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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릭레비와 첫 프로젝트 1

by JJ Jan 16. 2025
브런치 글 이미지 1


대학원 시절, 우리 학과의 수업을 듣는 한 시각디자인과 대학원생이 있었다. 그는 친환경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우리 교수님의 논문 지도를 받으며 수업을 청강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종종 이야기를 나누었고, 일과 삶에 대한 고민을 공유했다. 그는 특별한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해외 디자이너를 국내에 소개하는 에이전트 회사였다.


당시 한국에는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다. 특히 김영세라는 스타 디자이너의 등장 이후로 그 흐름은 더욱 뜨거워졌다. 김영세 디자이너는 아이리버의 디자인을 맡아, 당시 아이리버 제품들이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만들었다. 2005년 CES 개막 연설에서 빌 게이츠가 아이리버의 ‘H10’을 들고 등장하던 장면, 스티브 잡스가 아이팟의 대항마로 아이리버를 언급하던 순간들은 제품디자인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여러 기업들이 뛰어난 디자이너들과의 협업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IDEO와 협업했던 나의 경험 또한 그 흐름 속에 있었다.


그 즈음, 현대카드는 상품화된 카드 자체를 새롭게 디자인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0만 원에 달하는 연회비의 블랙카드는 카림 라시드의 디자인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이러한 성공 사례들을 보면서도, 나는 늘 궁금했다. 어떻게 이들은 뛰어난 디자이너들을 찾아내고, 협업을 이뤄냈을까? 단순한 검색만으로는 어려웠을 텐데 말이다. 2000년대 중반, 지금처럼 네트워크가 촘촘히 엮여 있던 시절이 아니었으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어느 날 한 방송에서 우연히 엿보았다. 프로그램은 행남자기라는 회사에 관한 이야기였다. 당시 행남자기는 강화유리 그릇 브랜드인 코렐과 해외 명품 브랜드들에 밀려 위기를 겪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제품 디자인의 혁신을 통해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협업의 첫 파트너는 프랑스 디자이너 아릭 레비였다. 그는 공장을 방문한 뒤 초벌구이 전의 흙으로 성형된 초기 제품을 관찰하더니, 그것을 일부러 바닥에 떨어뜨렸다. 파편처럼 찌그러진 형태는 그의 손길 아래 새로운 그릇으로 재탄생했다. 자연과 중력, 물질의 물리적 특징들이 어우러져 창조된 작품이었다. 플루이드라 이름 붙여진 이 그릇은 단순한 도자기 디자인의 경계를 넘어섰다.


이 이야기를 접하며 나는 내게도 이런 협업의 기회가 주어지기를 꿈꿨다. 아릭 레비의 방식은 컨셉보다는 결과물에 중점을 두었고, 그로부터 탄생한 디자인은 결코 일회성이 아니었다. 그는 소재의 본질을 파악했고, 그것을 살려내는 솜씨가 탁월했다.


그러던 중, 내가 친해졌던 대학원생으로부터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그의 회사가 바로 카림 라시드와 아릭 레비를 국내에 소개했던 곳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대표님을 소개해 주겠노라 했다.


대표님은 실장님으로 불리고 있었다. 첫 만남에서 그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좋은 디자인을 향한 갈증에서 시작된 에이전시는 단순히 해외 디자이너를 소개하는 역할을 넘어 한국의 디자인 수준을 높이고, 결국엔 국내 디자이너들을 해외로 내보내는 다리 역할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나를 자극했고, 한층 더 도전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시간이 지나 회사 내부에서 해외 전문가와의 협업을 통해 콘텐츠에 새로운 차별성을 부여하려는 논의가 있었다. 이에 나는 디자인과 콘텐츠의 방향성을 정리해 실장님께 도움을 청했다. 우리 프로젝트에 적합한 디자이너를 추천 받기 위해서 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실장님은 답을 주었다. 추천 디자이너 중 하나는 아릭 레비였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자녀 교육을 중요시 하는 유태인계 프랑스인이었고, 늦둥이 딸을 위해 직접 교구와 장난감을 디자인한 경험이 있었다. 그의 작업 방식은 나와 닮은 점이 많았다. 아이디어는 구체적인 삶의 필요로부터 나왔고, 그것이 실험을 거쳐 실체화되었다.


나는 내부 설득을 위해 제안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협업의 당위성을 증명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에이전시의 실장님께도 도움을 구했다. 제안서의 초안이 완성되자, 우리는 회장님의 결재를 기다렸다. 다행히 그는 깊게 묻지 않았다. 바로 허락이 떨어졌다. 그리고 며칠 후, 아릭 레비로부터 답이 왔다.


그는 우리 프로젝트에 관심이 있었다. 함께 해보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이 메시지를 받은 날 밤, 내 마음속에는 묵직한 설렘이 차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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