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5. 6.
이사 오면서 짐을 많이 버렸다. 쇼핑을 즐기지 않는 성격인데도 어느새 쌓인 책, 옷, 잡동사니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했었다. 거주지를 옮기는 김에 삶을 리셋하고 싶기도 했다. 버리다가 망설여질 때면 '어차피 내가 죽으면 다 쓰레기가 된다'라고 생각하니 작업이 한결 쉬웠다. 작년에 아빠가 돌아가신 후로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데, 지난 12월 말 무안 항공기 참사 이후 더 심해졌다. 수십 년 후 내 유품을 정리하는 범준(조카, 현재 만3세)을 상상하기도 했다. '범준이가 굳이 이 물건을 대면할 필요가 있나?' 그렇게 수많은 물건들이 비명횡사하거나 팔려 나갔다.
스탈린급의 잔혹함으로 물건을 숙청하던 내가 몇 번을 망설인 끝에 결국 버리지 못한 물건이 몇 개 있다. 하나는 15년 전 생일 선물로 받았던 내 생애 첫 이북 단말기다. 지금은 책을 다운로드할 수도 없는 완전한 구형이고, 나는 이미 최신 단말기를 쓰고 있다. 하지만 당시 이북을 처음 접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초, 중학교 때 보던 소설들의 영어 원작판을 어렵게 구해 다운로드해 놨었고, 타임머신이라도 탄 듯 설렜던 기분을 잊을 수 없어 (내가 그 소설들을 다시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도저히 버리지 못했다.
그리고 이 책 '거미여인의 키스'. 10대 때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마누엘 피그 같은 남미 작가들 작품에 빠졌었다. '거미여인의 키스'는 영화 잡지에서 언급된 내용을 읽고 '나는 기필코 이 책을 찾아 읽고 말겠다!'라고 결심했었던 것 같다. 자주 가던 동네 서점으로 달려갔지만 물론 없었다. 나름 단골이던 내게 서점 아저씨는 '반드시 구해주겠다!'라고 약속했었고, 이후 밥 먹듯 서점에 들러 확인을 하다가, 한 달이 걸려서야 겨우 책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창고 지하에서 족히 10년은 갇혀 있다 탈출한 꾀죄죄한 몰골에 좀냄새가 심하게 났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아저씨께 거듭 감사 인사를 하고, 소중하게 책을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와 밤새 열심히 읽고 마지막장을 넘기며 후드득 눈물을 흘렸었다. 지금도 남아있는 이 퀴퀴한 좀냄새가 너무 소중해, 도저히 버릴 수 없다.
스탈린에게 빙의라도 한 듯 매일 '버려라!', '쳐내라!', '물건 따위 우리가 죽으면 다 끝이다!', '필요한 것만 남겨라!'를 외치며 피의 숙청을 단행하던 내가, 문 앞에서 몇 번이고 종종 거리다가 결국 내가 가진 것 중 '제일 낡은 책', '이제는 제대로 사용조차 할 수 없는 구형 이북 단말기'만 챙겨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배우자 김모씨는 진심으로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는 살다 보니 "실용성과 가치가 꼭 비례하지만은 않더라고!" 외치며 기막혀하는 김모씨를 달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