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자궁내막증 수술을 마치고 <인생은 불꽃놀이>라는 글을 발행했었다. 평온한 일상이 이어지던 어느 날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응급실행 그리고 새로운 명의 선생님을 만나게 된 이야기와, 끔찍한 스텐트 시술을 9개월이나 유지해야 했지만 그 가운데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음을 회고하며 썼던 글이다.
인생은 정신없이 터지는 불꽃놀이다 ㅡ 이 말이 씨가 된 건지, 그간 정말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수술을 잘 마치고 건강을 회복하나 싶었는데 정기검진에서 갑자기 양쪽 난소에 모두 주먹보다 큰 혹이 생겼다며 재수술 가능성이 오가기도 했다. 다행히 한쪽은 없어졌고, 다른 한쪽은 여전히 혹이 있지만, 일단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
속히 건강을 회복해 [벌써 세 번째 자궁내막증 수술] 매거진으로 씩씩하게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선, 돌연 [되바라진 소띠 며느리] 브런치북을 기획하더니, 그마저도 연재일을 무기한 지키지 않았다. 평소답지 않게 흔들리던 나는 글의 방향을 잃었고, 구독자들도 여럿 떠나갔다.
그리고 수술 후 8주가 되던 날에 어머니의 장례가 있었다. 엄마의 죽음_ 오래 투병하다 돌아가셨기에 이전부터 준비했던 이별이지만 죽음 이후 갑자기 예기치 못했던 이야기 전개로 내 삶에 또 한 번 거대한 쓰나미가 휘몰아쳤다. 어머니의 장례 이후, 모든 상실의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건강도, 마음도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되묻게 되었다. 대혼돈의 여정을 바탕으로 이 새로운 브런치북을 구상하게 됐다.
큰 감정적 육체적 변화에서 떠밀려가지 않고자 나는 여러 가지를 시도했다. 너무 깊은 생각의 늪으로 빠지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밤샘 드라마 시청, 생전 하지 않던 모바일 게임 가입, 자발적 심방 참석, 그걸로 부족했다. 9월의 어느 날 아침, 나는 [그 많은 목사의 아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원고들을 정리하여 출판사에 투고를 했다. 그리고 나를 읽어주시는 대표님을 만나 출간계약을 하기에 이르렀다.
원고의 상당 개요가 브런치에 공개되어 있기에, 더 많은 내용들을 새로 꺼내야 했다. 계약이라니, 내 이야기가 진짜 <책>이 되어 세상에 나오게 된다니! 이제껏 필명 뒤에 숨어 겁 없이 이야기보따리를 풀던 나는 갑자기 두려워졌다. 아, 여기까지 즐거운 경험 잘하고 갑니다~ 이 말만을 남기고 총총, 후퇴하고 싶기도 했다. 뒤돌아 도망가고 싶은 마음과 더 나아가 끝까지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공존했다.
생각으로는 결코 생각을 잡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이럴까, 저럴까? 앞으로 이렇게 될까, 저렇게 될까? 고민할 시간에 그냥 하기로 했다.
혹부리 영감의 노래주머니처럼, 이야기가 술술술 나오고 받아쓰느라 바쁜 내 모습을 보며 남편이 신기해했다. 이제 웬만한 에피소드는 다 쓴 것 같은데도 또 이렇게 계속 앉아서 쓰는구나, 당신은 정말 글 쓰는 게 즐거워 보인다며 응원을 해줬다. 정말이었다. 나는 정말로 글쓰기가 즐겁다.
가끔 한 번씩 회까닥 해서 뭔가 벌였던 일들이 소소하게 몇 번 있었지만, 이번 추진만큼 무계획인 일도, 즐거운 일도 없었다. 뭔가에 몰입하는 기쁨이 있었다. 되겠냐 안 되겠냐를 논하고 재고 계산하고, 그러고서도 실행하는 데까지 또 오랜 다짐과 결심이 필요했던 평소의 나와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것도 썩 괜찮게 느껴졌다.
백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해도 다 대비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니까. 뭐가 될지 어차피 몰라. 그냥 해보는 거야!
