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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Oct 04. 2023

복수는 너의 것

2023. 06. 17.

주방 팬트리 구석에서 10리터짜리 쓰레기 봉투를 발견했다. 하얀 휴지와 구겨진 종이조각 같은 것들로 거의 찬 상태다. 쓰레기통은 주방에 있는데 왜 이런 게 팬트리에 있냐고 물었더니 배우자가 정색을 했다. “기억 안 나?” 


어렴풋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참지 않겠어쩌고저쩌고. 본때를 보여주겠어쩌고저쩌고..


나는 사용한 휴지나 끄적인 쪽지를 손에 꼭 쥐고 있다가 있던 자리에 그대로 내려두는 습관이 있는데(있다고 하는데) 배우자가 지속적인 시정 요구를 했으나 (그의 말대로라면) 내가 귓등으로도 듣지 않자, “앞으로 네가 흘린 쓰레기 내가 차곡차곡 모아두었다가 너의 서재에 마구 뿌려 버리겠어!” 라고 엄포를 놓았던 것이다. 뭔가를 ‘뿌리겠다!’고 선언하던 목소리가 꿈결에서 들은 양 어슴프레 기억나는데 돈이 아니라 쓰레기를 뿌리겠다는 말이었고, 무엇보다 그 선언은 꿈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 몇 주전부터 식탁 위, 소파 위, 싱크대 위에 놓여진 나의 쓰레기를 차곡차곡 모아 팬트리에 야무지게 저장하고 있었다; 


사실 조금 억울하다. 나는 안 버리는 게 아니라 늦게 버릴 뿐이다. 잠시를 못 참고 보이는 족족 버리니 나로선 내 습관을 인지할 시간조차 없었다고 말하려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참았다. 어쨌든 봉투는 거의 찬 상태이다. 이쯤에서 정신을 차려줄지, 쓰레기 폭탄을 투하하며 속이나 한 번 시원하라고 봉투가 가득 찰 때까지 조금 더 흘려줄지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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