시도 쉬지 않고 일만 하길 바라나?'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보니 그게 전부가 아니다. 권력은 고립을 원한다. 구성원들의 연결이 두렵다. 교사들이 모이면 정보를 공유하고, 학교 운영상의 문제점도 발견한다. 개선을 위한 아이디어와 대책도 마련한다. 물론 불필요한 잡음과 뒷담화도 생기고 연결과 만남의 모든 면면이 생산적이지는 않다. 그럼에도 구성원들의 교류와 소통이 가능한 네트워크 형성은 중요하다. 구성원들이 모일 장소의 부재는 민주주의의 기반을 흔든다. 


학교 민주주의의 중요한 축인 학생 자치활동도 상당히 위축되었다. 자주 열던 학생 주도 캠페인, 행사, 학교 간 교류도 마찬가지다. 우리 학교는 2년 전 화장실 증축 공사를 하면서 화장실과 복도를 잇는 공간에 예쁜 벤치를 만들었다. 휴식과 교류 촉진의 취지였지만 그곳에 앉아 대화하는 학생은 거의 없다. 자치활동은 고사하고 대화 시간 자체가 줄었다. 덕분에 학교폭력 사안은 줄었고 국회입법조사처에 따르면 가정폭력이 늘었다. 아이들이 고립된 상황에 적응해가고 있다는 건 불길한 징조이다. 대면 접촉이 감소하고 디지털기기 의존도가 증가하면서 친구를 사귈 필요를 느끼지 않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 많은 현장 교사들과 청소년 상담복지전문가들이 코로나 19 사태 이후 아이들의 관계 맺기 욕구 자체가 떨어지고 있음을 우려한다.  


학교폭력 사례가 줄었다고 마냥 기뻐할 상황이 아니다. 갓난아기에게 눈병이 났다고 장기간 안대를 씌우면 실명할 가능성이 크다. 눈에 시각 자극이 유입되면 시신경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고 이는 뇌의 시신경 세포와 연결된다. 오랜 기간 시각 자극이 없으면 뇌의 시각피질에 있는 뇌세포가 연결되지 않아 아기는 실명한다. 교실에서 친구에게 연필을 빌려주지 않는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우려스러웠던 지점이 이러한 맥락이다. 타인과의 단절을 기본값으로 인식하는 환경이 지속된다면, 타인의 상황과 처지를 자극으로 인식하는 뇌의 회로도 끊어지지 않을까. 협업하고, 충돌하고, 상처와 갈등을 봉합하고 극복하는 과정은 시민교육의 일환으로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경험이다.     


민주주의는 장소에서 시작되고 신체에서 자란다          


학교는 방역의 최전선이 아니다. 잠재적 바이러스 전파자들의 집합소도 아니다. 학교는 학습과 생활의 공간이다. 배움과 성장의 장소이며 성장은 사회적, 관계적 경험을 통해 발생한다. 물론 방역은 중요한 과제이고 학교 공간의 물리적 구획은 앞으로도 당분간 불가피하다. 하지만 학교의 장소성, 학교의 진정한 주인, 교육의 본질까지 조각낼 수는 없다.


학교의 실종된 장소성은 취약계층 아이들에게 특히 큰 타격을 입혔다. 코로나 19에도 불구하고 여유 있는 가정의 아이들은 사교육, 사설 놀이시설, 스포츠클럽, 각종 캠프 등에 참여했다. 국내 놀이공원이나 워터파크 등에서 추억도 쌓았다. 학습격차만 벌어진 게 아니다. 학교의 생활, 놀이, 쉼, 관계 형성의 장소성이 희미해지자, 취약계층 아이들의 삶의 서사는 유독 납작해졌다. 교육적이고 지속 가능한 장소성을 유지할 수 있는 체계 구축이 시급하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미세먼지, 기후위기, 전염병 발생 상황에서도 모든 형편의 아이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소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방역 지침을 철저하게 준수하되 학교의 자율성, 운영의 여유와 유연성도 존중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교육계의 안전 의식은 강화되다 못해 경직됐다. 직접 체험과 야외활동이 금지되고 위험 가능성이 있는 요소는 모두 사전 차단했다. 코로나 19 사태 이후 더욱 심해지는 추세다. 물리적 구역의 제한은 물론 수업 시간을 단축한 학교도 많다. 아이들이 학교에 머무는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예전에는 위험 가능성이 있는 사건과 사물을 제거했다. 이제 인간의 신체마저 치워야 할 대상이다. 방역 책임을 학교와 개별 교사에게 전가한다면 누구라도 이런 결정을 내리기 쉽다. 놀이터 디자이너 편해문은 ‘위험이 무엇인지 모르게 가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위험’이라고 말한다. 아이들에게 가리고 있는 건 가시적인 시간과 장소 그 이상이다. 감염병을 빌미로 책임회피와 행정편의주의 현상이 심해지는 현상도 살펴볼 일이다. 


인문지리학의 고전 '공간과 장소'를 쓴 학자 이 푸 투안은 말한다. "우리의 욕망에 응해줄 때 세상은 광활하게, 우리의 욕망을 좌절시킬 때 세상은 답답하게 느껴진다." 오랜 시간 무수히 많은 이들에게 학교는 답답한 장소였다. 하지만 코로나 이전 몇 년 동안 학교 공간에 대한 반성과 혁신에 대한 요구가 거셌다. 모든 구성원이 생각을 나누고 학습과 놀이, 쉼의 공간으로 학교를 재탄생시키자는 '공간혁신' 운동도 움을 틔웠다. 시민교육의 새로운 출발이란 희망과 설렘이 코로나 19로 인해 잠시 멈춘 듯하다. 혼란한 방역 지침으로 학교는 답답하게 짓눌리고 있다.


학교가 광활한 장소가 되기 위해 거대한 조형물, 특출난 시각 디자인은 필요하지 않다. 광활한 민주주의는 작고 친밀한 장소들에서 시작된다. 복도의 작은 벤치, 놀이터 담장, 운동장의 나무 한 그루 아래서 시작되는 ‘관계’가 핵심이다. 민주주의는 장소에서 시작되고 신체에서 자란다. 전염병 상황에서 학교가 당장 광활한 장소가 되기는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보다 풍성해질 수는 있다. 모든 위험요소를 고려하더라도 학교라는 장소의 주인은 바이러스가 아니다.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 중심인 인간공동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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