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 박람회에서 최대의 화두는 늘 ‘코엑스 베이비페어’에 참여하느냐, 하지 않느냐였다. 지금은 출생아 수가 줄어들면서 베이비페어도 예전만 못하지만, 당시에는 코엑스에서 열리는 전시 중 가장 많은 사람과 자본이 몰리는 행사가 바로 이 베이비페어였다. 유아 제품을 다루는 모든 회사는 이곳에 참여 여부가 곧 시장에서의 위상을 좌우했다. 베이비페어에서의 부스 배치와 위치는 곧 브랜드의 존재감을 상징했다. 메인 부스를 차지하는 회사는 시장의 선두주자였고, 작은 부스를 얻는 것조차 경쟁이 치열했다.
우리 회사는 전통적으로 한글 교육 제품으로 이름을 알렸고, 매년 ‘유아교육 박람회’에는 꾸준히 참여해 왔지만, 영유아 제품 라인으로 베이비페어에 참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부사장님과 마케팅팀장은 베이비페어 관계자를 수시로 만나며 부스를 확보하려 애썼다. 그러던 중, 코엑스 B홀 끝 벽면에 9부스 정도의 공간이 비었다는 연락이 왔다. 위치가 아주 좋진 않았지만, 이제 막 영유아 브랜드로 새롭게 출발하려는 우리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는 부스를 계약했다.
마케팅팀은 관람객을 끌어 모을 다양한 프로모션 아이디어를 구상했고, 나는 공간 디자인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이미 브랜딩과 네이밍 작업은 국내 유명 브랜딩 회사와 함께 진행했기 때문에 디자인 방향은 어느 정도 정해진 상태였다. 문제는 B홀 안쪽 벽면에 붙어 있는 이 9부스 공간의 구조였다. 관람객이 오갈 수 있는 출입구는 전면밖에 없었고, 코엑스의 기본 조명은 어둡고 칙칙했다. 공간을 밝히고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조명 설계가 필요했다. 또, 교육 회사 특유의 캐릭터성과 고급스러움을 동시에 살려야 했다.
당시 베이비페어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스는 주로 해외 유모차 브랜드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부스는 제품에 초점을 맞춘 탓에 공간 디자인 자체는 단조로웠다. 나는 차별화를 꾀하기로 했다. 갤러리처럼 미니멀하면서도 정갈한 디자인으로 부스를 꾸미는 방향으로 잡았다. 무광 페인트로 마감된 박스 구조에 텍스트와 캐릭터를 배치했고, 전체적으로 라운드 형태를 사용해 부드럽고 따뜻한 공간감을 조성했다. 바닥은 나무로 마감해 자연스럽고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했으며, 천장에는 조명을 배치해 공간 전체를 밝힐 수 있도록 했다.
입구 부분과 가구는 브랜딩에서 사용된 포인트 컬러를 활용했고, 대표적인 전집 스토리북의 일러스트를 입체적으로 제작해 디스플레이 공간을 구성했다. 디스플레이 상단에는 멀티비전을 설치해 홍보 영상을 상영했고, 내부에는 교구와 책을 배치해 관람객들이 한눈에 포트폴리오를 볼 수 있도록 했다. 모든 디테일이 하나의 조화로 연결되도록 신경 썼다.
설치가 진행되던 마지막 날, 조명이 밝혀지고 부스가 거의 완성되자, 주변의 다른 부스 관계자들이 하나둘 우리 부스를 구경하러 오기 시작했다. B홀 안쪽이라는 위치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 부스는 단연 돋보였다. 모든 직원들과 설치를 맡은 업체 담당자들조차 만족스러워 했다.
전시 첫날, 나는 부스의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고, 마케팅팀과 컨텐츠 개발팀은 관람객을 유치하기 위한 준비로 분주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특별한 프로모션 없이도 관람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호기심에 부스를 둘러보았고, 전집과 교구 제품을 보며 구매로 이어졌다. 전시를 통해 처음으로 공개된 제품들이었지만, 관람객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부스 앞은 관람객들로 긴 줄이 이어졌고, 이로 인해 옆 부스들이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줄을 서는 관람객들이 옆 부스의 매대를 가리거나 통로를 막는 상황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급히 줄을 S자 형태로 만들어 중앙 통로로 유도했고, 직원들이 나서서 동선을 정리했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우리 부스는 흥행을 이어갔다.
회장님과 부사장님이 부스를 방문했을 때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로 붐비는 부스를 보며 그들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회장님은 다음 전시에 대한 투자와 확장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3일간의 전시가 끝났을 때, 모든 직원들은 녹초가 되었지만, 마음만은 가벼웠다. 매출도 기대 이상이었고, 무엇보다 브랜드의 홍보 효과가 매우 컸기 때문이다.
전시가 끝난 뒤, 마케팅팀을 통해 우리는 또 다른 소식을 들었다. 다음 베이비페어에서는 A홀 입구의 20부스 공간을 배정받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원래 그 공간을 사용하던 업계 1위 회사가 B홀로 자리를 옮기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처음 베이비페어에 참가한 신생 브랜드였지만, 이번 전시에서의 성공이 우리에게 이런 기회를 가져다 준 것이었다.
물론 기쁨 뒤에는 부담도 있었다. 기존 공간의 2배가 넘는 새로운 부스는 관람객의 동선부터 공간 디자인까지 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4면이 모두 노출되는 공간에서 어떻게 디스플레이를 구성할지, 내부를 어떻게 채울지 고민해야 했다. 설렘과 걱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나는 새로운 전시 준비에 돌입했다.
6개월 후, 우리는 또 한 번의 도전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