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흐리고 공기는 차가웠다. 신혼여행 때 처음 만났던 도시였다. 그날은 날씨가 너무 좋아 에펠탑 위로 부드러운 햇살이 드리워졌다. 아내와 함께 찍은 첫 사진도 그곳에서 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때도 이번에도 이 도시는 내게 특별한 감정을 주지 않았다. 관광객이 너무 많아서인지, 혹은 마주치는 사람들의 태도가 무심하고 차가워서인지, 낯설고 멀게만 느껴졌다. 이번 출장의 첫날, 무거운 하늘 아래에서 다시 그 감정이 떠올랐다.
현지 가이드와 함께 파리 시내의 주요 유아용품 매장과 백화점을 방문했다.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우리가 흔히 아는 명품 브랜드의 유아용품이 독립적인 매장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디올이나 알마니 같은 브랜드의 아이들 제품은 한 매장 안에서 브랜드별로 나뉘어 진열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였다면 각 브랜드 매장 안에 따로 전시 공간을 만들어 럭셔리한 분위기를 강조했을 텐데, 여긴 달랐다. 역시 프랑스는 이런 방식인가 싶었다.
그러다 한 매장에서 발길이 멈췄다. '봉쁘앙'. 한국에서는 아직 정식 매장이 없었고, 엄마들 사이에서 직구로 주문하던 브랜드였다. 명품 브랜드와 달리 독립적인 매장이었고, 그것도 상당히 넓은 규모였다. 매장 안으로 들어가자, 원단의 감촉과 색감이 남달랐다. 아이 옷이라고 하기엔 너무 세련되었고, 가격도 명품 브랜드 못지않았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파리 사람들도 이 브랜드를 선호하지만, 가격이 부담돼 주로 아웃렛을 찾는다고 했다.
우리는 백화점을 나와 시내에 있는 봉쁘앙 매장을 찾았다. 이곳은 백화점 매장보다 더 크고, 2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공간이 눈에 띄었다. 지하층이 레스토랑이었다. 단순한 카페 수준이 아니라, 제대로 된 레스토랑. 프랑스는 역시 식사에 진심인 나라였다. 이런 매장이 많다고 했다. 옷을 파는 공간에 레스토랑이 함께 있는 것, 어쩌면 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조합일지도 몰랐다.
아이들을 위한 향수를 판매하는 것도 신기했다. 흔히 아는 불가리의 베이비 파우더 향처럼 한두 종류가 아니라, 다양한 향이 준비되어 있었다. 정말 아이들을 위한 럭셔리 패션 브랜드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나도 모르게 딸아이의 옷을 하나 골라 들었다가, 결국 가격을 보고 내려놓았다.
그 후, 유아용품과 교육제품을 함께 판매하는 편집샵을 방문했다. 교구, 그림책, 일반 유아용품이 조화롭게 배치된 공간이었다. 우리 브랜드가 오프라인 샵을 낸다면 이런 모습이어야 할 것 같았다. 아이들은 매장 안에서 자유롭게 책을 읽고, 교구를 가지고 놀았다. 부모들은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관심 있는 제품을 구매했다. 직원들은 아이들에게 사용법을 설명해 주거나 자연스럽게 놀이를 유도했다. 우리나라의 백화점이나 마트 매장과는 전혀 달랐다. 한국에서는 아이가 들어오면 영업사원이 부모에게 다가가 호객을 하기 마련인데, 이곳은 그런 분위기가 없었다. 부담 없이 제품을 보고, 경험할 수 있는 구조였다. 자연스럽게 공간을 채우는 방식. 어쩌면 교육과 소비가 함께 이루어지는 이상적인 형태였다.
그곳을 둘러보며 신혼여행 때 오르세 미술관에서 본 반 고흐의 그림이 떠올랐다. 미술관에는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이 많았지만, 고흐의 그림 앞에서 모든 것이 잊혔다. 한참을 넋 놓고 보고 있는데, 어린아이들이 선생님과 함께 조용히 다가와 그림 앞에 앉았다. 그리고 진지하게 설명을 듣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너무도 집중했고, 너무도 진지했다. 그때 깨달았다. 이곳 아이들은 단순히 미술관을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환경 속에서 성장하는구나. 프랑스의 패션과 문화가 왜 발달할 수밖에 없는지, 왜 그들이 색을 다르게 보고 조형을 다르게 해석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전에 아릭 레비와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컬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가 쓰는 색감은 유독 아름다웠고, 독특했다. 사물을 보는 관점도, 색을 다루는 방식도 남달랐다. 그의 디자인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어쩌면 그때부터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곳 편집샵을 보면서 다시금 떠올랐다. 아이들에게 제공되는 공간, 그들이 노출되는 디자인과 컬러, 그리고 그것을 경험하는 방식이 다르다면, 결국 성장하면서 표현하는 방식도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해외 유명 작가들의 전시가 열리고, 조상들의 작품을 가까이에서 볼 기회가 많아지고 있다. 전시 티켓이 비싸도 젊은 세대들이 관심을 갖고 찾아간다. 이런 변화가 반갑고, 미래가 기대된다. 하지만 여전히 프랑스 아이들이 성장하는 방식과는 다를 것이다. 그 차이가 결국 공간의 차이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이후 우리는 르 봉 마르쉐를 포함한 여러 매장을 방문했다. 하지만 처음의 감동만큼 강렬한 발견은 없었다. 파리에서 우리가 찾고자 했던 것들은 어느 정도 보았고, 이제 다음 도시로 이동할 시간이었다. 우리는 스웨덴 예테보리로 향했다.