갑자기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출판사 투고에 이어 작업실시옷 작가님과 공동매거진도 덥석 시작하고, 이사도 했다. 사역지는 동일하다. 사역지 이동은 없이 사택만 옮기게 됐다. 이래 본 적은 또 처음이다.
선임 목사님들이 더 괜찮은 컨디션의 사택으로 옮겨가실 때, 이전의 나는 뭐 하러 그 동네에서 그 동네로 괜히 이사비용 들이고 옮기나. 힘만 들고 피곤하지, 생각했었다. 그런데 드디어 우리 가정에 집을 옮기겠냐는 제안이 들어왔을 때, 울집 남자들은 다 글쎄 하는 중에 나만 응! 나 이사 갈래!! 이렇게 강력히 주장하여 길이름까지도 동일한 같은 동네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또...
교육부서 전도사가 되었다.
공대를 나온 내가 어쩌다 전도사까지 되었나. 무허가도 이런 무허가가 없다.
하긴, 생각해 보니 내가 적성에 안 맞는 사모의 길에 덜컥 들어서게 된 것도 다 평소와 다른 내가 벌인 일의 나비효과였구나. 열아홉에 갑자기 대학보다 하나님의 세계와 가치관을 먼저 세우고 싶다며 담임선생님을 걱정시키고 제주열방대학엘 가는 바람에 거기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백가지 만 가지 경우의 수를 예상하고 대비하며 고민하느라 엄(Umm..)만 반복하며 쉽게 엄두를 내지 못하던 엄걸(Umm-girl)에서 예스맨이 된 나. 유아부 전도사 임명을 받은 이면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이제는 삶의 태도를 적극적으로 바꾸기로 결단했던 그 맥락과 마음으로 <네, 하겠습니다> 대답해 놓고, 실은 그 뒤로 잠을 못 이뤘다.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며 하하 호호 웃다가도 전도사로 앞에 설 생각이 불현듯 떠오르면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들이 엄마의 급격한 표정변화를 보며 배꼽을 잡았다.
인생은 갑자기다. 아빠와 나를 쥐고 호령하던 엄마도 어느 날 갑자기 떠나버렸고, 나 또한 그럴 것이다. 훌쩍 소풍을 떠나고 갑자기 이사를 가듯이.
죽음을 통해 현상 너머의 것 사후세계를 볼게 아니다. 엄마 덕분에 행복했고 엄마를 사랑했고 엄마 때문에 이토록 고통스러웠으나, 이제는 엄마가 곁에 없다는 것에만 집중한다면 나는 매일 술병과 함께 잠들고 깰지 모른다. 대체 왜 그랬냐고, 여전히 묻고 싶어 하겠지. 아무 말 없는 죽음은 그저 잠잠히 우리의 지금을 비춰준다. 모두에게는 끝이 있고, 그렇다면 너는 오늘 어떻게 살고 싶은지, 죽음은 조용히 나에게 질문하고 있다.
우리는 내일을 모르기 때문에 오늘 용감할 수 있다.
드라마를 보면서 느꼈다. 자신의 마지막 날을 아는 것이 결코 복이 아니구나_ 이 드라마 또한 평소의 나였다면 절대 보지 않았을 장르이다.
전임자는 기발하기가 그지없는 베테랑 사역자로, 아이들과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고 아무런 밑그림 없이 바로 가위질을 하면 교재가 뚝딱뚝딱 완성되는 그런 분이셨다.
이 일을 통해, 나는 비교당하는 두려움을 극복하게 될 것이다. 주변의 다른 사모님들 같지 않고 나만 홀로 이토록 아무런 반짝이는 배경이 없어서, 열등감 덩어리인 나를 더 깊이 직면하게 될 것이다.
평소 나와 아주 많이 다른 모습을, 기대하고 있다. 앞에 나서면 염소가 되는 내가, 선생님들과 어린이들 앞에서 연기까지 해가며 말씀을 쉽고 맛있게 전하길, 이전과는 아주 다른 숨겨왔던 내가 나오길. 그래서 나를 죽이고(킬미) 그것이 또 나를 치유하는 계기가 되길(힐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