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릭 레비와의 계약이 체결되자, 우리는 프로젝트의 방향성을 세세히 논의하기 시작했다. 교구 제작은 콘텐츠 개발팀에서 제안한 교수 활용 방안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지만, 상황에 따라 내용이 자주 바뀌었다. 그 때문에 디자인을 수차례 수정해야 했고, 심지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적도 많았다. 아이디어를 체계적으로 정리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고, 간단한 스케치나 러프한 3D 시안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상대방은 이 시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불필요한 일들이 쌓여갔다. 그래서 첫 번째 시안조차 완성도 높은 3D 작업 형태로 제공해야 했다.
같은 회사에서 일하면서조차 발생하는 이해의 부족. 그런 어려움이 프랑스에 있는 아릭과의 작업에서 똑같이 일어날 수는 없었다. 나는 아릭에게 보내는 디자인 요청서를 훨씬 자세히 작성해야 했다. 소품이나 전자제품, 가구 같은 일상적인 제품에서는 디자이너의 직관과 심미성이 중요했고, 전체적인 콘셉트만 주고 수정을 요청하면 됐다. 하지만 유아용 교구는 달랐다. 교육을 바라보는 관점부터 문화와 언어까지, 모든 것이 달랐다. 우리는 오차를 줄이기 위해 구체적이고 명확한 가이드를 마련해야 했다.
그럼에도 내부 콘텐츠 개발팀은 러프한 자료들만 넘겨왔다. 내부에서는 대화를 거쳐 수정하며 진행할 수 있었지만, 아릭에게 이런 방식은 불가능했다. 그는 한국이 아닌 프랑스에서, 완전히 다른 시간 속에 살고 있었다. 내가 그의 커뮤니케이션 창구 역할을 맡았지만, 정리되지 않은 요청 사항으로 인해 일이 계속 연기됐다. 프랑스에서는 여름휴가가 길었고, 아릭 또한 다른 일정들이 있었기에 더는 미룰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콘텐츠 개발팀과 미팅을 요청했다. 하지만 미팅조차도 여러 차례 지연되었고, 겨우 들은 답변은 “빛, 물, 소리, 움직임”이라는 추상적인 표현 뿐이었다. 이걸로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만들라는 것인가. 유아 교구란 명확한 목적과 아이디어가 필요한 영역이었다. 단순한 자연 요소만으로는 제품을 디자인할 수 없었다.
나는 제품디자인 후배와 함께 몇 가지 컨셉 디자인을 준비했다. 시각적인 방향성을 제시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팀에서는 이마저도 구체적 해답을 주지 못했다. 다만 우리가 준비한 시안을 보고선 “이 요소들을 한 번에 담아내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조금씩 절망 속으로 가라앉았다.
결국 아릭에게 특정 요소 몇 가지를 선택해 아이디어를 구체적으로 제안해달라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다. 준비한 자료들을 정리해 아릭에게 전달했다. 우리가 만든 시안, 가용 가능한 소재 데이터, 그리고 간략한 설명까지. 아릭은 추가로 요청하는 사항 없이 “한국에 올 일이 있다면 그때 보자”고 했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어느 날, 아릭으로부터 메일이 도착했다. 완성도 높은 10개의 시안이 첨부되어 있었다. 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가 보내온 작업은 우리의 요구 사항을 완벽히 이해한 결과물이었다. 언어도, 문화도, 교육에 대한 관점조차 다른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우리를 이해했는지 경이로웠다.
화상 미팅 날, 나는 긴장으로 손이 떨렸다. 그러나 화면에 비친 아릭은 친숙하고 따뜻해 보였다. 그는 시안 하나하나를 설명하며, 그것이 아이들에게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지 세심하게 말해주었다. 그 설명은 마치 이미 아이들과 함께 사용해본 사람처럼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었다.
나는 그날 아릭의 철학이 다른 디자이너들과 사뭇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디자인은 어떤 고유한 조형미로 규정되지 않았다. 필립 스탁이나 카림 라시드, 나오토 후카사와처럼 선명한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클라이언트와 상황에 맞추어 유연하게 변화했다. 아릭 레비의 작업은 다양한 형태와 소재를 넘나들며 조화로웠다. 그것이 그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미팅 이후, 우리는 아릭의 시안 중 운동성을 강조한 디자인으로 작업을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그는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발전된 안을 보내왔다. 그 후 우리는 안전성과 기능성을 점검하기 위해 여러 시뮬레이션 테스트를 진행했지만, 디자인과 설계 자체가 완벽해서 추가 설계 없이 목업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나는 그 과정을 지켜보며 깨달았다. 아릭 레비의 디자인 철학은 재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자연 현상에 대한 현대적 해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의 작품은 자연에서 모티브를 얻으면서도 세련된 조형미를 잃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해답처럼 느껴졌다. 자연, 그리고 그것의 본질을 해석하는 힘.
이후로도 나는 가끔 그의 작업을 떠올렸다. 내가 추구하는 디자인은 무엇인가, 내 철학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그때마다 나는 아릭의 철학을 내 마음에 새겼다. 그의 디자인은 힘겨운 순간에 내게 쉼터가 되었고, 그와 함께했던 프로젝트는 내가 평생 가슴에 품을 경험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