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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장님과의 첫 만남

by JJ Jan 23. 2025
브런치 글 이미지 1


핀덴 교육 제품이 런칭 된 후, 회사는 교육 제품을 넘어 유아 전문 브랜드로 나아가고자 준비하고 있었다. 유모차를 비롯한 유아 용품 전반의 라인업이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회사에겐 생소한 신사업이었고, 경험 없이 제품을 기획하고 제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회사는 이러한 전환기를 이끌 임원을 필요로 했고, 외부 대기업 출신의 한 분이 사업부 임원으로 선임되었다. 조직이 개편되고, 기존 사업부 실장님은 자리를 옮겼다. 모든 것이 재구성되는 혼란의 시기였다. 나는 수시로 자리와 업무가 이동하며 일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새로 오신 임원은 부사장이었고, 식품 사업의 전문가로서 회사의 건강 기능식품 포트폴리오에 기여하기 위해 스카우트된 분이었다.


부사장님과의 첫 미팅은 예상보다 험난했다. 그분은 교육 제품, 특히 교구 제품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졌다. 많은 비용이 투입된 데다 시각적으로도 강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미팅에서 문제가 됐던 것은 친환경 소재에 관한 논의였다. 부사장님은 왜 원가가 높은 소재를 선택했는지, 일반적인 유아용품에서도 이런 소재를 사용하느냐는 질문을 했다. 이는 컨텐츠 개발 팀에서 이미 부사장님께 보고한 이야기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컨텐츠 팀은 친환경 소재로 인해 원가가 높아졌다고 언급하며 어려움을 강조했지만, 그들이 다량의 콘텐츠를 요청하며 추가된 요구사항은 배제한 채였다. 마치 내가 친환경 소재를 고집한 결과 원가 상승이 초래된 것처럼 보고했다. 하지만 나는 초기 기획 단계에서, 친환경 소재를 사용하는 것이 마케팅적 의미와 안전성을 높일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도 안전 이슈로부터 회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강조하며 합의를 이끌어냈다. 나의 합류 역시 친환경 영유아 제품 개발이라는 회사의 목표와 부합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부사장님은 갑작스레 "친환경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보통 잘사는 집안의 사람들이지 않느냐"며 내가 그런 집 아들 같다는 말을 했다. 그 순간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는 더는 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미팅이 끝난 뒤, 팀원들에게도 내 결심을 알리며 마음을 정리했다.


그러던 중 이 일이 컨텐츠 팀에도 전해졌는지, 팀장이 부사장님과 따로 만난 것 같았다. 이번 이슈가 회장님에게 까지 보고될 경우 문제는 더 복잡해질 테니, 수습하기 위해 움직인 듯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미 이 조직에서 나아갈 마음을 잃었다.


하루가 지나, 부사장님에게 호출을 받았다. 분위기는 이전보다 부드러웠다. 부사장님은 내가 디자인한 제품들을 살펴본 뒤 다시 소재와 원가에 대해 물었다. 나는 친환경 소재를 선택하게 된 과정과 원가를 낮추기 위해 소재 회사들과 협력했던 사례를 상세히 설명했다. 일반 소재와의 원가 차이를 줄이기 위해 내가 원하는 가격에 맞춘 전용 소재 개발을 요청했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만든 제품이 소재 회사 포트폴리오의 일부로 활용될 수 있게 조율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결과, 국내 소재 회사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장난감 분야에서의 가능성을 발견했고, 이후 레고 본사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성과를 이루기도 했다. 이러한 내용을 들은 부사장님은 이후부터 무엇이든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필요한 것들을 모두 요청하라고 하셨다.


그 후로 부사장님은 내 작업 환경을 더 좋게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미팅은 늘어났고, 주말에도 연락이 오가곤 했지만, 나는 더 많은 책임감을 느끼며 일했다. 내게는 경력이 시작된 이래 가장 많은 도전과 시도가 가능했던 시간이었다. 주말도 없이 바쁘게 보냈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즐거웠다.


교구, 유아용 매트, 젖병, 의류, 디바이스, 화장품, 가구, 전시 디스플레이 부스와 건축까지. 나는 브랜드 전반을 총괄하며 철학적으로 일관된 친환경 컨셉으로 모든 제품을 묶어낼 수 있었다. 이때의 모든 작업은 내게 가장 중요한 포트폴리오가 되었다.


지금처럼 저출산 시대에 유아용품 시장은 좁아지고 있지만, 이를 전문적으로 디자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는 이 분야에서 희소한 디자이너가 되어가고 있다.


친환경 디자인이라는 방향은 어쩌면 내게 가장 잘 맞는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첫 시작은 삐걱거렸지만, 이후로 많은 기회를 준 부사장님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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