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페어의 반응은 예상보다 컸다. 단순한 교육 제품 개발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유아용품 시장에 진입할 계기가 되었다. 회사는 교육을 넘어 유아 전문 브랜드로 나아가기로 결정했고, 이를 위한 새로운 유아용품 개발 마케팅팀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방향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팀원들은 대부분 식품이나 의료기기 출신이었고, 자연스럽게 건강기능식품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그러나 교육 회사가 유아용품으로 확장하려는 상황에서 건강기능식품은 다소 동떨어진 영역이었다. 구체적인 그림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전반적인 디자인 컨셉을 다시 정리하기로 했다. 아이방을 중심으로 공간을 구성하고, 필요한 제품을 하나씩 채워 넣었다. 유아용 매트를 깔고, 위에 작은 의자와 책상을 배치했다. 쿠션 의자도 놓았다. 코끼리 교구를 한쪽에 두고, 핀덴카도 함께 넣었다. 방 안쪽에는 책장을 세우고, 그림책을 꽂았다. 젖병과 유아용 화장품도 가안으로 디자인해 배치하고, 유아용 인디언 텐트까지 새롭게 디자인했다.
이렇게 정리된 공간을 보니, 브랜드가 지향하는 방향이 한눈에 보였다. 내가 만든 방은 단순한 제품 배치가 아니라, 브랜드의 정체성을 담아낸 하나의 완성된 공간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작업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양산까지 염두에 두어야 했다. 하나의 제품군이 아니라 여러 제품을, 그것도 각기 다른 카테고리의 제품을 하나의 브랜드 철학 안에서 디자인해야 했다.
이 작업을 단 1주일 만에 끝냈다. 내가 미친 게 아닐까 싶었다. 디자인 뿐만 아니라 소재와 제작 방식, 출시 가능성까지 고민하며 만든 결과물이었다. 유아용 쿠션 의자에는 내가 직접 디자인한 패턴 그래픽까지 적용했다.
부사장님께 보고했다. 개발 마케팅팀도 함께 였다. 보고가 끝나자, 부사장님은 곧바로 회장님께 보고하자고 했다. 유아용품 브랜드로의 확장이라는 큰 그림이 명확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컨셉만 다듬으면, 디자인된 모든 제품을 그대로 출시할 수도 있었다.
회장님께 보고를 마치고 돌아온 뒤, 부사장님이 나와 개발 마케팅팀 과장을 호출했다. 장기간 유럽 출장을 가자는 것이었다. 목적지는 프랑스 파리, 스웨덴 예테보리와 스톡홀름, 독일 프랑크푸르트와 퀼른. 교육과 유아용품이 결합된 브랜드를 분석하고, 유럽 시장을 조사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유모차부터 교육 제품, 직수입 유아용품까지 조사해야 했다.
출장 계획을 짜며, 걱정과 기대가 동시에 밀려왔다. 이렇게 오랜 기간 해외 출장을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여러 나라, 여러 도시를 이동하며 조사해야 했다. 부담이 컸다. 회사 내부적으로도 특정 직원에게 이렇게 긴 출장을 맡기는 것에 대해 말이 나올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스웨덴이 출장 일정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기대를 갖게 했다. 스웨덴은 회장님의 요청으로 포함된 곳이었다. 이곳에서 우리나라 베이비페어와 비슷한 행사가 열린다고 했다. 북유럽 유아용품 브랜드들이 어떻게 디자인되는지 직접 보고 싶었다. 국내에는 아직 유통되지 않은 유모차 브랜드도 있었고, 실물이 어떤지 궁금했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백화점 명품 브랜드들의 유아용품을 살펴볼 예정이었다. 예전에 국내 백화점에서 에르메스의 유아 신발과 의류를 본 적이 있었다. 말 모양을 망아지 캐릭터로 변형해 유아용품에 활용했는데, 에르메스답게 정교하고 고급스러웠다. 이런 제품들은 국내에서 거의 실물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출장 준비를 하면서 부담감보다 호기심이 더 커졌다. 그러나 몇 주 동안 집을 비워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유치원에 다니는 딸을 아내에게 오롯이 맡기고 가야 했다. IDEO 프로젝트 때는 육아휴직 기간이어서 상황이 나았지만, 이번엔 아내가 혼자 감당해야 했다. 출장을 떠나는 날까지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도 아내는 걱정 말고 잘 다녀오라 했다. 그 말을 뒤로하고, 나는 첫 도착지인 파리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