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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다비 6시간전

쇼가 끝난 뒤

#1 이삿날

이사하는 날 엄마 꿈을 꾸었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엄마 꿈을 꾸었다. 돌아가신 지 백여 일 되는 날이었다. 오늘만 엄마꿈을 꾼 것이 아니다. 요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 꿈을 거의 매일 꾸는 것 같다. 남편에게 엄마 꿈을 꾼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사하고 며칠이 지나, 시어머니와 통화를 하게 됐다. 즐거운 통화 후, 어머님이 문득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아휴.. 너희들 이렇게 넓은 집으로 살게 된 거, 이여사가 보셨음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뭣이 그렇게 바빠서 벌써 가버렸다냐. 내 마음이 너무 아프다.”

“그렇지 않아도 이사하던 날 엄마가 꿈에 나오셨어요.”

“그래~? 너희들 잘 살려나보다.”

뭐 그런 이야기를 하고 통화는 끝났다.


밑도 끝도 없이 근거도 없이 하는 말을 나는 싫어한다. 평소 같았음, 어머니가 내게 그런 말씀을 하셨을 ‘그게 정말인가? 정말로 그런 해석들이 있는가?’ 궁금해하거나 혹은,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시는 거야?’ 하며 꿈의 진짜 의미와 어머님 말씀의 뜻을 파헤치고 싶어 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천재지변을 겪으며 나는 많이 변해버렸다.

그게 너의 어떤 심리상태가 적용된 꿈이다, 이런 추측 없이 그냥 <잘 될 거야>라는 말씀을 해주신 부분이 좋았다. 아빠와의 이런 신경전을 겪으며, 아빠도 혼자였듯이 나도 혼자구나. 형제도 없는데 부모도 의지하면 안 되는 거구나. 싶어 너무 외로웠다. 나는 어쩌면 이런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아묻따 부적’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나의 변화가 마음에 들었다.



#2 엄마를 진짜로 떠나보낸 날

이사한 지 2주쯤 되는 날이었다.

좁은 아파트에 살며 복도에 늘어놓았던 짐을 몽땅 집에 넣어놓으니, 얼마나 정리할 것이 많은지 매일매일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전도사 사역 시작도 해야 하고, 남편 교육부서 사람들 식사 초대도 하고 싶은데, 체력이 따라주지 못했다. 아차 하는 순간에 손목이 또 작살나 시큰찌릿한 충격파 치료와 근막주사를 맞으러 가게 될까 봐 살살 아껴가며 하느라 이중고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날은 <전날 푹 잤다>고 S워치가 분석해 주었는데도 이상하게 아침부터 밤새 못 잔 사람처럼 몽롱하고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술에 만취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눈이 어찌나 시리고 부신지, 선글라스를 끼고 집 앞엘 나갔다 왔다.


토요일은 무척 바쁘다. 아이들이 평소에 하지 못했던 활동들을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 활동의 반경도 넓어지고, 그것은 곧 내가 운전기사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셔틀버스 운행이 여의치 않는 프로그램에는 열심히 실어 나르며 참여시켜야 한다. 보통은 남편과 상황을 공유하며 형편이 괜찮은 사람이 아이를 데리러 가곤 했다. 내가 1호 데리러 갈게 그럼 당신이 2호를 몇 시까지 센터에 데려다줘하는 식이다. 그런데 날짜는 11월 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교회에서는 총회준비를 하느라 몹시 바쁘니 남편 말고 내가 두 아이의 케어를 모두 책임져야 하는 날이다. 헌데 눈앞이 이토록 어지럽고 세상이 빙글 대니,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태로 운전하다 사고를 낼 것만 같았다. 저속으로 동네길 다닐 때가 더 위험하다. 동네길에서는 차대차 사고보다 보행자와 사고가 날 확률이 높기 때문에.

다행히 남편이 회의 후 바로 심방 나가기 전 쪽시간을 이용하여 아이를 픽업해 줄 수가 있었고, 나는 아이가 나가거나 말거나 안대를 착용하고 누웠다. 그리고 이내 깊은 잠을 잤다. 그리고 짧은 저녁시간을 보낸 뒤, 평소 자던 시간에 잠이 쏟아져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이제부터는 꿈 이야기다. 꿈속에서 나는, 이 일이 꿈인 줄 모르고 겪었다.)

