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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Feb 25. 2024

어쩌다 혁신

2023년 12월 29일

사실 나는 '혁신'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데 어쩌다 혁신의 아이콘이 되고 말았다. '새롭고 희망이 보인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너무 감사하면서도, 무엇이 새롭고 어디에서 희망을 보는지 나로선 모르겠다. 그런데 얼마 전 대전지부 '열광(열린 광장)' 예행연습에 참여하신, 정년을 2개월 앞둔 활동가 선생님이 공개적으로 이런 피드백을 주셨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 광장과 대비되는 개념은 '밀실'이다. 밀실에서 나와 광장에 참여하는 삶이야말로 나는 공적으로 가치롭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우리가 광장을 열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 '열광의 밤'에 참여해 보니 우리 세대는 밀실에 갇혀있었던 것 같다. 새로운 집행부가 어려운 일을 참 쉽게 해낸다. 어려운 일을 쉽게 하는 거야말로 실력이다. 정말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더 일찍 했어야 했다." 


존경하는 선생님의 피드백에 가슴이 벅찼고, 예행연습 후 운영진들의 밝은 표정을 보며 전망이 나쁘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 내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누군가는 이미 우리 지부에서 혁신을 보고 말하고 있다. 이제 나도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곁에 혁신이란 단어를 조심스레 배치하고, 간단히 사후분석을 해보는 작업도 필요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볼 때 변화를 위해 필요한 건 우선 정직함이다. 문제를 바닥까지 직시해야 하고 스스로를 속여선 안된다. 특히 전교조와 같은 연식과 역사를 지닌 조직에서 '우리는 언제나 옳고 정의롭다'는 도덕적 우월감에 취해 있으면 답이 없다.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고 가차 없이 버리고 남길 것만 남긴다. 정직해진다는 건 생각보다 어렵고 반발을 부르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또 무엇보다 '내적인 동기'가 정말 중요하다. 나를 움직이는 건 조직을 살려야겠다는 사명이 아니다. 나의 논리, 나의 스토리, 나의 관점으로 뭉친 내적 동기다. 외적 조건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생각을 '안에서 밖으로' 뚝심있게 펼쳐나가야 한다. 처음부터 완벽한 아이디어란 없다. 뜻한 바가 있으면 일단 시도부터 해보고 이후 수정해 나가면 된다. 


혁신을 위해 성실성도 필요하다. 대전지부 실장님, 페북분회 총무님 등이 곁에서 나를 지켜보고 내린 의외의 공통적 평가 중 하나가 '성실하다'는 것이었다. 그냥 두면 알아서 굴러가는 공동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리더의 성실함은 보이는 곳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혁신에는 내용, 방법, 절차가 따로 있지 않다. 그래서 설명하기도 곤란하다. 혁신이 허무맹랑한 자아도취로 귀결되지 않으려면 정직함, 성실성, 내적동기 등 별로 혁신적이지 않아 보이는 덕목들이 더 중요하다. 수업과 마찬가지다. 똑같은 수업 자료로 선생님들은 완전히 다른 수업을 한다. 수업도 혁신도 기본기 이후의 단계에서는 예술과 감각의 영역이다. 


이상, 자타공인 혹은 자포자기; 혁신의 아이콘이 쓴 전혀 혁신적이지 않은 글이다.  


(사진은 '열광' 운영진 브리핑 모습 / 주재기자가 쓴 '열광' 기사는 댓글 링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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