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 제품 개발 방향에 대한 논의가 오가던 중, 제품의 소재에 대한 협의가 필요해 졌다. 당시 0~3세 영유아를 키우는 엄마들은 주로 원목 제품을 선호했다. 그 이유는 단순하고도 명확했다. 아이들에게 안전해 보였기 때문이다.
자연물에 가까운 원목은 플라스틱보다 신뢰를 주었다. 아이들이 입에 물고 빨아도 해롭지 않으리라는 믿음. 그 믿음은 선호의 근거가 되었지만, 이내 다양한 문제점도 드러났다. 원목은 무겁고, 아이들의 침이 스며들어 세균이 번식했다. 마감이 미흡한 제품은 가시처럼 날카로운 부분이 생겨 아이들을 다치게 했다. 나무의 수축과 뒤틀림 또한 불가피한 일처럼 보였다.
고급 가구나 명품 완구에나 어울릴 만큼 세심하게 만들어진 원목 제품은 많지 않았다. 그나마 품질이 높은 제품들은 대부분 스위스나 독일에서 제작되었는데, 막상 미팅을 통해 검토해 보니, 원가는 너무 높았다.
또 다른 문제는 원목의 수종이었다. 국내에서 유통되는 나무 제품은 대부분 열대 우림의 고무나무로 만들어졌다. 성장 속도가 빠른 탓에 밀도가 낮아 무르고 변형이 잘 일어났다. 갈라짐, 뒤틀림, 건조가 덜 된 원목은 세균 번식의 위험도 더 높았다. 무엇보다 열대 우림의 나무를 사용하는 것은 환경을 파괴하는 행위였다.
유럽의 명품 브랜드들은 은이나 유리 소재로 유아용 제품을 만들곤 했다. 무겁지 않고 세균 걱정에서 자유로운 소재였다. 하지만 그 마저도 극소수, 아주 소량 생산되는 제품에 한정되었다. 제작 단가가 높은 탓이었다.
내 딸이 태어난 즈음, 실리콘 소재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엄연히 플라스틱의 한 종류였으나, 환경호르몬에서 자유로웠고 의료용으로도 쓰였다. 유아용 제품으로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실리콘만으로 전 제품을 제작할 수는 없었다. 연성의 한계와 높은 가격이 걸림돌이었다.
그렇게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전체 제품군의 주 소재를 플라스틱으로 하고, 각 제품의 특성에 맞는 식물성 플라스틱을 찾아 적용하기로 했다. 대학원에 다닐 때 처음 알게 된 생분해성 플라스틱 PLA가 떠올랐다. 그러나 PLA는 단독으로 쓰기에는 열에 약했다. 뜨거운 물에 삶으면 변형이 생겼다.
게다가 대부분의 업체들은 PLA와 일반 플라스틱을 혼합해 사용했다. 친환경성을 강조하며 생산되었지만, 혼합된 플라스틱은 재활용이 불가능했다. 생분해가 가능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무늬만 친환경일 뿐이었다. 진정한 친환경 제품이라면 재활용이 가능해야 했다. 다양한 환경에서 화학 물질이 발생하지 않고 세균 번식이 없어야 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적합한 소재였다. 일단은 식물성 플라스틱이거나 식품용기로 검증된 것이어야 했다. 가격도 중요했다. 일반 소재보다 30%를 초과하면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현실은 어려웠다. 10년 전 그때에는 지금보다도 소재에 대한 정보가 적었고, 검증되지 않은 소재들이 난무했다.
길을 찾기 위해 대학원 시절 자료를 다시 꺼내 보았다. 그때 발견한 식물성 폴리머가 있었다. 이 소재는 미국 ‘D’ 사에서 개발된 것이었다. 국내에선 쉽게 구할 수 없는 소재였다. 나는 직접 그 회사에 연락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망설였다. 일반적으로 플라스틱은 벤더사를 통해 공급받는다. 그러나 이 소재는 특수 폴리머로 분류되어 직접 연락하지 않으면 샘플을 구할 수 없었다. 한국 지사의 정보는 제한적이었다. 나는 본사로 연락해 한국 담당자를 소개받았다. 한국 지사의 담당자는 나와의 첫 통화에서 매우 놀라워했다. 디자이너가 직접 소재를 찾아 연락한 경우는 처음이었다고 했다.
그들과의 미팅은 긴장 속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그동안 구상했던 디자인과 시안들을 프레젠테이션으로 준비했다. 기획의 방향성, 소재의 필요성, 제품군 확대의 가능성을 설명했다. 협업이 가져올 이점까지 자세히 전했다.
우리 회사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았다. 교구 특성상 대량 생산도 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가능성을 믿었다. 그들이 우리 제품을 포트폴리오로 활용했을 때의 장점에 대해 설득하고 싶었다.
프레젠테이션이 끝났을 때, 그들의 표정에서 호기심과 긍정의 기운이 느껴졌다. 담당자는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 고민해 보겠습니다.”
그 미팅 이후 나는 그들 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플라스틱 소재의 특성, 양산 과정에서의 주의점, 그리고 소량으로도 높은 품질의 컬러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까지. 그들은 나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D’ 사 역시 이 식물성 소재를 어떻게 상용화할지 고민하던 중이었다. 나는 그들의 고민에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었다.
그 만남 이후, 나 혼자의 작업은 점점 더 거대한 팀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외부의 도움으로, 나는 더 나은 디자인을 고민하고, 더 깊은 질문을 던졌다.
디자인이란 무엇일까. 소재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나는 계속 답을 찾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