한 날은 엄마가 제발 자기를 좀 데려가 달라고 내게 연락을 해 왔다. ‘아이, 엄마는 참. 그러다 응급실 갈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시려고 지방을 온다 그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솔직히 조금은 귀찮다는 마음도 있었다. 대체 아빠는 언제 보호자 역할을 하는 거야? 원망도 조금 있었다.

엄마가 자꾸 연락을 하시니 어쩔 수 없이 엄마를 보러 인천에 갔다. 그런데 눈앞의 엄마 모습을 보니, 모시고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곁에 데리고 있으면서 내가 수시로 돌봐줘야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어, 엄마를 모시고 내려왔다.

인천에서 부산까지 내려오는 길은 역시나 멀고도 멀었다. 그 먼 길을 내려오는 동안, 엄마와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러다 내가 담담하게 툭, 이런 말을 했다.

“엄마, 나는 엄마를 너무 사랑하면서도, 엄마가 무서웠어. 엄마가 마음은 따뜻한데 이게(말)이 좀 쎄잖아. 그래서 난 그런 엄마의 말들을 겪어내면서, 사실 아플 때가 참 많았다.”

그러자 엄마가, “그랬어~? 미안해, 우리 딸~” 하시는 것 아닌가. 여기서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어야 하는데, 꿈속 상황에 이미 푹 젖어버린 나는 이게 현실인 줄로 굳게 빠져들고 있었다.


엄마는 부산에 도착하신 뒤 채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이번엔 엄마의 임종을 지켰다. 엄마는 내 품에서 주님 손으로 떠나셨다. 엄마가 아직 따뜻할 때에 남편이 도착했고, 나는 엄마를 계속 품에 안고 있었다. 엄마에게서 포근한 냄새가 났다.

엄마를 이제 영안실로 보내드리며 나는 크게 울었고 진짜로 울었다. 그 울음소리에 퍼뜩 눈을 떴다. 아직도 엄마의 모습이 내 눈앞에 선명한데, 새로 이사한 집의 천장이 보였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한참 눈을 깜박거렸다. 귓가엔 내 심장소리가 두 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잠귀가 밝아 항상 귀마개를 끼고 자기 때문에 적막함과 심장소리가 더욱 도드라지게 대비되어 고막을 울리고 있었다.


옆자리를 보니 올빼미 남편은 자기 방에서 이 시간까지 무얼 하는지 나 혼자였다. 한편으로, 자는 사람을 깨우지 않았으니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어서 남편에게 가서 이 감정을 나누고 싶은데, 심장소리에 압도되고 꿈의 무게에 눌려 한동안 꼼짝하지 못했다.

잠시 뒤, 눈앞에 선명했던 엄마의 얼굴이 흐려지고, 서재방 문을 열었다. 남편은 내 표정을 보더니 “응, 무슨 꿈꿨어?” 하고 물었다. 무슨 꿈을 꿨다고 할지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할지 회오리 속에서 먹먹한 중에 한참의 정적이 지나 내가 꺼낸 말은 “엄마 돌아가셨어”.

남편은 “응.. 엄마 돌아가셨지.”라고 말했고, 나는 “그게 아니고,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한 번 더 반복했다. 그러면서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 온 얼굴을 적셨다.


엄마가 나랑 같이 있고 싶어 했는데 나는 피하고 싶어 했던 것도, 그리고 우리 둘이 못다 한 이야기들을 얼마나 나누었는지, 엄마가 “그랬어~? 내 딸” 하며 다정하게 들어주셨다는 것도. 엄마를 품에 꼭 안은 채로 보내드렸다는 것도.

장례식 이후에 엄마를 생각하며 운 적은 없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엄마를 진짜로 떠나보내드렸다.

진짜 엄마를 잃은 여느 딸의 모습처럼, 그렇게 울었다.


엄마가 떠나신 지 꼭 120일째 되는 날이었다.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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